얼마 전, 학도호국단 편제 계획에 관한 국가기밀문건(?)이 일선 고등학교에 시달되어 있고, 이 문건은 교육부와 학교장만 알고 공개되지 않은 채 대외비로 보관되어 있다는 언론의 폭로에 전교조와 일부 시민단체가 발끈했던 일이 있었다. 그 공문에 의하면, 전시에는 학도호국단을 부활하여 고등학생들을 병력으로 편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후 아무런 후속 보도나 논쟁이 없어 그 진상이 의아하기만 하다.
그런 비상계획문건의 필요성에 대하여는 국가관을 운운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어서 섣불리 논평하고 싶지는 않지만 필자는 학창시절, 학도호국단에 조직되어 이른바 교련을 받던 세대로써 그 악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당시 교정은 온통 목총이나 M1 소총을 휘두르는 총검술 구호와 제식훈련 등 군사문화 열풍에 시달려야 했고, 학생을 군대처럼 편제하여 연대장(학생장), 중대장(반장), 연대참모 등의 계급으로 불렀던 시절이었다. 교련 시간은 주당 3시간이었으나 학업 성적이 아무리 우수한 학교도 해마다 가을에 치러지는 교련 검열에서 낙오되면 계속 재검을 받아 기필코 통과해야 했으므로 매년 9,10월경 검열 일정이 잡히면 근 한 달 이상은 입시를 앞둔 고3을 제외하고는 수업을 전폐하고 행군과 분열 훈련에 돌입하는 등 학생들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다행히 한 번에 합격하면 다행이지만 불행히도 재검 판정이라도 받는 날이면 그때부터 학생들은 재검 준비에 초죽음이 되기 일쑤였다.
검열에는 남녀 학생이 따로 없었다.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완장과 휘장을 차고 군대식으로 제식훈련을 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1차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이나 내전 상태인 아프리카 등 동토의 왕국을 연상시켰다. 모든 학교는 하늘같은 검열단에게서 ‘우수’평가를 받아야 했으므로 학교의 온 행정력도 그 검열에 집중해야 했고 학교장과 학생부장을 겸했던 교련교사는 초긴장해야하는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대학 때도 교련 과목을 이수해야 45일간의 군복무 기간을 단축 받을 수 있어 상아탑 아래에도 군사문화 열풍에 휩싸이긴 마찬가지였으나 나는 3학년 때 ROTC를 지원하여 학군단 훈련을 받으면서 교련은 자연히 면제되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 후 사회 혼란이 극에 달했던 군정 3년을 지나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 이후 초대 문교부 장관에 취임한 안호상은 민주주의 민족교육을 강력히 주창하기에 이르렀고, 일제 통치에서 갓 벗어난 때에 군국주의적 인상을 주고 민주주의 교육에 역행하는 조직이 아니냐는 국민의 우려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반공정신을 확립한다는 명분하에 중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 군사 훈련을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고, 학도호국단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4.19 의거 후 급격한 정치 및 사회적 변화에 따라 1960년 5월 10일 이를 해체하여 학생 자치기구인 학생회가 조직되었다가 월남과 크메르의 공산화에 따른 충격으로, 비상시를 대비하여 1975년 6월 학도호국단이 부활되었다. 당시 고등학교 학생들의 기풍을 쇄신하고 정신력 함양 및 학원의 단결을 가져오는데 많은 업적을 내기도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던 학도호국단은 1985년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오늘날의 학생회 조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나는 미성년자의 전쟁행위가 유엔협약에 위반된다거나 비상시를 빙자한 좌경 교사와 학생의 격리 음모라는 일부의 주장을 논평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어느 공공기관이나 기업마다 비상계획이 수립되어 있음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학도호국단이라는 학창시절의 아픈 기억을 안고 사는 우리 세대의 후세들만은 꿈많은 청소년기를 그런 군사문화에 일찍부터 오염시키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다시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는 전쟁에 젊은 청소년들이 동원되는 불행한 사태가 오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