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 만해도 시골 촌색시가 아니더라도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운 짓을 하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어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세상이 많이 변해서인지 아니면 양심에 때가 껴서 인지 잘못을 저지르고도 뻔뻔히 낯을 들고 다니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양심(良心)이란 ①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르고 착한 마음 ②자기(自己)의 행위(行爲)에 대(對)하여 옳고 그름, 선악(善惡)을 판단(判斷)하고 명령(命令)하는 도덕(道德) 의식(意識)이라고 사전에 적고 있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양심만은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피의자를 심문하면서 자백을 하지 않을 때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하여 양심의 반응으로 범행을 자백 받는다. 자기 양심을 속이고 마음이 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양심이 없거나 철면피(鐵面皮)를 가진 사람은 남을 속이고 자신마저 속이고도 태연하게 거리를 활보하니 이미 사람의 자격을 상실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도지위정(道之爲政)하고 제지이형(齊之以刑)이면 민면이무치(民免而無恥)니라 도지이덕(道之以德)하고 제지이례(齊之以禮)하면 유치차격(有恥且格)이니라』라고 하였다. 법을 엄하게 정하면 사회의 질서는 유지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법이나 형벌이 지나치게 엄하면 백성들은 자신의 잘못을 수치로 여기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서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 들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덕으로써 인도하고 윗사람 스스로가 모범적인 행동을 한다면, 백성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즉시 부끄러움을 느껴 고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지도층인사들도 법을 어기고 재판을 받고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뻔뻔스러움을 볼 수 있다.
이는 돈이나 지위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생각하며 양심 보다는 외형 지상주의에 몰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악이 팽배해지고 있어 안타깝다. 양심적으로 생활하며 어른들이 자라는 아이들에게 항상 모범을 보이며 가정에서부터 인성을 중시하는 올바른 삶을 보여주면 범죄나 사회악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버스나 지하철에 노인이 서있는데도 자는척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젊은이,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젊은이들,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애인과 애정표현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횡단보도를 두고 급하다고 어린자녀의 손을 이끌고 무단횡단을 하는 어머니, 아직도 우측통행인줄을 모르고 좌측통행을 하다 사람과 부딪치는 사람, 공원이나 등산길에서 담배꽁초나 오물을 함부로 버리며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식당이나 대중이 모이는 장소에서 큰소리로 떠들며 내 집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국회의원들이 멱살을 잡고 몸을 던져 저지하거나 문을 부수는 일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모가 이혼을 하고 자녀를 조부모에게 맡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자라는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운단 말인가? 남부럽지 않은 부와 명에를 누린 분들까지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법정에 서는 모습을 보고 이 땅의 아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가?
법이나 규칙은 양심으로 행동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을 제재하고 국법질서를 지키려는 하나의 수단이지 최선의 방법일 수는 없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갈고 닦아 양심으로 살아간다면 법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며 마음편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을 회복하고 부끄러움을 알도록 가정에서부터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학교 교육에서도 인성교육을 먼저 한 다음에 그 바탕위에 학문을 높여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사회가 밝아지고 살맛나는 나라로 만들려면 국민각자의 양심을 회복하는 운동을 펼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