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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훈민정음에서 한글까지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를 한글이라고 한다. 한글은 우리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세계에서 문자를 직접 만들고 국민이 함께 통일해서 사용하는 나라가 드물다. 유네스코가 발간한 ‘지구의 언어․문화․생물 다양성 이해하기’라는 책자에 따르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는 약 6천700개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문자를 가진 언어는 300여 개에 불가하다. 그 중에서도 한글은 창제와 관련된 모든 기록이 존재하고 과학적인 문자라는 점에서 세계 유일 문자다. 영국의 옥스퍼드대에서 현재 쓰고 있는 세계의 문자 30여 개를 평가했는데, 한글은 합리성․과학성․독창성 부문에서 최고에 올랐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세계에서 독창적인 문자를 가진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가짐과 동시에 우리 문자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서는 우리 문자인 한글의 명칭이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살펴볼까 한다.

우리가 말하는 문자의 이름을 한글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은 ‘훈민정음’이었다. 훈민정음 정인지 해례 서문에도 글자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했다.

○ ‘아전하창제정음이십팔자(我殿下創製正音二十八字), 약게례의이시지(略揭例義以示之), 명왈훈민정음(名曰訓民正音)’-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와 뜻을 들어 보이시니 이름 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고 하셨다.
- 세종(世宗) 113권, 28년(1446년)

이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1443년) 기사에도 세종28년 9월 기사에도 훈민정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훈민정음은 문자이름이면서 동시에 책 이름이었다.




아울러 앞의 ‘정음이십팔자(正音二十八字)’의 기록을 보면 훈민정음과 함께 우리 글자 이름으로 정음을 사용했다는 근거를 볼 수 있다. 이는 훈민정음을 줄여서 쓴 표현이라고 보인다.
훈민정음에는 당시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언문(諺文)’도 많이 쓰였다.

○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 세종(世宗) 102권, 25년(1443년)

○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최항(崔恒)·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 세종 103권, 26년(1444년)

○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栽)하시옵기를 바랍니다.
- 세종 103권, 26년(1444년)

언문은 당시 한문을 ‘진문’이라고 한 것에 대한 상대적 표현으로 우리 한글을 비하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위 문헌에서 보듯 당시에 여러 군데서 사용하고 있다. 즉 언문은 또 다른 우리 글자 이름이었다. 당시 유교적 이념이 국시에 가까운 역사적 상황에서 임금이 직접 글자를 만들었는데 경시했다는 판단은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도 이러한 속설이 지금가지 전하는 이유는 연산군 때 언문 금지령과 관련이 있다.

○ 전교하기를,
“어제 예궐(詣闕)하였던 정부(政府)·금부(禁府)의 당상(堂上)을 부르라. 또 앞으로는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며, 모든 언문을 아는 자를 한성의 오부(五部)로 하여금 적발하여 고하게 하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람을 아울러 죄주라. 어제 죄인을 잡는 절목(節目)을 성 안에는 이미 통유(通諭)하였거니와, 성 밖 및 외방에도 통유하라.”하였다.
- 연산 54권, 10년(1504년)

당시 투서 일로 언문을 배우거나 쓰지 못하게 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언문은 우리 글자를 경시하는 표현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또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같이하여 우리 글자를 ‘암클’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즉 언문은 천한 것으로 여자만 배우는 글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다. 참고로 암클은 암글이라고 ‘예전에, 여자들이나 쓸 글이라는 뜻으로, 한글을 낮잡아 이르던 말.’이라고 설명(국립국어원의 편찬한 국어대사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 민간에서 전하던 말을 사전에 등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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