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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영혼의 파수꾼, 독서

그해 여름의 도서관

도서관은 내 영혼의 고향이다. 특히 더운 여름날 도서관에 있으면 나는 향수에 젖는다. 20대 초반, 무덥던 그 여름 겨우 선풍기 한 대만 돌아가던 시골 읍내의 도서관 한 쪽에서 땀을 훔치며 책과 씨름하던 나를 만날 수 있어서다.그리운 시절이다! 가슴이 울컥하도록.

1970년대, 배고픈 시절 호박볶음에 밥 한 공기가 점심이었고 저녁은 건너 뛰고 밤 10시까지 도서관에서 버티던 시절. 단 한 벌뿐인 옷은 밤마다 세탁해서 연탄불 위에 걸어두고 겨우 말려서 그 다음날 아침에 입었다. 파르스름한 청치마에 나일론이 곁들여진 반팔 티셔츠는 나의 장기기억에 새겨져서 색깔 하나 변하지 않고 영상으로 떠오른다.

무엇을 배웠을까? 혼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냥 해야 한다고 철썩같이 믿었다. 그 길밖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책 속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공통수학이나 수학의 정석 등을 혼자서 공부하며 더디게 알아가는 기쁨 한 모금으로 설렜던 젊은 날.

아직도 나는 도서관을 좋아한다. 칸막이로 둘러싸인 그 작은 공간이 마치 모태인 양 편안해진다. 그 작은 공간에서 만나는 책 속의 언어들이 나의 유일한 친구였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을 위한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절박하게 책을 보았던 그 때에 비하여 다소 느긋하게 즐기는 퇴근 후의 도서관 나들이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

보편적 진실, 난해한 진실, 아름다움을 찾아

침침해지는 눈을 다독이며 일독을 넘어 2독 3독으로 넘어가는 책을 만나는 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을 모른다. "어떤 글이든 처음 읽을 때 보편적인 진실이 드러나고, 두 번째 읽을 때 좀더 난해한 진실이 드러나고, 세 번째 읽을 때 아름다움이 드러난다면 그 글은 완벽한 글이다."라고 한 소로우의 일기를 만났던 날도 여름이었으니, 여름은 도서관과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도서관은 보편적인 진실과 난해한 진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지닌 내 인생 최고의 스승들을 만나는 인생의 대학이다. 그 거름장치를 통과하는 책은 장서로 갖고 싶어하지만 이미 품절된 책들이 많은 것이 마음 아프다. 그런 책의 예가 바로 <한국의 스승>이다. 성경이나 불교 서적, 공자나 노자, 장자의 책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천둥치는 一字千金의 글들이 넘쳐나서 사서 보려했으나 품절 상태다. 그 동안 책을 보는 시각이 너무 다른 나라 사상을 담은 서적에 편향되었음을 반성하게 한 책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지켜보면서 필요한 경우에 적절하게 개입하면 된다. 인간들이란, 특히 지구의 인간들이란 꽤나 안쓰러운 존재들이다. 그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들은 항상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며 아무것이나 믿고 의지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애원하기 일쑤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돕는다. 로또에 당첨되게 해주기도 하고 위대한 사랑을 만나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우리의 기분에 따라 자동차 사고나 심장마비를 일으키기도 하고 건물 벽에 금이 가게도 한다." 라고 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나무>에서 어린 신들의 학교의 한 장면은 꼭 나를 두고 쓴 글 같아서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윈스턴 처칠은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떠오를 때는 책을 읽어라. 쓸데없는 생각은 한가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지 분주한 사람은 느끼지 않는다. 시간이 생길 때마다 유익한 책을 읽어 마음의 양식을 쌓아 두어야 한다." 며 가을이 주는 우울함을 날려버리게 한다.

책 읽는 속도가 더딘 책은 <김대중 자서전>이다. 존경하는 인물이라서 그 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 부끄럽게 하는 책이다.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아보며 중요한 순간마다 고뇌했던 위대한 지도자의 숨결이 숨쉬는 행간에서 만나는 보편적 진실과 난해한 진실, 그리고 끝없는 용서와 관용으로 민족을 품고 싶어했던 지도자의 아름다운 진실은 이 가을에 만난 최고의 선물이다.

인생은 가을 옷 같아요

인생은 가을 옷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날씨를 내다보며 한 번 거칠까 말까 하다가 달려온 겨울 앞에 쏙 들어가 버리는 옷처럼 교실에서 보낸 30년 끝자락에 어느 사이 겨울이 손짓한다. 그래도 직업의 특성 덕분에 책과 함께 살 수 있어서 행복했고 앞으로도 그 행복은 나를 지켜줄 든든한 친구이자 최고의 스승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뭐부터 먹을까 생각을 한다. 당연히 책이다. 그 다음은 물, 그리고 밥이다. 간혹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물부터 먹기 때문이다. 책부터 먹지 않은 날은 하루가 상큼하지 못하다. 영혼은 21g뿐이지만 포만감을 느끼는 최고 음식은 단연 책이다. 책은 바로 영혼이라는 엔진을 달리게 하는 에너지다. 그렇다고 질이 좋지 않은 엔진 오일이나 휘발유를 주입하면 수명이 짧아지고 사고를 일으키기 쉽다.

그러니 온전히 살기 위해서는 좋은 책을 많이 만나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그 동안 더 잘 먹고 잘 입기 위해 앞만 보고 살아온 시간이 후회스럽다. 다산 정약용은 우리 몸 중에서 가장 속이기 쉬운 것이 위장이라고 했다. 거칠게 먹고 검박하게 먹어도, 잘 먹지 않아도 쉽게 배부름을 느낄 수 있으니 육신을 위해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아야 함을 몸소 실천했던 그는 결코 과거의 스승이 아니라 살아있는 스승이 분명하다. 죽었음에도 결코 죽지 않은 인류의 스승들이 남긴 책들 속에서 살아 있으면서도 산 것처럼 살지 못하는 내 삶을 비추어보며 짧은 가을 해가 지기 전에 부지런히 글밭을 뒤적이고 싶다. 그곳에는 마지막 숨을 할딱이는 순간까지 나를 지켜줄 인생의 스승이 수도승처럼 조용히 죽비를 들고 서서 나를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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