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요즘 아파트에 딸린 손바닥만한 텃밭에 채소를 가꾸는 재미에 빠져 있다. 열무와 상치, 아욱 씨앗을 뿌리고 고추 몇 그루를 심어놓고 매일 풀 뽑고 물도 주며 무공해성 농약 목초액으로 진딧물을 퇴치하는 등 여간 정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쏟는 이런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텃밭의 채소는 식탁에 오르기도 전에 벌레 먹고 질겨져 제구실을 못하니 씨앗 값도 못하지만 매일같이 사랑과 관심을 쏟는 만큼 쑥쑥 자라주는 모습에 자족하며 말 그대로 제값도 못하는 채소 가꾸기에 나름대로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
요즘 서울대와 정부의 관계 기류가 심상치 않다. 서울대 총장이 정부의 교육정책 전반을 비판하면서 본고사 부활로 오해받는 통합형논술과 고교평준화 폐지를 주장한데 대해 “교육의 목적은 한편으론 가르치고, 한편으론 솎아내는 데 있다. 좋은 원자재가 있어야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집안에서 어른들의 불화에 영문도 모르는 자식들은 불편하여 눈치 보기에 급급한 한 법인데 추진하는 정책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지는 것이 없는 집안 어른인 교육부의 무능함도 물론 원망스럽지만 대학의 장손 격인 서울대 총장의 처신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다.
학생을 열무처럼 솎아내는 것도 교육의 목적이라니……. 책임 있는 대학의 수장으로서 오만방자한 발언이다. 어떻게 중고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길러내는 일을 열무 '솎아내기'에 비유할 수 있는가. 그럼 고등학교는 무밭이고 대학은 병들고 벌레 먹은 시원찮은 열무나 솎아내는 곳이란 얘긴가! 솎아진 열무는 두엄탕에나 버려져야 하는 신세란 말인가.
콩나물시루에서 매일같이 부어주는 물을 먹고 자라는 콩나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이 아이들이며 그 과정이 또한 교육인 것이다. 다양한 특성과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에 대해 희망과 가능성을 갖고 임해야 하는 것이 교육자의 기본 자세이지 솎아내는 것을 전제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있는 대로, 없는 사람에게는 없는 대로 각자 수준에 맞게 창의적으로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 중고등학교의 공교육이 떠맡아야 할 일인 것이다.
좋은 원자재가 있어야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말, 그것도 다분히 흔해빠진 경제 논리다. 대학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이고 중․고등학교는 원자재를 만들어 공급하는 하청업체인가. 우리 교육이 우수한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며, 그래서는 더더욱 안 되거늘 교육이 우수한 학생과 그러지 못한 학생을 고르는 과정만으로 흐르는 것은 곤란하며 잡초처럼 솎아서 버리는 것이 결코 교육의 목적일 수는 없다.
고급 원자재를 독점해 온 생산자가 그 동안 만들어낸 제품이 원료에 비해서 훌륭하지 못한 예는 많다. 더구나 그 이유가, 일류 원자재에만 눈독을 들여온 탓에 생산 기술이나 방법을 발전시키지 못한 결과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에 따라 하청업체들의 생산 행위가 심각하게 교란되고 있다면 이것 또한 경제 원리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이미 서울대는 우리 교육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세’이자 반세기 넘게 우리나라 최고 인재를 독점해 왔으며 어느 재외공관이나 다름없는 치외법권을 가진 기관으로 군림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서울대를 비롯한 일류 대학은 자신들의 몸집을 키워 자본금을 키우는 방식으로 원자재의 질에 기대어 기업을 유지하는 이른바 ‘땅 짚고 헤엄치기’를 해왔을 뿐 자체 품질향상 교육에는 충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유수의 외국 대학에 비해 경쟁력이 형편없는 것이 이를 대변해 준다.
이제 대학은 '질 좋은 원자재'를 독점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만큼, 공급받은 원자재를 질 좋은 상품으로 만들 지 못한 과오는 반성해야 한다. 그들은 유능한 원자재인 고교 졸업생을 훌륭한 제품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문제를 원자재 공급 업체인 중․고등학교로 떠넘기려함으로써 중고교 교육 전체를 흔들고 뭇매를 전가함으로써 고등학교는 중학교 졸업생을, 중학교는 초등학교 졸업생을 줄 세우게끔 내모는 책임 전가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은 책임 소재를 가지고 힘겨루기나 하며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교육부, 대학 모두 함께 백지 위에 백년대계의 교육정책에 대한 밑그림을 다시 그려야 할 것이며, 동시에 중고등학교 공교육의 질을 문제시하고 책임을 전가하기 이전에, 대학교육의 질도 겸허히 돌아볼 때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