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흐름을 모른다고 산 속 깊숙이 뿌리박혀 속세를 외면하고 도를 닦는 스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때가 가끔 들곤 하는 것은 한국 교육 정책에 대한 회의 때문일까? 아니면 리모콘만 누르면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의미한 장면에 회의를 느끼기 때문일까?
고정된 채널없이 넘어가는 무미건조한 화면이 어느 집단의 시각적 효과에 의해서 정지되어 일정한 시간이 흐르다 다시 리모콘에 의해 정지되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우리 교육 정책의 흐름이 아닌 지. 금호공고 설립, 과학고 설립, 교장초빙제, 교사초빙제, 교사계약제도입, 대학입시교육정책 등등이 왜 현장 교사의 뇌리를 스치게 하는 일거리가 될까?
다양한 채널에는 다양한 내용 채워져야
교육은 추상명사라는 데서 출발해 보자. 모 교장 선생님이 “한국교육신문”에 매일매일 기고하는 글을 읽어 보면 교육은 천차만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기에 교육을 받는 자나 교육을 하는 자나 그 중심은 하나이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다양하다. 교육을 사랑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느낌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교육을 받는 대상을 어느 각도에서 볼 것이냐에 따라서도 다르겠지만, 교육을 받는 대상이 추구하는 이념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교육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동물도 마찬가지로 자기 새끼를 길러 가는데 먹이고 재우는 일을 소홀히 하면 그 새끼는 도태되어 버린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먹이고 재우고 교육시켜야 인간이 인간다운 방향으로 성장해 나간다. 이런 성장의 기틀을 전체의 시각에서 이끌어 가는 집단이 교육부라면 교육부의 정책은 다수에 어울리는 안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스쳐 지나갈 수 있는 파노라마 인상을 풍긴다면 리모콘 정책이라는 용어를 벗어날 길은 어렵지 않겠는가?
교육을 멀리 보고 출발하든 가까이 보고 출발하든 대상에 대한 지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교사 중심이었던 과거와 학생 중심이었던 현재의 교육은 똑같이 인간의 생활을 원만하게 이끌어 가는 수단에 지나지 않다고 함에는 동일하다. 하지만 변화를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사회 풍속도를 서구의 영향으로 인해 문명의 영향으로 인해 기존 질서가 무너질 때에는 계층간에 갈등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은 바로선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교육의 핵심은
오늘날 교육에 핵심은 지식의 전달도 아니요, 그렇다고 새로운 교수법도 아니다. 오로지 학생들의 인성을 바로 잡아 우리의 풍속도를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자리매김해 주는 과제일 것이다. 그러면서 고교 평균화 정책에 따른 수월성 교육의 부재에 따른 보완 교육에 만전을 기하는 교육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다양한 교육부의 정책도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은 한가지다. 바로 학생들의 교실 수업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다. 교장과 교사 초빙제도 학생들의 좋은 교육을 위한 우수한 교사 만들기 위한 정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교육자들에게 신뢰성이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