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야간 자율학습 감독이 없는 날이다. 가족과 함께 조촐한 외식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요량으로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겨 일찍 집으로 귀가했다. 방학이라고는 하지만 학교 일로 그 동안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자책감은 늘 갖고 있는 터였다.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아내는 불평을 털어놓은 적이 거의 없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일 먼저 나를 반긴 사람은 아내였다. 아이들은 아직까지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은 듯 집안은 조용하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남편이 일찍 귀가한 것이 기뻐서인지 아내의 얼굴 위로 화색이 감돌았다. 그리고 부리나케 저녁을 준비하려는 듯 아내의 몸놀림이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내가 식사를 준비하기 하기 전에 저녁에 있을 이벤트에 대해 아내에게 말해 주었다.
"여보, 우리 오랜만에 외식이나 합시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영화나 한편 보고 옵시다."
아내는 내 말이 믿어지지가 않은 듯 하던 일을 멈추고 재차 물었다.
"당신, 뭐라고 그랬죠?"
사실 아내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거짓말이 아니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아내와 나는 결혼을 하여 데이트 횟수를 기억할 정도로 둘 만의 시간을 가져 본 적이 거의 없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한 외식은 많았지만.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하면서 아내는 연실 콧노래를 불렀다. 마치 그 모습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과 흡사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아내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내는 거울 속에 비친 나를 흘끗 보면서 말을 했다.
"당신 때문에 오랜만에 화장을 하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아내의 말에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을 자주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감마저 들었다. 화장을 다한 아내의 모습은 그 옛날 처녀 때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예뻐 보였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아내는 뽐내며 팔짱을 끼었다.
그런데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나가려고 하는 찰나였다. 갑자기 휴대폰의 벨 소리가 울렸다. 우리 반 실장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순간 학급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아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잠시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계속해서 벨소리가 울리자 옆에 서있던 아내가 다그치듯 말을 했다.
"여보, 전화 안 받으세요?" "괜찮아요. 실장한테 온 전화인데 안 받아도 돼요." "얼른 받아요. 저한테 신경 쓰지 마시고요. 학급에 무슨 일이 생긴지 어떻게 알아요?" "받지 맙시다. 내일 학교에 가서 알아보면 돼요." "제가 불안해요. 어서 받아봐요."
주객이 전도된 양, 아내는 담임인 나보다 학급 일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전화를 받자 실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러 나왔다.
"선생님, 큰일났어요. OO이가 많이 아픈 것 같아요. 배를 움켜쥐고 울고 있어요. 선생님께서 빨리 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옆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아내는 학교에 빨리 가보라는 눈짓을 계속해서 하였다. 아마도 아내는 무척이나 속상했으리라. 그러면서도 인상 한번 쓰지 않고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아내가 고맙기도 하였다.
학교까지 운전을 하는 내내 아내에 대한 미안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학교에 도착하여 교실로 들어가자 학생들이 아픈 여학생의 주위에 모여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먼저 그 여학생을 진정시킨 후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 여학생은 급성맹장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과 병실을 일러주었다.
아무튼 “불안하니 학교로 빨리 가보라”라는 아내의 예감이 딱 들어맞았다. 한편으로는 아내 때문에 이 고비를 넘긴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아마도 그건 학생을 사랑하는 내 마음과 아내의 마음이 일치하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양보해 준 아내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