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어머니의 80회 생신을 맞이하였다. 리포터가 시집 올 때만 해도 카랑카랑한 소리에 허리도 꼿꼿하시어 돌이 된 손녀를 업고 언덕을 잰걸음으로 단번에 오르시던 시어머니께서 이제는 조금만 말씀하셔도 숨찬 소리를 하시고 허리도 90°로 구부정해지셨다. 작년 11월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더욱 쇠약해지신 것을 느끼게 되는 요즈음이다. 게다가 지난 해 말에는 심근경색으로 수술까지 받으셔서 지금 회복하고 계시는 가운데 있다.
방학이 되어도 연수가 있거나 아이들이 학원에 다녀 뒷바라지를 하다보면 시댁에 내려가지 못할 때가 더러 있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방학인데 설마 아무리 바빠도 며칠 내려왔다가 가겠지.’라는 기대로 서울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신다. 바빠서 못 내려갈 것이라는 전화를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안부전화를 드리면, “언제 내려올라 카노? 아 - 들(손녀, 손자)도 같이 올 거재?”라고 재차 물으실 때는 차마 내려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못 드리고 “시간 내어서 꼭 가도록 노력해 볼게요.”라고 말씀드린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 후 시어머니와의 남다른 인연은 시작 되었다. 당시 시댁은 절 바로 밑에 있을 정도로 깊은 산중에 있었는데 그것은 공직생활을 마감하시고 선산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신 시아버지로 인함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시댁에 들렀는데 시어머니께서는 군불을 따뜻하게 지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결혼식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시어머니와 함께 나누었는데 아무소리 없이 방을 나가셔서 이제 둘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그러시는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갑자기 기척을 하시더니 문을 열고 들어 오셨다. 그리고 이불을 걷고 남편과 나 사이에 들어오셔서 무작정 누우시는 것이었다. 너무도 놀라는 나에게 시어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시면서, “며느리가 시집와서 시댁에서 첫 밤을 지낼 때는 시어머니가 중간에서 하룻밤 자면 잘산다고 하더라.”하시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새로 시집오는 며느리 맞이에 너무도 피곤하셨던지 누우시자마자 깊은 잠에 드셨고 남편과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크게 웃고 말았다. 잠이 드신 시어머니의 손을 잡아보았다. 손은 매우 거칠어져 있었고 손등도 깊은 주름이 접혀있는 것을 보아 농사에 경험이 없으신 시아버지께서 공직에서 은퇴 후 산을 개간(開墾)하여 당시 정책적으로 장려했던 유실수를 심었다가 실패하셨던 과정에서 무척이나 고생하셨음을 알 수 있었다.
합리적이며 서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친정어머니와는 달리 시어머니께서는 한국 전통적인 어머니 상으로 자식들을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시는 분이셨다. 많이 먹어서 배에 더 이상 들어갈 데가 없는데도 “그 것 먹고 뭐가 그리 배부르냐.” 라고 하시며 그저 계속해서 먹으라고 권유하신다. 한 가지 웃지 못 할 일이 있는데 아이가 태어나 친정어머니를 모셔 와서 함께 살게 되었는데 남편이 혹 늦게 들어와 배가 고픈데도 친정어머니께 미안하여 식사를 했다고 말씀드리면 친정어머니는 더 이상 권유하지 않으신데 대해서 남편은 매우 서운함을 느꼈다고 후일 털어놓았다. 또 요즘 사람들은 고추장, 된장, 간장을 많이 먹지 않는다고 하시며 힘들게 담그지 말고 위생적으로 숙성되어 잘 나오는 것을 사먹도록 하라고 리포터에게 친정어머니께서 말씀 하시는 것을 듣고 어떻게 어머니로서 딸에게 그렇게 말씀 하실 수가 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하였다. 아들이 그동안 보아왔던 어머니는 장을 손으로 담그지 않고 사 먹는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20여년 장모님과 같이 살면서 때때로 서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싶어도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며 선을 분명히 긋고 말을 아끼시는 것 또한 며느리, 사위를 아들, 딸 이상으로 여기는 시어머니와 다른 면이기에 남편이 또한 의아해 했던 부분이었다.
그 뿐인가. 낮에는 직장으로 인해 아이를 돌볼 수 없더라도 퇴근 후부터는 엄마가 아이와 지내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라고 하시며 퇴근 후는 특별히 부탁을 드리지 않는 한 아이를 돌보는데 잘 관여하시지 않으셨고 아이가 다소 보채더라도 우유의 양과 시간을 정확히 하시는 점도 시어머니와 다른 점이었다. 아이들이 조금 컸을 때도 친정어머니는 아이들이 비만이 되면 안 된다고 하시며 기름기 있는 음식을 가려서 주시고 식사 때도 정량을 주시곤 하셨는데 비하여 아이들이 시댁에 가게 되면 배가 볼록 나올 정도로 먹을 것을 쉬지 않고 주시는 시어머니셨다. 또 직장 일로 항상 바쁜 딸을 위하여 밑반찬을 만드시거나 집안 정리를 하시기보다는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책을 읽으시거나 스크랩이나 메모를 즐겨하시는 친정어머니와 새벽에 눈만 뜨시면 밭에 나가 일하기 시작하여 해가 지고서야 집으로 돌아오시는 시어머니(식사 때는 일하다가 들어오셔서 가족의 식사나 간식을 챙기셨다.)를 나름대로 비교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남편이 친정어머니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며 오히려 나보다도 친정어머니와 너무도 잘 지내는 사위가 되었지만 결혼 초에는 자신이 자라왔던 환경과 너무나 다른 친정어머니의 행동양식에 대해 마음고생이 다소 있었다.
반면 자라면서 친정어머니의 행동양식에 익숙해 있던 리포터는 살아갈수록 시어머니에 대하여 남다른 애정을 느꼈다. 주어도 또 주어도 그 마음을 채울 길 없어 끝에는 당신께서 가지고 계셔야 할 것 마저도 주어야 속마음이 편하신 시어머니셨다. 낮에는 시어머니께서 일하시느라고 바쁘셔서 저녁을 먹은 후 대화하시면서 깊은 속내도 가끔 어린 며느리에게 보여 주셨다. 바쁜 생활로 항상 완제품을 사용하던 것에 익숙해진 나에게 가을에 주우셨던 도토리로 도토리묵을 직접 만드시는 것, 콩을 맷돌에 갈아 두부를 직접 만드시는 것, 콩나물을 물주고 기르시는 것, 호박이나 무로 시루떡을 만들어 주시고 쑥을 저장해 놓으셨다가 콩고물을 묻힌 떡을 만들어 주시는 것, 명절에는 엿을 고아 유과를 직접 만드시는 것, 고추장, 된장, 간장을 만드실 때도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 가마솥에다가 각종 콩을 듬뿍 넣은 호박죽을 만드시는 것, 쌀가루로 미음을 만들어 주시는 것, 콩가루 등을 국에 넣어 끓이시고 들깨가루를 꿀에 재어 주시는 것 등은 경이롭게만 보였다. 또 모든 간식은 직접 땅에다 가꾸셔서 난 것(감자, 고구마, 옥수수, 자두, 밤, 단감 등)을 제공해 주셨다. 그러기에 잠시도 쉴 틈이 없으셨던 시어머니셨다. 방학 때 시댁에서 지내고 서울로 올라오는 마지막 밤은 아이들 키우시느라고 수고하시는 친정어머니께 갖다드리라고 하면서 낮에 만들었다가 혹시 쉬어질 새라 팥고물이 묻힌 찰떡을 만드시며 밤을 꼬박 새우곤 하셨다.
이번에 80회 생신을 맞아 시댁에 갔을 때 네모난 메주 16개가 주렁주렁 베란다에 있는 빨래를 거는 대에 매달려 있었다. 지난 추석 때 시어머니께, “이제 장을 담그시기가 힘드시잖아요. 서울에 전통적인 방법으로 잘 만드는 곳을 알고 있으니 맛있는 장을 구입해서 보내드릴게요.”라고 말씀 드렸는데 “우째(‘어떻게’의 사투리) 그런 것을 믿고 먹을 수가 있노."라고 하시더니 결국 장을 담그시려고 마음먹으신 것이었다. 큼직한 네모 난 메주를 만들어 높은 대에 거시느라고 힘드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안되어, “어머니, 왜 이렇게 메주를 많이 만들어 놓으셨어요?”라고 여쭈었는데 시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내년에는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장을 못 담글 것 같아서 내년에 너거들(‘너희들’의 사투리) 갖다 먹을 것까지 미리 담갔어.”하시는 것이었다. 시어머니의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 뭉클 했던 당시를 어떻게 표현 할까? 사실 시어머니께서 손수 담그시는 장은 그 어디에다 비교할 수 없는 신비로운 맛을 지녔고 장이 들어가면 모든 음식의 맛을 더해 주기에 그 맛을 통하여 시어머니를 늘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아버님께서 거동이 다소 불편해 지셨을 때 산중에서 생활하시기가 어려움이 많은 듯 하여 시내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드렸다. 여름에는 시원한 자연바람이 불어오는 산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추운 겨울이 오면 군불을 지피는 일이나 산 바위틈에서 관을 통해 내려오는 물이 어는 등 불편한 점이 많아서였다. 항상 밭에서 일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던 시어머니께서는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니시다가 사용하지 않는 황무한 밭을 하나 발견하고는 주인에게 얼마의 임대료를 내고 텃밭을 가꾸었다. 그리고 고추, 검은 콩, 마늘, 양파, 상추, 배추, 무, 파 등을 골고루 심으셨다. 그리 넓지 않은 밭에 심고 가꾸신 것의 수확물을 때마다 택배로 보내주셨다. 아이들에게도 할머니께서 애를 써서 지으신 농사의 수확물이라고 얘기를 하고 온 가족이 감사하며 먹곤 하였다. 지난해 김장철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김장을 해서 부쳐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으나 계속되는 바쁜 일로 하루하루 김장을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와 보니 시어머니께서 보내신 김장 택배가 와 있었다. 바쁜 며느리가 김장을 담그느라 수고할 것을 염려하신 시어머니께서 미리 김장을 담가 보내주신 것이었다.
오늘 시어머니의 80회 생신을 맞아 어머니의 주름파인 얼굴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감상에 젖고 있을 때 친척 어른들께서 둘째 며느리 노래 한 번 해보라고 하셨다. 행사에 어울리는 노래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시어머니 고희 때 지었던 시 개작한 것을 생각나는 대로 읊어 드렸는데 장내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80이 다 되어 가시는 종고모님들께서 “글케(‘그렇다’의 사투리).”, “맞다, 맞어.”, “으 으-o", "그래, 그래."등의 판소리의 추임새 비슷한 말들이 간간히 흘러나왔다. 오늘 모이신 분들은 시어머니의 일생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분들이었기에 시의 내용에 대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분위기였다.
행사를 모두 마치고 내일 연수가 있어 총총걸음하며 차에 타려는데 시어머니께서 눈물을 머금은 채 차 가까이 오셔서 몇 번이고 조심해서 잘 올라가라고 말씀 하신다. 아들과 며느리를 늦은 밤에 서울로 보내시는 것이 마음이 안 되어서이다. 허리 구부정한 어머니를 뒤로 하고 떠나야만 하는 아들도 차마 차를 돌리지 못하고 “어머니께서 먼저 들어가셔야 우리가 떠납니다.”라는 아들의 말을 듣고서야 “오 야(‘오냐’의 사투리), 조심 해래이.”하시며 발을 떼신다. 시어머니와 헤어질 적마다 항상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아무쪼록 남은 여생을 자손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시면서 큰 기쁨 누리시고 더 이상 아프신 곳 없이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다음은 시어머니 고희 때 지은 시를 개작한 시이다.
어머니
80평생 무거운 세월
얼룩진 치마폭 주름진 사이사이로
빛바랜 날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듣는다.
척박한 화천 산중에서
대화 나눌 이 아무도 없음에
할 말, 못할 말
가슴 앓으며 묻어둔 것
컴컴한 부엌에서 장작불 지필 적에
연기 속 눈물 흘리며
하나, 둘 날려 보내고
오남매 키워 뿔뿔이 떠나보내고
찢기며 달린 세월 숨이 찬 데
주어도 또 주어도 그 마음 채울 길 없어
손놀림 쉬지 않고 자식들 삶 어루만져
오늘을 살아오다.
벅찬 세월 챙겨가며
살아가기 바쁜 나에게
늘 방향을 일러주시는
컬컬한 그 목소리로
한 세월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