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막내딸의 성적표를 아예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보면 속상하기만 할 텐데 하고 미리 방어벽을 치기 때문이다. “세상에! 지 아버지가 30년 동안 선생님을 하면 아이들이 알아서 솔선수범해서 지 아버지 체면 좀 세워주면 안되나?” 나는 푸념도 많이 했다. 지금은 다 큰 쌍둥이 두 딸의 성적이 영 시원찮아 지금까지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한껏 기대를 모았던 늦둥이까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곤두박질치는 성적엔 이제 두 손 들고 만 상태다.
저번에 아내가 무슨 얘기 끝에 한 말이 또 내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성적표가 나왔는데 수학이… 영어가…” 아내가 우물쭈물 얼버무렸다. 나는 금세 기분이 상해져 아내의 말을 가로 막았다. “애들 성적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핀잔을 들은 아내도 시무룩해져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난 2월부터 수학 개인교습을 1주일에 두 번씩 했는데도 그 모양인가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영어 성적은 또 그게 뭐란 말이냐? 내가 교과서 시험범위를 두 번이나 가르쳐줬는데도 그 성적이라니! 수학을 해야 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수학점수 향상을 은근히 기대하며 영어문제집 푸는 걸 생략하고 말았더니 영어점수가 그만 곤두박질 친 것이다. 다른 과목은 보나 마나일 거다. 초등학교 때 한문학원을 다녔으니 한문이나 좀 괜찮을지 모르겠다. 나머지 과목은……?
지금 학교에선 상대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학생 전체를 일렬로 늘어놓는 점수 부여 방식이다. 내신 부풀리기를 방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지만 참 불합리한 평가방식임엔 틀림없다. 만약에 절대평가로 한다면 한 반에 과목 당 ‘수’를 받는 학생이 열 명 스무 명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상대평가를 실시하는 고육지책을 왜 모르겠는가? 그래 소수점 이하의 점수 차로 ‘수’가 되고 ‘우’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긴 수능도 상대평가다. 전체 평균에 따라 내 우열이 결정되는 표준점수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경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점수로 인문계 고교에 진학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곧 고등학교 진학 문제는 들이닥칠 텐데 난감하다. 담임선생님도 막내딸에 대해 실망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생활기록부와 면담을 통해 내가 교사인 걸 다 알 텐데 찾아가 볼 용기도 나지 않는다. 담임교사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거의 절대적 책임은 학생 자신에게 있다.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갈 순 있어도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지 않는가?
딸네 학교 교장선생님이 실은 내 중고등학교 2년 선배다. 친구의 형이기도 하다. 학년이 바뀌고 교장선생님 고등학교로 전근하고 나니 이번엔 새로 부임한 교감선생님이 또 전에 같이 근무했던 교사로 나이로는 후배벌이 된다. 나는 한 번도 학교에 찾아가지 않았다. 찾아가기는커녕 전화 한 번 한 적도 없다. 딸의 성적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짐으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긴 성적이 좋다 하더라도 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그것이 내 방침이기 때문이다. 교사로서 담임선생님을 찾아가는 것 자체가 불공정 게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시 딸이 전교 1등이라도 하면 학년 말에 찾아가 담임선생님과 식사 한 번 할지는 몰라도 나는 내가 교사이기 때문에 더 찾아가지 않는다. 물론 내가 찾아간다고 딸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전에 여러 차례 동료교사의 자녀 수업을 한 일이 있었지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니?” 하고 격려의 말을 건넨 것이 고작이었다. 아이들에게 괜히 부담만 주는 일일 수도 있다. 공부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나는 딸의 다른 재주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혹시 예체능에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렸을 때 하도 몸동작이 빠르고 신체발육이 빨라 혹시 운동에 재주가 있는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커갈수록 살펴보았지만 운동선수 형은 아니다. 어려서 사람 그림을 엄청 많이 그려서 혹시 미술에 소질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둘째가 은사인 피아노교수에게 막내를 데리고 간 일이 있다. 막내의 손을 살펴보던 교수가 피아노를 하기에 아주 좋은 손이라고 칭찬을 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피아노도 몇 해 하더니 싫증을 내 중단하고 말았다. 흥미를 느끼고 꾸준히 스스로 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소질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제 대안이 없다. 하는데 까지 열심히 해서 적성에 맞게 진로를 정하는 수밖에 없다. 종종 나는 예전 내가 학교 다닐 때와 요즘 아이들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학원 한 번 안다니고 시골집에서 촛불 아래 꿍꿍거리며 혼자 공부하던 나 자신을 생각하며 늘 아이들에게 학원보다는 혼자 열심히 공부하라고 강조해 왔다. 학원 안 가고 혼자 공부한다는 것이 어렵겠다 하면서도 도대체 그 많은 학원을 다니며 일방적 강의만을 듣고 어떻게 실력이 는다는 건지 나는 지금도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다.
나는 솔직히 시골에서 거의 혼자 공부를 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공부는 역시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물론 ‘學習’이니 ‘學’(배울 학) 도 중요하지만 ‘習’(익힐 습) 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막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지금까지 나는 매번 기대와 실망의 연속이다. 얼마나 기대하던 막내였나? 느긋하게 마음을 먹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텐데……. 학교에서도 인정받고 부모 사랑도 듬뿍 받을 텐데…….
그냥 놓아둘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막내딸 프로젝트(Last Daughter Project)를 세웠다. 거창한 건 아니다. 전 과목이 아니더라도 두세 과목만이라도 성적을 올리는 것이 목표다. 이대로 고등학교 올라가면 정말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영어 한 과목만이라도 해보기로 다짐했다. 해보다가 정말 공부에 흥미도 재주도 없다면 다른 대책을 세워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