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난 뒤, 아내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런데 아내의 표정은 평소와는 달리 진지해 보였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그래요?"
아내는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누군가를 의식하기라도 하듯 조금 열린 안방 문틈으로 거실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엿듣기라도 할까봐 안방 문을 꼭 잠그기까지 했다. 아내의 그런 행동이 내 궁금증을 더 자아내기 시작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여보, 이제부터 제 이야기 잘 들어야 해요."
"아니, 무슨 이야기인데?" "OO이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어요."
"초등학교 5학년이면 당연한 일 아니겠소?" "그런데 이것 좀 보세요?"
아내는 서랍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들더니 내게 보여주었다. 수첩을 펼쳐보니 막내 녀석과 여자 친구가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 깨알 같은 글씨 크기로 날짜별로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서로 우정을 확인이라도 하듯 편지의 각 장마다 "OO ♡ OO"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물며 어떤 페이지에는 유명한 시인의 '연애시'까지 적혀져 있어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한지를 엿볼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교환 일기를 다 읽고 난 뒤 내 입가에는 왠지 모를 미소가 지어졌다. 내 반응이 시큰둥하자 아내는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내는 내가 그 내용에 무척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여보, 아이들 심각하죠? 그렇죠?" "이 녀석들, 멋있지 않소? 요즘 대부분의 아이가 이메일이나 채팅으로 서로 생각을 주고받는데 말이요."
"그리고 당신 OO이 방에 들어갈 때 꼭 노크하고 들어가세요." "왜? 무슨 일이 있었소?"
내 말이 끝나자 아내는 노크도 하지 않고 막내 녀석의 방에 들어갔다가 호된 소리를 들었다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무척 짜증을 많이 낸다는 이야기와 몇 시간을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야기로 보아 사춘기에 접어든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녀석에게 사춘기가 왔나 보오." "사춘기요? 설마?"
"내 짐작이 맞을 거요. 그러니 당신도 녀석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지 말아요. 특히 사생활 침입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네. 알았어요."
아내는 막내 녀석의 수첩을 몰래 가지고 온 것이 미안하다는 듯이 계속해서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아내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내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무엇보다 늘 철부지로만 알았던 녀석이 이성에 눈을 떠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숙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 날밤. 아내와 나는 잠이 든 녀석을 바라보면서 누구나 한번쯤 겪어야 할 이 시기를 현명하게 잘 대처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