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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국어사전’의 편찬 역사①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후 우리 겨레는 국어사전이 없이 언어생활을 해 왔다. 어휘 개념을 문헌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학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사전의 존재를 알린 것은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1869년 프랑스 페롱 신부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불한사전’이 있다. 이는 한국에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의 종교 활동을 돕기 위한 것이다. 단어도 역시 선교에 필요한 것 위주로 선택되었다. 그러다가 리델 신부에 의해 ‘한불자전’이 탄생했다.

이 사전은 1868년 경 완성되었으며, 1880년에 인쇄되었다. 이 사전도 역시 선교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개신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1897년에 편찬한 ‘한영자전’도 다분히 기독교적 맥락에서 우리말을 이해하려는 사전이었다. 이러한 활동이 우리 국어생활에는 직접적인 영향은 못 주었지만, 우리들에게 사전의 존재를 알렸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사전 편찬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일제 강점기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국어 정책은 크게 ‘언문 철자법’을 제정하고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일로 나눌 수 있다. 이 당시 국어 운동의 중심에는 늘 주시경 선생이 있었는데, 사전 편찬도 마찬가지다. 기록에 의하면, 1911년부터 주시경ㆍ최남선 등이 ‘말모이’라는 우리말사전의 편찬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책으로 발간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국어사전을 최초로 만든 곳은 조선총독부였다. 국어사전 편찬 담당은 총독부 취조국 소관이었는데 집필과 편집은 조선인에게 하였고, 심사 수정 및 주석은 일본인에게 하였다. 이 사전은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여 착수한지 10년만인 1920년 3월 ‘조선어 사전’으로 발간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사전이었지만, 표제어만 한자와 한글을 병기하고 일본어로 주석을 달았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의미의 국어사전이라고 하기에 어렵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대륙 침략이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1937년에는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를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 기지화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펴는 한편 조선에 대한 지배 정책을 더욱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1938년 제3차 조선 교육령과 1943년 제4차 조선 교육령은 이러한 지배 정책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암흑기 속에서도 지각 있는 국어학자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드디어 1938년 문세영이 ‘조선어사전’을 간행 우리 국어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 사전은 이윤재(李允宰)·한징(韓澄) 등의 도움으로 편찬했고, 수록 어휘는 10여 만 단어로 현대사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 사전을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보고 있다. 이 사전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으로 표기된 최초의 국어사전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1940년 12월에는 약 1만 단어를 추가하고 일부 주석을 보완하여 수정증보판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 경기대 박형익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1930년 4월10일에 발행된 ‘보통학교 조선어사전’ 제3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사전은 경성사범학교 훈도 심의린(沈宜麟)이 편찬한 것으로, 출판사는 서울에 위치한 주식회사 이문당(以文堂)으로 돼있다. 이 사전의 뒷면에는 초판 발행일로 1925년 10월20일이 명시된 판권지가 보존돼 있어, 이 사전의 처음 발행시점은 문세영의 ‘조선어사전’보다 13년 앞선 것으로 증명됐다.

이 사전은 표제어와 뜻풀이에 모두 한국어를 사용하고 일본어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명실상부한 최초의 한국어 단일어 사전이라는 점에서 국문학사에서의 위상이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국어 정책에 대응하는 국어 운동으로는 조선어학회의 활동과 조선어학연구회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이 중에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고, 여러 사업을 진행하던 중 1929년에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어사전편찬회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두고 신명균(申明均)·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이중화(李重華)·최현배(崔鉉培) 등 5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정하였으며 이극로·이윤재·한징(韓澄)·이용기·김선기(金善琪) 등 5명을 편찬원으로 선정하였다.

하지만 그때 일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어사전과 같은 대사업을 하기 위한 재정적 기초가 빈약하였다. 그리고 그때는 확정한 표준말과 맞춤법이 없었다. 다행히 1931년 한글날에 이르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하고 힘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편찬회 업무 전부를 조선어학회에서 하기로 했다. 1936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선어학회에 통합된 뒤, 전임 집필위원으로 이극로·이윤재·정인승(鄭寅承)·한징·이중화 등 5명이 선임되고, 권승욱·권덕규(權悳奎)·정태진(丁泰鎭) 등 3명이 증원되었다. 성과도 제법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사전 편찬의 기초 공사도 대략 정리가 되었다.

이 학회는 민족 학회로 성장하였고, 우리나라 국어 정책을 주도해 나갔다. 아울러 사전 원고도 대동 인쇄소로 넘기어 조판 교정까지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조선총독부는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을 만들어 관련자를 구속하였다. 회원 31명을 검거하고 상고심 재판의 증거물로 원고 2만 6천여 장을 압수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함흥에 갇혔던 사람들도 서울로 돌아왔으나 사전 원고는 간 곳이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해 9월 8일 조선어학자들이 극적으로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원고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1947년 10월 9일 564쪽의 ‘조선말 큰사전’ 첫 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권이 1949년 5월 5일, 3권이 1950년 6월 1일, 4권이 1957년 8월 30일, 5권이 1957년 6월 30일, 6권이 1957년 10월 9일이다. 1929년 10월 31일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어 작업에 들어간 지 28년 만에 완간의 결실을 보게 된다.

사전 편찬 도중 고비도 많았다. 전쟁이 나 서울은 인민군이 점령 해버리고 미군 폭격으로 인쇄에 필요한 기기들도 소실되었다. 이런 와중에 놀란 어학회 사람들은 큰사전 원고를 손으로 복사해서 원본과 필사본은 따로 보관하기도 했다. 필사본은 최현배 선생의 집에 묻어두고, 원본은 유제한 선생의 고향땅 천안의 땅속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1952년 상황이 어느 정도 개선되자 한글학회는 미국 록펠러 재단의 도움으로 인쇄기기 등을 원조 받아 사전을 완성해 나간다.

한글학회(1949년 9월 25일 조선어학회에서 바뀜)의 큰사전은 역사적인 일이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운 일이다. 또 우리말 어휘 16만 4,125어휘를 수집, 집대성한 사전으로 우리의 국어학자들이 가담하여 국어의 규정을 제정․완성해 나갔다는 업적도 있다. 당시 1957년 10월 9일 완간된 ‘조선말 큰사전’ 최종 수정본 원고는 역사학적․국어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기록이 갖는 진보성, 유일성, 희귀성 면에서도 가치가 높아 현재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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