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출근일시가 기계처럼 고정화되어 있는 고등학교 인문계 3학년 교사들. 오늘도 변함없이 차를 타면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아침 7시 뉴스는 하루의 일과를 알리는 자명종과 같은 멜로디로 들리곤 한다. 모 라디오 방송 뉴스에서 인천의 청라지구에 전문계 고등학교가 들어온다고 하여 지역 거주자들이 교육 관련 기관에 진정서를 올려 학교 설립을 막았다고 하여 학교 건립이 중단된 상태라는 보도를 듣고서 너무 놀랐다.
청라 지구가 앞으로 인천에서 떠오르는 별이 될 것이라고 너도 나도 앞 다투어 분양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 소지가 있는 전문계 학교의 진입일 막아 아파트 값을 올려 보자는 의도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문계 고등학교의 명칭이 바뀌기 전에 실업고등학교라고 하여 기피하는 대상이 되어 그 분위기를 바꾸고자 중학생들의 고등학교 입학 고사를 실업계 고등학교부터 먼저 치렀다.
그 결과 실업계 고등학교에 떨어진 학생이 인문계로 밀려오기 시작하자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실 수업이 오합지졸이 되어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마구 엎어져 잠을 자는 학생이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부진아 수업을 하는 경향이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발생하였다고 하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장인정신을 살리자고 부르짖고 있는 우리의 현실도 알고 보면 수박 겉핥기식에 지니지 않았다는 결과가 아닌지. 아파트 값은 떨어지면 안 되고 실업계 고등학교는 영원히 혐오대상으로 전락되어도 괜찮다는 한국인의 의식은 무엇으로 대변해야 할까? 나만 잘되면 만사 오케다라는 사고의 틀이 언제부터 자리 잡았을까?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적 사고의 틀은 궁극적으로 도시 사회의 한 병폐라고 볼 수도 있으나, 내 자식이 전문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런 발상을 쉽게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교육은 100년을 내다보고 시켜야 한다. 1년을 내다보고 살 사람은 농사를 짓고, 10년을 내다보고 살 사람은 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인문계 교실과 각 가정의 전장에 매달려 주변을 밝게 비추는 전등은 인문계 고등학생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수한 공과대학에 진학하는 대학생만이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중국의 거대한 만리장성도, 프랑스의 거대한 에펠탑도 장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 여름의 들판에 아름다운 대 초원의 싱그러움도 온 산의 신록도 큰 나무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 인도에 보잘것없이 솟아난 한 포기 한 포기의 잡초가 모이지 않았다면 초원의 거대한 싱그러움은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거리에 뒹구는 돌멩이의 보잘것없는 모양도 63층의 거대한 빌딩을 만들어 내는 데 시용된다는 것을 알면 과연 전문계 고등학교가 혐오의 대상이라고 하여 청라지구에 짓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의 현실에서 인문계 고등학교 육성이 중요한가 아니면 전문계 고등학교의 육성이 중요한가! 어느 것이 비중이 높다고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아는 일이다. 과학고의 제 구실이 왜 실패로 돌아갔으며, 외국어 고등학교의 육성이 왜 실패로 돌아갔는지, 옛 금오공고의 육성이 실패로 끝났는 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심도 있게 생각해 볼 일이다. 관존민비사상, 사농공상 사상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 한국인의 의식 구조는 후진국의 배경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