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방학 이틀째와 다름없는 오늘 아침을 잘 열어가고 있습니까? 저는 딸이 살고 있는 서울에 와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온 것 같네요. 딸이 거하는 곳이라 그런지 마음 편안하게 하룻밤을 잘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울산과는 많이 다르군요. 울산에서는 새벽에 조용한 가운데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새벽을 열 수 있었지만 여기는 풀벌레소리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내는 소음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집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조용한 시간에 딸이 가지고 있는 ‘비전’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이 글에는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가꾼다.’‘비전이 있는 사람은 철저하게 절제한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정원사처럼 살아간다’ 등입니다.
저 자신은 물론 우리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모두 비전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비전을 품고 있습니다. 비전이 없다면 생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비전을 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전 있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과연 자신을 잘 가꾸고 있나? 모든 일에 절제하고 있나? 정원사처럼 살아가나?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자신 있게 '예‘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분명 아직도 나름대로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데 비전을 가진 자로서의 사람됨은 아직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계속 그러한 사람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꾸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겉모습 말고 말입니다. 내면을 가꾸려고 합니다. 인격을 가꾸려고 합니다. 인격을 가꾸는 것이 바로 자기를 가꾸는 것 아닙니까? 나이가 들수록 내면을 가꾸려고 하기보다 외모에만 관심을 가지는 저 자신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기보다 중요한 것이 인격이라고 하는데 2학기 때는 선생님들에게 학생들에게 인정받는 인기보다 존경받는 인격을 가꾸려고 합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어떠합니까? 자신을 가꾸려고 합니까? 선생님은 반드시 외모도 가꾸어야 합니다만 그것보다 내면을 먼저 가꾸어야 할 것 같네요. 인격을 가꾸어야 겠네요. 학생들에게 인정받는 인기보다 존경받는 인격을 가꾸었으면 하네요. 그래야만 학생들에게 자신을 가꾸도록 가르칠 때 설득력과 영향력이 있지 않을까요?
모든 일에 절제하려 합니다. 특히 아무리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하는 일이 눈에 거슬려도 인격적으로 대하려 합니다. 감정적으로 대하려 하지 않으렵니다.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짜증부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참으려고 합니다.. 자신과 싸워 날마다 이기려 합니다. 우리 선생님들도 그러했으면 합니다. 학생들도 그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읽은 글 중에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을 소개합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정원사처럼 살아간다. 정원사가 없는 정원은 없다. 정원사에게는 비전이 있다.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비전이 있다. 정원사를 성실하다. 나태를 적으로 여긴다. 조급함을 경계한다. 씨를 뿌리고, 가꾸고, 기다릴 줄 안다. 가꾸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잡초뿐이라는 것을 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정원사처럼 살아가듯이 비전이 있는 학생은 선생님처럼 살아갑니다. 정원사가 없는 정원이 없듯이 선생님 없는 학교, 학생이 어디 있습니까? 정원사에게 비전이 있듯이 선생님에게 크고 작은 비전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비전이 있듯이 아름다운 학교에 대한 학생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정원사가 성실하듯이 우리 선생님들도 성실합니다. 정원사가 나태를 적으로 여기듯이 선생님은 게으름을 적으로 여깁니다. 정원사가 조급함을 경계하듯이 우리 선생님들도 그러합니다. 정원사가 씨를 뿌리고 가꾸고 기다리듯이 선생님들도 그러합니다. 가꾸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잡초인 것처럼 학생들을 가꾸지 않으면 잡초와 같은 학생 만들어내고 맙니다.
우리 선생님은 정원사와 같습니다. 정원사처럼 비전도, 성실도 있어야 합니다. 나태도 게으름도 없어야 합니다. 조급함도 없애야지요. 학생들에게 정성을 들이며 땀을 흘리며 그들의 사람됨을 그리면서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정원을 그려보듯이 좋은 학생을 그려봅시다. 그게 우리의 할 일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