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15년 동안 사용한 세탁기를 바꾸기 위해 어느 백화점에 들렀습니다. 백화점 점원인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세탁기의 제품마다 기능의 장단점을 상세하게 설명하더군요. 그래도 저의 아내가 하나하나 꼬치꼬치 더 물어보는데도 조금도 짜증내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친절하게 설명을 하더군요. 역시 유명 회사라 그런지 몰라도 고객에 대한 서비스가 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탁기를 구입하고 나서 잠시 저의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가운데 울산에 있는 한 여고에 졸업한 것을 알게 되었고 저가 울산여고 교감이라는 사실을 그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일을 끝내고 나오면서 성실하게 고객을 대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정중하게 깍듯이 인사를 하니 그 아가씨는 그저 근성으로 인사를 하네요.
다시 뒤돌아보면서 ‘수고하세요’ 하니 그 때는 거의 90도 가까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더군요. 아마 저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것에 감동이 되었던지 그분의 인사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네요. 나이가 많든 적든, 직위가 높든 낮든, 돈이 많든 적든 관계하지 않고 먼저 낮추는 자세가 상대방을 감동시키고 상대방의 행동을 바꿀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학교에서는 여러 선생님들을 대할 때 그렇게 먼저 공손히 낮추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다정하게 인사할 때는 머리를 숙이며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하지만 선생님께서 인사를 외면할 때는 저도 역시 외면합니다. 그 때 먼저 인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또 학교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일 잘하시는 선생님이 인사할 때는 ‘예’라는 소리도 진정으로 하게 되고 웃음도 자연스럽게 나오고 말도 붙이면서 격려를 하지만 학교일에 성실하지 못한 선생님이 인사할 때면 저도 근성으로 인사를 받고 맙니다. 이분들까지도 똑같이 대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몇 년 전 교육청에 근무할 때 총무과 과장님 한 분은 결재를 하러 들어가면 자리에 일어나서 인사를 하며 결재를 하고 나서도 일어서서 인사를 합니다. 아마 이분은 모든 일에도 성실하게 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분과 같은 성품이 저에게도 모든 선생님들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또 역시 교육청에 근무할 때 아침 일찍 출근해서 학무국 골마루를 청소하는 기능직이 한 분 계셨는데 이분의 성실은 저를 언제나 감동시켰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을 가끔 기억에 떠올립니다. 인사하는 모습도 언제나 정중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을 때 너무나 아쉬워 그분에 대한 성실과 성품에 대해 메모를 하고 알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학교에도 성실을 무기로 삼고 밤낮없이 수고하시는 선생님이 너무 많습니다. 방학인데도 보충수업을 하는 과목이 아닌데도 매일 아침 평소와 같이 일찍 출근을 하셔서 학생들을 챙깁니다. 늦게까지 학생지도에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어떤 선생님도 방학이지만 보충수업과 관계없는 과목인데도 출장을 가는 날 말고는 학교에 오셔서 학생들을 챙깁니다. 그리고는 업무에도 충실합니다.
또 어떤 선생님도 방학이지만 보충수업과 관계없는 과목인데도 학교에 매일 나오셔서 학생들을 챙기고 컴퓨터를 점검하고 학교홈페이지를 새로 단장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분들은 한결같이 성실을 주무기로 하시는 분입니다. 성실이 재산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실이 보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실한 분들은 인사도 잘합니다. 교육은 성실입니다. 성실한 선생님이 많이 계실 때 학교는 변화가 됩니다. 학생들도 변화가 됩니다. 선생님도 변화가 됩니다. 성실을 주무기로 열심히 하시니 많은 선생님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학생들도 감동이 되어 부지런해집니다.
선생님들은 지금 어떠합니까? 성실을 주무기로 삼고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까? 남들이 바보라고 비웃더라도 성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이라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끝을 맺으려고 합니다. ‘어느 부유한 집에 아들 넷이 있었는데 막내아들의 이름이 이반이었다. 형들은 부모 재산으로 출세하였으나 이반은 벙어리 누이와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았기에 바보로 불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