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정점과 절정기는 언제였을까? 고교 30주년 사은회에 갔을 때 회장의 축사에서 우리는 인생의 정점을 넘었다고 하였다. 그 말을 애써 부인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문득 나는 인생의 정점을 넘었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우리는 태어나서 혼자였다가 인연을 만나 둘이 되어서 사랑의 결실인 자식을 두어 가족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자녀들이 출가하면 다시 둘이 되는 부부! 이어서 노년을 맞아 누군가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숙명은 우리를 다시 하나로 만든다. 삶의 과정이 하나에서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면 자식을 낳아 키우는 과정 즉, 자녀들이 장성하기까지가 내 인생의 절정기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물론 일을 가진 사람은 성취욕에 매진할 때이며 가정과 직업을 양립한 자이면 더욱 열정적인 삶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혼자로 있을 때의 외로움, 짝을 찾기 위한 혼란과 격정의 시기를 이겨내고 둘이 되는 과정이 인생의 정점을 지나 다시 둘이 되는 시점에는 어떻게 다가올까? 흔히들 말하는 제2 사춘기도 이때에 오는 것이 아닐까? 다시 둘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중년의 빈 둥지 증후군, 아니 어쩌면 편안과 안락을 느끼는 이들이 훨씬 많으리!
하지만 어쩌랴, 나 지금 청춘 아닌 그 중년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더 앓고 있으니 그 지독한 열병에 체력을 소진하고 있으며 그 뜨거움에 자국을 남길 지경이니 미처 면역을 기르지 못한 과업이 이다지도 힘겨울 수가 있을까?
지방에 사는 친구 부부 중 누구는 5년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큰 애는 서울에서 취업해 있고 둘째는 외국에서 학업 중이라 이제 다시 둘이가 되어 어떻게 지내느냐는 나의 물음에 ‘우린 언제나 옛날 그 때처럼 살아간다’ 는 말을 듣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우리는 연애결혼이 아니다. 나는 남편이 보고 싶어서 애를 태우거나 가슴앓이를 해 보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왔다. 어쩌면 이것이 중년에 찾아온 내게 있어서 병이 될 줄을 몰랐다. 누군가가 그리워 애를 태우고 그 사람이 보고 싶어 잠 못 이루고 눈물짓던 시절이 없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면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은 프로이드의 발달단계에 따라 수행해야 하는 과업이 있다.
예를 들어 0-1세까지의 아동에 해당되는 구강기의 아이가 그 과업에 만족하지 못하여 고착이 되면 성인이 되어서 술이나 담배, 혹은 군것질이나 껌을 씹는 행위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배꼽 아래 숨겨진 엉어리는 언젠가는 표출되어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야 하는데 기회가 없으면 그대로 있지만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엄마 젖을 제대로 못 빤 아이가 나중에 수다쟁이가 되듯이 나도 어쩌면 지금에 와서 지독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중년의 외로움! 겪어보지 않고 큰 소리 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지만 정말 몰랐다. 세월은 지나도 사람의 감정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던 것이다. ‘철들자 노망한다’는 옛말은 병들자 철들고 동시에 죽어야 하는 우리의 허망한 한평생을 대변하는 것 같다.
올해는 단풍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벌써 낙옆이 뒹구는 이 가을이 더없이 서글프고 외로움에 혼자서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