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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하는 사회 되어야

숲에는 온통 탁류가 흐르고 있다. 그 거대한 탁류는 세 가지 냄새를 뿜어내고 있다. '하나'는 공격성마저 띤 뻔뻔스러움이라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어디에서 수치심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둘'은 약삭빠른 냉소가 묻어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셋'은 절망과 체념의 신음소리가 배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정직하고 청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시당하거나 도태되고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이 대우받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말깨나 하고 글깨나 쓰는 사람은 대부분이 썩어 있고, 그 보다 더 썩은 자들의 뻔뻔스러움과 공격성이 통하고 있는 사회에서 힘없고 돈 없고 이름도 없는 사람들은 절망하고 체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 말머리 글에서

광기어린 독설과 뻔뻔스러움이 판을 치는 한국사회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프랑스라는 거울을 통해 본 한국 사회의 초상>(한겨레출판 펴냄, 2008년 5월 개정판)의 저자 홍세화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세 가지 냄새가 물씬 나는 탁류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숲엔 맑은 물이 흐르고 흥겨운 새소리 바람소리가 나야 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숲은 광기어린 독설과 뻔뻔스러움이 판을 치고 있는 모습은 저자의 말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목도하고 있다.

쇠고기 수입으로 촉발된 촛불시위에 대해 조중동이라는 언론을 중심으로 집회 참가자들이 빨간 물이 든 사람들로 매도되기도 한다. 또 이들은 끊임없이 배후설을 제기하며 선량한 시민들을 압박한다.

여기에 조중동에 광고를 싣지 말라는 시민들의 행위에 대해 불법성을 강조하며 검·경찰이 수사를 한다. 일부 극우세력들은 방송사를 위협하고 진보당사에 난입하여 당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집기를 부수는 행위들이 백주대낮에 일어난다.

한술 더 떠 보수 성향의 목사들까지 나서 촛불 시위 중단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이들에게선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힘 있고 권력을 쥔 사람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목회자의 모습인지 심히 염려스럽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말깨나 하고 글깨나 쓰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에 대해 말하는 모습을 찾기는 얼마나 힘든가. 이름깨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학문을 곡학아세하여 권력의 언저리에 기웃거리거나 침묵하는 게 지식인이라 자처한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아예 드러내놓고 편협한 자신의 생각을 쓸 만한 것인양하며 독설을 쏟아낸다. 이를 보면서 배운 것도 부족하고 돈도 없는 서민들은 촛불 하나에 마음을 담아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건 그저 절망과 체념의 한숨뿐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것뿐일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의료 노동 그 어느 것 하나 답답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답답하고 우울한 우리 사회의 초상들을 저자 홍세화는 프랑스라 거울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몇몇 모습을 살펴보자.

비정규직의 반동의 칼, 언제든지 나에게 다가올 수 있어

"알아야 한다. 지금 설령 정규직이라 할지라도 반동의 칼이 언제 나에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오늘의 굴종이 내일 나를 향한 칼날을 가는 행위가 된다는 점을. 지금 비정규직에 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내 자식에게 피눈물 흘리게 하는 내일을 물려주게 된다는 점을. 우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노동자들에겐 돈도 없고 권력도 없다."

2007년 비정규직법 통과에 대해 저자의 펜은 자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엔 무관심한 우리 모두의 의식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프랑스의 예를 들면서 말이다.

프랑스에서도 2006년 우리와 비슷한(사실 우리보다 나은) 노동유연성 법안이 통과됐다. 집권 우파세력에 의해서다. 통과된 법안의 핵심 내용 중 문제가 되는 것은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최초로 고용하는 경우 2년 이내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해고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이때 프랑스 정부는 24%에 달하는 청년실업문제를 줄일 수 있다는 방안이라는 말을 하며 통과시켰지만 결국 시민들에 의해 철회됐다.

당시 프랑스의 시민들과 대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여 의회에서 통과된 법을 철회시켜 버렸다. 이 비정규직법안이 결국은 미래의 젊은이들과 내 자식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줄 것임을 프랑스 시민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일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시위를 했지만 결국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들과 대다수의 젊은 대학생들이 자신들을 옥죄일 법안임에도 어떤 문제의식도 갖지 못한 사실에 대해 저자는 무척 안타까워한다.

사실 쇠고기 수입도 마찬가지지만 비정규직법도 현실의 문제이면서 미래의 모습이다. 지금의 나와 우리 자식들을 위험에 빠트릴 요인이면서 미래의 위험 요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60%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채 20% 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과 우리들의 대응방식은 전혀 달랐다. 홍세화는 그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의식의 차이에서 온다. 시민의식과 노동자의식의 차이에서 온다. 우리에겐 부족한 시민의식과 노동자의식을 프랑스 사회 구성원들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은 가졌는데 우리는 가지지 못했다는 시민의식, 노동자의식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쩌면 잘못된 현상을 보고도 행동하지 못하는 의식이 아닐까. 나만, 내 가정만 잘 살고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 그래서 잘못된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나 몰라라 하는 의식구조, 이것이 그들과 우리들의 차이이고 그 차이가 행동의 유무로 나타난 건 아닐까 싶다.

그럼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려 한 교육 정책에 대한 홍세화의 생각은 어떨까. 한 마디로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영어몰입교육은 성공할 수 없지만, 설령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을 미국인이나 미국 사회 구성원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영어몰입교육을 발상한 위정자들은 인문적 소양이 경제동물의 수준에 머문 수준이거나 이미 미국인이 돼버린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다 이거나다. 그들이 광우병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 쇠고기 수입을 완전 개방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영어몰입교육뿐인가. 학교자율화조치로 인해 학교는 학원화의 위험성에 처해 있다. 모든 게 경쟁, 경쟁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의 신봉자들에게 아이들의 행복이나 기쁨은 도외시된 채 오로지 경쟁, 성적 지상주의만이 전부인양 떠들어댄다.

이들에겐 전체 국민의 건강권이나 행복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부 계층의 행복이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일부 보수우익계층의 말과 생각만 대변하려 한다. 이에 대다수의 서민계층은 체념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

사회 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

책을 읽으면서 유난히 크게 깊게 들어온 단어와 말이 있다. '똘레랑스'라는 단어와 '사회 정의가 질서에 의존한다'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낯선 단어와 문장이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내용은 이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똘레랑스는 우리말의 '관용'이란 말과 비슷하다. 타인을 배려하고 나와 다른 생각도 존중해주는 게 저자가 말하는 똘레랑스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듯한 극우세력들에게 똘레랑스가 있을까 하고 저자는 자문하며 이렇게 자답한다. '한국의 극우세력에게 똘레랑스는 없다'고. 그러면서 한국의 보수세력의 실체를 이렇게 비판한다.

"한국의 보수는 제멋대로여서 극우와 자유민주주의 사이를 마음대로 왔다갔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극우와 자유민주주의자로 구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보수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에서도 극우와 자유민주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 진정한 보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 '사회 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는 말은 어떤가. 지금까지 우리는 '정의'보다는 '질서'란 말에 익숙해져 왔다. 이번 촛불 집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촛불시위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사회적 정의'보다는 '사회적 질서'를 강조하며 집회참가자들을 불온시했다.

온 국민의 건강권과 주권이 걸린 '정의'보다 교통방해 같은 질서를 주장하며 촛불시위를 당장 중지하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의보다 질서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사회정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정의는 도외시한 채 오로지 사회질서, 법질서만을 들어왔고 그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은 사회정의까지 어기는 사람으로 치부되어 왔다.

이에 사회전반의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정부가 쇠고기 개방, 의료·물·전기의 사기업화를 추진하려 하고, 이름만 바꾼 채 눈속임으로 추진하려하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 학교자율화 등과 같은 정책을 추진하려는 일련 행위들을 저자는 사회정의를 망각한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도 드러난다. 정론인 체 하고, 지식인 체 하며 은근히 보신주의를 꾀하는 우리들의 모습도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 한국인의 잘못된 의식을 비판하는 내용도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일방적인 비판만을 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를, 우리 사람들을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20여 년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홍세화 선생의 글줄기에서 느낄 수 있다.

책을 덮기 전에 긴 여백 속에 아주 작게 그러나 내 눈을, 마음을 오랫동안 잡아 둔 글귀를 읽고 또 읽었다. 우리의 현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두 문장, 그 문장을 소개해 본다.

"한강은 서울을 강남과 강북으로 가르며 흐르고, 쎄느강은 파리를 좌안과 우안으로 나누며 흐른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된 지 60년을 넘겼고 프랑스는 좌우가 공존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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