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0섭인데요. 지금 차비가 없어서 학교를 못가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되요?” "선생님! 깨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늦잠을 잤어요. 늦게 등교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요즘 학교 현장에서 종종 겪는 일 중에 하나다. 맞벌이 부모님께서 일찍 직장에 출근하다보니 자녀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경우이거나 혹은 부모님께서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경우다. 문제는 학생의 부모님이 이혼했거나 사별하여 부모이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학생들이다. 우리반의 경우, 절반 이상이 한부모 가정이다. 부모가 실직이나 퇴직등으로 인해 자녀와 떨어져 사는 경우도 있고, 부모의 따뜻한 돌봄을 받기보다는 연로하신 조부모가 양육하는 학생이 4명이나 된다. 그러다 보니 아침 식사를 거르고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이 참으로 많다.
요즘도 경제 상황이 무척이나 어려운 상황이다. IMF 위기 때보다도 더 심각하다는 말을 듣곤한다. 이런 경제 위기가 부모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자녀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행복한 삶을 빼앗아 버렸다. 아직도 직업이 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우리들의 부모들이 참 많다.
학교의 현실은 참으로 심각하다. 가정이 흔들리면 학교가 흔들리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학교가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린다는 사실 또한 자명한 일이다. 학업 대신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에서 일하는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경제적인 어려운 탓에 삶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늘어가고 있다.
우리 가정에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중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제일 높단다. 2005년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1만 2천 47명이 자살했다. 하루 평균 33명, 1시간에 1.3명이 자살했다는 통계결과다. 그러고 보면 교통사고 사망자보다도 더 많은 상황이다. 20~30대 사망원인 중 1위가 자살로 나타난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자살률이 톱을 기록한 이유는 뭘까. 여러가지 분석을 해봐도 종합결론은 ‘살맛나지 않는 이 세상 탓’이 아닐까?
최근의 경제 위기가 가정 파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반증이다. 전문가들은 자살을 사회적 타살이라고도 말하기도 한다.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명확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에 대한 확실한 대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국내 직장인 4명 중 1명 정도는 알코올 중독의 초기 단계인 알코올 의존 성향을 갖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이 또한 어려운 경제 환경에 노출된 직장인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심각한 경제 상황은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 학교의 경우에도 부모가 실직하여 가출하여 자녀들만 남겨진 상황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생존의 문제는 급기야 학생들이 학교를 벗어나 생활전선에 직접 뛰어드는 경우로 발전하고 있다.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24시간 편의점으로 달려가 시간제 근무를 한다. 심지어 토요일이나 일요일의 경우, 건축공사장에서 일품을 팔아 5~6만원을 받는 막노동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나면 고된 일로 피곤에 지치기 마련이다. 결국 학교 등교 시간에 늦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설사 학교에 등교한다고 해도 수업시간은 꾸벅 꾸벅 졸기 십상이다.
더욱이 그 학생의 형편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일부 선생님의 경우, 학생에게 연속적으로 야단과 질책만을 반복하게 된다. 결국에는 학교에서도 그 학생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결국 가정에서처럼 학교는 그를 막다른 길로 밀쳐내고 마는 것이다. 결국 기댈 곳을 찾지 못한 학생들은 중도에서 배움을 포기하게 되고…. 뜻하지 않는 다른 길로 가고 마는 것이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 중에 ○민이란 학생이 있다. 아버지가 실직하여 막 노동으로 하루 벌이로 살아가는 가정이다. 아버지가 약주를 드시고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가족에게 술주정을 하고 그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마저 가출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그 아이는 이런 가정 상황을 견디다 못해 동생과 친구 집에 머무르고 있다.
다행히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의 학비와 용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도 학교는 꼭 다녀야 한다면서 결석은 절대 하지 않겠단다. 학교에 오면 ○민이는 언제나 녹초가 되어서 곤한 잠을 이루곤 한다. 잠자는 그 아이를 깨울 수 없는 상황이다. 학교에서도 특별히 뾰족한 방안이 없다. 나의 경우, 교실내 일정 범위를 쿨쿨존(잠을 잘 수 있도록 정한 구역)을 만들어 심신을 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각계 기관에 학비 감면과 급식비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담임교사로서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 아픈 상처를 누가 어우르고 달래고 또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을까? 그것은 따뜻한 부모가 있는 가정이 있을 때만 올바른 치유가 가능하다. 이를 바라보고 있자면, 참으로 막연하기 그지없다. 앞으로 ○민이가 이 절박한 상황을 얼마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의 통계에 따르면, 중 고교를 다니다 중도 탈락하는 학생수가 한 해에 7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민, 유학, 질병 등의 사유로 그만두는 학생을 제외하면, 5만여 명의 학생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중도 탈락하는 학생이란다. 이렇게 학교에서 중도 탈락한 학생들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이 학생들의 거리를 배회하며 본인이 뜻하지 않은 길로 가는 경우가 많다.
교육부가 그동안 중고교를 중퇴한 학생이 복교를 원하면 언제라도 희망하는 학교에다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중고탈락자와 비행청소년 문제를 학교의 울타리안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동안 이른바 문제학생들에 대한 해결방법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나 사회가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기 보다는 일시적인 방편으로 일관해 문제 학생들이 학교주위를 배회하면서 후배들을 협박 또는 유혹을 일삼음으로써 어린 학생들이 학교를 일탈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학교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유해업소들도 어린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되고있다니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을 위한 정부차원 및 사회차원의 교육시설과 교육 프로그램이 절실히 필요하다. 각 시도에 이와 같은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 문화의 집 등이 있으나 학생들의 수요와 욕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공교육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청소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전국의 대안학교가 있어서 큰 효과를 거두는 듯했다. 하지만 요즘, 모든 학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성격이 변질하여 귀족학교로 탈바꿈하고 있는 상황도 보인다
교육은 가정의 문제이자 사회의 문제다. 더불어 교육자로서도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경제 위기, 교육의 위기 상황은 바로 우리 교육자에게 많은 부분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회엔 각종 아픔으로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가정의 질서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고 부모의 권위는 물론이고 교사의 위상도 땅에 떨어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을 온전히 세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즐거운 학교가 될 수 있을까? 교육 현장에 있는 나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진정 길은 없는 것인가? 어둠을 한탄하기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절박하게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어린 학생들을 위해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학생들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안아주는 것이리라, 관심과 이해로 배려하는 보듬어 주는 것이다. 학생들을 묵묵히 인정해 주고,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것,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아닐까? 누군가 교육은 희망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교사는 분명 희망을 얘기해야 한다. 그들에게 꿈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은 운명에 의하여 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 않은가. 학생들은 교사의 꿈을 먹고 자란다. 그 꿈은 학생에 대한 기대와 믿음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칭찬을 받기를 좋아한다. 하물며 아이들은 칭찬을 먹고 자라는 존재가 아니던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현실은 어렵지만, 그들에게 비전(Vision))을 심어 희망을 말해야 한다.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그 마음을 서로 헤아릴 줄 아는 교사, 열정과 애정으로 가르치는 멋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우리가 잘 나갈 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르쳤더라면 이런 최악의 상황들은 없었을 것을, 우리는 바람이 어디서 어떻게 불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바람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연구를 통해 대처했어야 했다. 또한 그 바람을 이용하여 더 높이 멀리 날 수 있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야 했다. 바람의 방향도 모르고 더욱 높이 멀리 날 수 있다고 큰소리 치며 교만의 샴페인을 터트린 것은 아닌지?
이제 다시 희망을 말해야 한다. 무지와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교육의 힘을 우리는 경험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학생은 학교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보다 더욱 분명한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