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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다시 봄을 기다리며

다시 봄이 성큼 다가왔다. 우리는 겨우내 추위에 떨면서 따뜻한 봄을 기다린다. 희망의 봄, 사랑의 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봄을 칭송하며 봄이 어서 오기를 고대한다. 매스컴이 저 남쪽지방의 봄소식이라도 전하면 더 조바심을 내며 빨리 봄이 북상하여 우리 집 마당까지, 우리 동네 들녘에까지 당도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 아름다운 봄은 얼른 우리 곁으로 오지 않는다.

왜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찬란한 봄이 얼른 오지 않는 걸까. 혹시 우리가 어떤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사춘기 소년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며 밤잠을 설치듯이 우리도 봄에 대하여 일종의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멀리 남쪽 지방 어느 곳에 유채꽃이 만발했다고 했을 때, 3월 며칠쯤 벚꽃이 피기 시작할 것이라는 화신이라도 접하면 우리는 열심히 그 환상적인 봄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된다.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봄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무런 제약 없이 그려보는 봄의 정경 속엔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 한 점 없이 고운 봄날 마당에, 울타리에, 도로변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낙원을 이루고 있다. 산에는 진달래가 울긋불긋 장관을 이루고 도로가엔 개나리 벚꽃이 만개하여 세상이 온통 꽃 대궐을 이루고 있다. 버들강아지 눈뜨는 실개천엔 찰랑찰랑 시냇물 소리 노래하듯 흐르고 파릇파릇 움돋는 들녘엔 어느 선계인양 아지랑이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다.

그런 꽃 세상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속삭이며 꿈길을 가듯 봄에 취하여 걸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이 상당부분 환상임을 알아차리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봄은 꽃소식으로부터 오지만 또 꽃샘추위와 황사와 더불어 오기 때문이다. 봄은 부드러운 남풍, 설레는 마음과 함께 오지만 또 세찬 먼지바람과 며칠씩 계속되는 짓궂은 비바람과 함께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계절은 벌써 봄으로 접어든 지 오래지만 내가 그리던 봄은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아직도 싸늘한 대기 속에 여기저기 도로변에 피어있는 개나리꽃의 모습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어디 그것뿐인가. 사상 최악의 황사가 전국을 강타하여 우리는 모두 황사 대비용 마스크를 준비해야 했다. 황사가 극히 작은 미세입자라 웬만한 마스크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며 매스컴은 또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가.

어제 오늘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 코가 막혀오는 것은 아마 온종일 들이마신 황사 때문일 것이다. 기다리던 봄은 지금쯤 어디에 있는 걸까. 계절은 벌써 4월, 어제가 식목일 오늘은 또 한식인데 아직 우리가 고대하던 그 봄은 곁에 와 있지 않다. 사랑에 대한 나의 기대가 환상이었듯이 내가 기다리던 봄은 실제로는 없는 환상의 봄이 아니었을까. 저 비발디의 봄노래 속에 나오는 부산하고 아기자기하고 생명력 넘치는 봄 그것은 음악속의 봄에 불과한 것인가.

시인들이 읊조렸던 꿈결 같은 봄, 사춘기 소년이 상상 속에 그려보는 황홀한 봄이 정령 세상에 있기라도 한 것인가. 오랜 세월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꿈같은 봄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간파하지 못했단 말인가. 마음이 혼란스럽다. 벌써 계절은 치달아 봄이 무르익을 무렵인데 창밖으로 보이는 봄은 황사와 흙먼지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곤욕을 치루고 있다.

내 마음이 너무 서둘렀는지도 모른다. 봄은 원래 4월에 와서 오월에 무르익는 것인데 내가 터무니없이 봄을 재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3월은 원래 꽃샘추위와 세찬 바람과 진흙의 계절이고 봄은 예로부터 4월에나 당도했던 것인지 모른다.

나는 마음을 달래 본다. 내가 그리던 봄은 4월에 올 것이라고. 그리하여 그 아름다운 봄이 5월까지 길게 이어질 것이라고. 그렇다면 저 개나리와 목련은 봄의 전령이란 말인가. 세찬 바람과 황사먼지를 뚫고 봄을 알리려고 미리 달려 온 계절의 첨병이란 말인가. 어쩌면 목련꽃의 봄과 벚꽃의 봄은 다를지 모른다. 매화의 계절과 산수유의 계절이 다르듯이 라일락의 봄과 모란꽃의 봄은 아마 다른 봄인가 보다.

이제 개나리가 지고 하룻밤 세찬 바람에 목련꽃이 우수수 떨어져 땅바닥에 누워버린 다음 여기 저기 라일락은 피어나 아파트 한 모퉁이, 정원의 한 귀퉁이에서 강렬한 봄의 향기를 날릴 것이다. 조팝나무는 산책길 양쪽으로 길게 도열하여 나의 봄나들이를 열렬히 환호하듯 하얀 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던 그 봄은 아직도 우리 곁에 오지 않았다. 아직도 공기는 차갑고 바람은 세차고 제비 한 마리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바라던 그 봄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에 사랑이 넘치고 희망이 용솟음치지 않으면 내가 바라는 그 봄은 영영 자취를 감춰버릴지도 모른다.

봄이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닐 텐데.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만의 잔치도 아닐 텐데. 빈부를 떠나 남녀노소 모두 봄을 기다린다. 그렇다면 내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봄은 어떤 봄인가. 행장을 꾸려 초로의 아내와 함께 훌쩍 봄나들이라도 나서야 하는 건가. 친구를 불러내어 꽃그늘 아래서 온종일 술잔치라도 벌여야 할까. 이 좋은 봄날 혼기에 접어든 아이들 혼사라도 치러야 하는 것 아닌지.

마음은 여전히 쓸쓸하고 고단하다. 4월 중순쯤이면 내 마음도 화사한 봄기운으로 황홀하여 지려나. 오월이 되면 비로소 내 마음속에도 봄이 만발하여 환희의 찬가를 목청껏 부를 수 있을까.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오월이 다 가고 다시 따가운 뙤약볕이 지상을 달굴 때가 되더라도 내 마음에 봄은 한 번도 만발하게 피어나지 못하고 소중한 또 한 번의 봄을 아쉬움 속에 묻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기다릴 것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하는 김영랑 시인과 함께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리는 날'까지 나는 나의 봄을 기다릴 것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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