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많은 독자가 이육사 시인의 ‘광야’를 읽었을 것이다. 국어교과서에 수록돼 국민 대다수가 배워 아주 친숙한 육사의 대표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혹시 그 시를 읽으면서 시의 첫 연에서 뭔가 꺼림직한 느낌을 받지 않았는지 모른다. 나는 분명히 첫 연을 읽으며 뭔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어색했던 느낌을 실로 오랜만에 김종길 시인(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장)의 평론집을 읽으며 비로소 그 까닭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이 시의 그 꺼림직한 부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시를 읽는 독자와, 학교에서 그 시를 잘못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들에게 참고가 될 것 같아서 김 시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그 분의 탁월한 해석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럼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시 전문을 옮겨보기로 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날릴 때에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어색하게 느껴진 부분은 첫 연의 셋째 줄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이다. 현대의 어법으로 따지면 분명히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겠는가’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했을 때 우리가 놓칠 수 있는 시 해석의 오류를 시인은 아주 명쾌하게 규명하고 있다.
그럼 시인의 설명을 요약해보기로 한다.
첫째, 이 시의 형식은 완전한 정형시는 아니지만 정연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즉 각 연이 3행으로 되어 있고 그 3행은 차례로 길이가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는 ‘열리고’에서 보듯 두 개의 대등절로 구성되어 있다. 대등절이면 두 구절이 대등한 관계를 이루어야지 한 구절은 긍정, 한 구절은 부정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구조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 구절보다 뒤 구절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점을 ‘수사적 의문’(Rhetoric Question)으로 읽는 경우 그 부분이 이상하게 강조되어 문맥상 어색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셋째, 아직도 이 부분을 부정을 강조하는 ‘수사적 의문’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천지창조 내지 개벽의 순간의 정적이나 그 순간의 세계가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나 천지창조의 순간을 말한 다음 그렇게 ‘수사적 의문’의 형식을 사용하여 닭이 울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문맥을 아주 우스꽝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넷째, 그 시를 우리가 잘못 읽게 한 책임이 일차적으로 육사시인에게 있지만, 그러나 육사는 ‘들렸으리라’를 ‘들려으랴’ 로 축약해 써서 이때까지 한국어에 있어서의 유일한 어법을 육사가 처음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시인은 종종 새로운 말이나 어법 혹은 문법을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육사가 이런 무리한 어법을 사용한 데는 2연의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의 종결형과의 되풀이를 피하고 첫 연의 끝을 가볍고 유연하게 처리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 김 시인의 견해다.
다섯째, ‘어데’라는 부사는 육사의 고향 안동에서는 수사적 의문에도 쓰이지만 ‘어디선가’ ‘어디멘가’로 더 자주 쓰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겠는가’보다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로 읽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극동지방에서 닭 우는 소리는 바로 새벽을 알리는 소리이다. 천지창조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반어법을 써서 강조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고 문맥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유사한 어법이 육사의 시 ‘독백’의 끝 연에도 보인다고 했다.
닭 우는 들리면 가랴 안개 뽀얗게 나리는 새벽 그곳을 가만히 내려서 감세
여기서도 ‘…랴’라는 종결형이 의문과 함께 서술을 뜻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육사의 특이한 어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 논리는 특징적으로 상상의 논리라는 것인데 천지창조의 순간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어디선가 청아한 닭울음소리가 새로운 세상을 알리며 들려왔다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상상이라는 것이 김 시인의 결론인 것이다.
나는 김종길 실인의 이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앞으로 시는 이 시인의 견해에 따라 읽혀지고 교육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전국의 많은 선생님들도 이 부분에 혼란을 겪고 시를 잘못 해석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부분을 확실히 하여 독자로 하여금 혼란을 겪지 않고 시를 자연스럽게 원래의 아름다움을 되살려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여기에 소개했다. 이 글을 씀에 있어서 내 견해는 조금도 포함시키지 않고 오로지 시인의 견해를 소개하는 데 그쳤다는 것을 말씀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