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이 되나 안 되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던 초등학교 시절 반장선거 때의 정경이 엊그제의 일만 같은데 벌써 50대다. 사무치는 연정에 편지를 띄워놓고 날이면 날마다 답장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여리고 순진하던 나의 사춘기, 주체할 길 없는 그리움에 무작정 봄 길을 걸으면, 연두색 물감으로 색칠을 한 듯 멀리 파릇한 풍경을 만들며 봄을 알려오던 동구 밖 버드나무, 이 모두가 엊그제의 일만 같은데 벌써 나이가 이렇게 되었다.
그동안 지내온 세월을 나는 모두 손금을 보듯 드려다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 그렇게 들여다보인다. 대학 새내기 시절, 명동의 지하 학사주점에서 호기를 부리며 낭만을 구가하던 일도, 그 시절의 데모 행렬도 어제 일 같고, 군에 입대해 이십팔 주 고된 훈련 받던 모습이며, 훈련이 끝나고 군모에 빛나는 하사관 계급장이 달려지던 일도 손에 잡힐 듯 어제의 일만 같다. 군복무를 마치고 만학을 하느라 삼십 가까운 무렵까지 대학 캠퍼스를 오가고 졸업을 한 후엔 곧장 고등학교 교단으로 가 십대의 젊은이와 함께 생활해 왔으니, 나의 마음은 어쩌면 지금도 세상 물정 모르고 새파랗게 젊기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나이 먹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시절이 좋아서 날로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노년의 개념도 예전과는 다르다 하지만, 마냥 내가 젊다고 물불 안 가리고 앞으로 나설 수도 없는 것이다. 벌써 나를 보자마자 단번에 나의 나이를 짐작해내곤 그에 걸맞게 나를 대하려는 시선들은 도처에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나이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차후 생활의 자세를 궁리하여 보는 것이 순리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과욕을 덜어내는 것이 되고 노욕을 방지하는 방편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왜 욕심이 없으며 의욕이 없을 것인가. 다만 그 나이에 걸맞게 품위를 지켜가며, 나이에 알맞게 욕심을 갖고 의욕을 불태우는 것이 젊은이들과 조화를 이루는 길이 될 것이다. 다양한 욕구가 있겠지만 건강하게 천수를 살고 싶은 욕망이 어떤 욕심보다 먼저 고개를 들 것이다. 노후를 대비하여 젊은 날에 어느 정도 준비를 해 놓았고 힘에 붙인 대로 자식들 교육도 시켜놓았으니 그 책임에서도 이제 벗어날 나이인 것이다. 이제 한시름 놓고 어떻게 노후를 건강하고 유익하게 보낼 것인가에 마음 쏠리는 것도 자명하고 자연스러울 터이다. 각자 각자 나름대로 사정이 있고 고충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그 연령대의 공통분모는 또 찾아질 것이다.
이제 자식들에게 저희들 경제는 맡겨놓고 손자손녀 학업도 앞질러 노심초사 하지 말고 저희들에게 맡겨놓고,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정거리 떨어져 지지 격려하는 차원이면 족할 것이다. 그래 이제부터는 내 건강, 내 능력에 맞게 인생을 찾아 즐기고 보람을 가꾸어 가는 것이 자식들에게 짐을 덜어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저 내 생활은 소홀히 하고 자식들 문제에 여전히 얽매어 있다는 것은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일생을 자식들 건사하기에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왔으니 그럴 개연성을 부인할 수도 없겠으나 노년에 이르러서는 벗어나서 나에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게 상호 편하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나는 이제 50대이다. 가끔 자각이 들면 벌써 내가 이 나이가 되었구나 하고 회한에 젖기도 하지만 아직은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 항상 나는 아직 젊고 건강하다, 혹은 마음은 아직도 새파랗다고 젊음을 확인해 보다가도 종종 난관에 부딪치기도 한다. 내가 늙었다는 것보다는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이 이미 늙었다는 자각이다. 그런 자각이 들 때는 내가 쉰 세대(?)라는 생각을 꼼짝없이 하고 만다.
내가 10대 적에 무슨 책을 보았고 어떤 팝송에 몰두하였는지, 어떤 꿈을 품고 있었는지 엊그제의 일처럼 떠올라 마음은 그대로 그 시절에 사는 것 같아도 이미 그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인 것이다. 젊은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쯤으로 인식이 될 터이다. 그러니 아무리 내가 늙지 않은 것 같고 시대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도 벌써 나는 구세대에 속하고 마는 것이다. 요새 십대 아이들의 이성교제나 놀이문화의 양상을 보면 그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동화될 수 없음을 깨달아 긴 세월의 간극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서 그런가. 우리는 개인적인 면보다는 속한 집단, 속한 세대, 그리고 겪어온 역사 속에서 평가되어 그 위치가 결정되는 것도 보통이다. 즉 사회 전체의 맥락 속에서 내가 평가받고 규정되고 바라다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독불장군처럼 나 혼자 젊다고 고집할 수만도 없다. 내가 거쳐 온 옛 학창시절, 결혼하던 당시의 풍속도가 내 안에 그대로 각인되어 나를 비춰내고 있으니 젊은이는 나의 연륜을 감지하곤 자기들과는 다른 삶의 주인공임을 즉시 구별해 낼 것이다. 이것을 편견이라고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을 탓하고 예의범절도, 전통가치도 모르는 세대라고 분개라도 해야 할 것인가. 그만큼 나는 나도 모르게 옛날 관습, 그 가치관, 그 타성에 젖어 있다. 비로소 내가 젊은 것이 아니라 이 사회 속에서 이미 늙은 세대에 편입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컴퓨터에 능하고 휴대폰의 기능을 잘 활용한다 해도 내가 젊은 세대와 같을 수 없고 쉽게 동화될 수 없는 이유다. 나는 이미 속속들이 옛날의 정치, 경제 문화적 환경 속에 상당 부분 젖어있게 마련이다. 이미 오늘의 세상은 다음 세대에게 상당부분 넘어가 있고 그 다음 세대가 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다.
이런 기반과 자각 위에 노후 설계도 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돈이 있어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었어도 우리는 이미 지나간 세대로 분류되고 만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젊은이들 하자는 대로 내맡기고 양보하면 지혜로운 것인가. 젊은 세대를 꾸짖고 비판하고 내 생각을 고집하는 게 권위를 세우는 것인가? 모든 일이 다 그러하듯 중요한 것은 조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나의 행보를 건강하고 의연하게 유지하되 젊은 세대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내가 살아온 세월을 긍정하고 거기서 얻은 지혜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실천하고 전수하되 마찰이 없어야 할 것이다.
권위는 노인들 스스로 찾아야 한다. 나는 칠팔십 대의 노시인들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솔직하게 삶을 회고하고 담백하게 심정을 토로하는 글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분들은 바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앞서 걸으며 풍부한 체험으로 이미 터득한 지혜의 횃불을 높이 받쳐 들고 계신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 환한 선대의 불빛 아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전진하며 기쁨과 평화를 찾아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늙음을 피할 수는 없다. 노년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비관에 젖어 한탄하며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된다. 의연하게 목표를 세워 기쁨과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사람이 늙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마음먹기에 따라 노년은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할 것이다. 나도 벌써 오십대이다. 노년의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임을 자각하면서 관련 서적을 몇 권 펼쳐보기도 했다. 그러나 책은 참고가 될 뿐 그 책에 맞춰 나의 노후를 설계할 수는 없다. 나의 체험, 나의 능력, 나의 개성에 맞게 노후 설계를 해야 할 것이다.
한편 나는 벌써 오십대이긴 하지만 또한 이제 겨우 오십대이기도 한 것이다. 아직 직장생활도 몇 해 더 해야 하고 자식들 출가시켜야 할 일도 남아있고 늦둥이가 이제 중학교에 입학하니 아무래도 노년을 생각해보는 게 얼토당토 않고 억지로라도 저만치 밀어두어야 할까보다. 혹시 이 글을 선배 어르신들께서 보신다면 치기어린 후배의 두서없는 문장에 따끔하게 일침을 놓아주시고, 좋은 지침 되도록 충고의 말씀 해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