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장편소설 ‘은교’가 영화로 개봉되었다. 지난 4월 26일의 일이다. 개봉 15일 만에 전국 11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아마 ‘스타작가’라는 원작자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은교’(감독 정지우)는 개봉 무렵 일간신문들이 앞다퉈 논산으로 낙향한 박범신 근황과 함께 영화 리뷰를 일제히 싣기도 했다.
필자가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본 것은, 그러나 그 때문이 아니다. ‘은교’가 마침 제13회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 상영된 때문이라 해야 옳다. 국제 영화제 상영작과 연결시켜 ‘은교’를 본 것은 맙소사! 09시 시작 1회 상영작이었다. 조조할인에 카드할인까지 중·고생 단체관람비 정도로 극장 영화를 보다니 횡재가 따로 없었다.
09시 상영영화를 본 것은 필자로선 생애 최초의 일이다. 이를테면 역사적인 일인 셈이다. 엉뚱하게도 필자 혼자, 그 드넓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게 되나 하는 기우는 상영시각이 임박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16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왔던 것. 놀라운 것은 16명의 면면이다. 40대로 보이는 아줌마 2명을 빼놓곤 전부 20대 초·중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이 영화의 관객층을 주도하는 세대이긴 하지만, ‘은교’의 경우 다소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들선 영화를 통해 딱히 건질만한 핵심 명제 같은 것이 ‘은교’에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오전 9시라곤 하지만, 고작 14명 젊은 관객을 두고 너무 지나친 의미 부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과연 그들은 ‘은교’에서 무엇을 보려 한 것일까?
앞에서 말했듯 ‘은교’는 화제작이다. “30대 배우 박해일의 백발노인 변신, 신인 여배우 김고은에 대한 꽁꽁 숨긴 신비주의 홍보전략, 박범신작가의 동명소설인 원작…”(동아일보, 2012.4.24) 등이 관심거리였다. 나아가 여배우 파격노출 및 적나라한 섹스신이라든가 ‘해피엔드’(1999)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정지우 감독의 신작 등도 화제였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로’ 내지 ‘아니다’가 될 것 같다.
이미 소설을 통해 알려진 대로 ‘은교’는 70세(소설에선 69세) 국민시인 이적요(박해일)와 17세 여고생 은교(김고은),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끼어 있는 소설가 서지우(김무열) 3명의 애증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에선 늙음과 젊음, 사랑과 섹스, 문학과 사이비문학 등이 그리 숨 가쁘지 않게 교차한다. 오히려 2시간 남짓한 상영시간이 약간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것은 일단 영화가 원작소설보다 못하다는 의미의 다른 말이다. 사실 소설 ‘은교’는 참 독한 연애소설이면서 연애소설만은 아닌 작품으로 읽힌다. 70세 노인, 그것도 국민시인이라 추앙받는 노인이 17세 여고생을 사랑하는 해괴한 일이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결코 욕정이나 섹스 따위 세속적 사랑놀음이 파격적으로 그려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도 ‘꿈, 호텔 캘리포니아’ 꼭지를 통해 은교와의 섹스가 판타지로 펼쳐지지만, 이적요는 은교에 대한 욕망을 절제한다. 자신도 모르게 은교를 보거나 대하며 페니스가 일어설 때 이적요는 은교를 “건너편 벽까지 밀려나 머리를 부딪힐 정도”로 밀쳐낸다. 거기서 늙음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보질 않는다. 예컨대 서지우가 사주한 노랑머리 청년으로부터 “당신, 지금 썩은 관처럼 보여”라는 무지막지한 말을 듣는 식이다. 이적요로선 평생 처음 겪는 모멸감이다. 그로 인해 짐짓 은교를 멀리 하기로 하지만, 그녀와 함께 한 카페 등에서 입장을 거부 당하기도 한다. 이적요는 그런 세상에 대해 저항한다. 은교와의 끈을 끊게 하는 그 늙음에 절규한다.
물론, 노상 하는 말이지만 영화가 원작소설과 같을 필요는 없다. 원작자 박범신 역시 “불만을 이야기하자면 밤새워 이야기해야 하지만, 영화는 영화로서 보아야 옳아”(서울신문, 2012.4.21)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원작의 주제를 이만큼 알뜰하게 재해석한 경우는 많지 않았어. 감독과 출연진에게 고맙지” 하면서도 “그렇다고 만족스러웠다는 것은 아니야”(앞의 서울신문)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가 원작소설과 같을 필요는 없더라도 응당 문제는 남는다. ‘은교’의 경우 소설 속 은교를 죽여버린 영화가 되어버린 점이 그것이다. 제목과 달리 은교가 객체로 놓인 소설의 약점을 극복한 것은 좋다. 소설에서 은교는 원조교제나 하는 그냥 평범하거나 영악한 여고생일 뿐이다. 가령 서지우와의 ‘이층집’에서 “아이 참, 영어 단어 암기해요. 내일 영어 시험 본다구요!”라며 짜증내는 걸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영화에선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이적요가 창문을 통해 훔쳐보는 서지우와의 이층집에서 은교는 묻는다. “여고생이 왜 남자와 섹스하는 줄 아냐?”고. 서지우의 즉답이 없자 은교는 스스로 “외로워서”라고 대답한다. 결국 여고생이 외로워서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것이다. 더 놀랄 일은 원작에 없는 이런 영화 대목을 원작자가 맘에 들어 했다는 사실이다.
원작자가 맘에 들어 했다니 할 말이 없어야 할까? 그건 아니다. 은교라는, 참 독한 연애소설이면서 연애소설만은 아닌 소설 속 캐릭터의 너무 심한 왜곡이기 때문이다. 은교의 그런 태도는 서지우, 상대적으로 국민시인에다가 욕망 자제로 일관해온 이적요와 콘트라스트되는 서지우라는 캐릭터와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요컨대 남녀간 섹스에 대한 당위성보다 원조교제를 할 수밖에 없는 은교라야 이적요의 그것들이 사랑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서지우의 “더러운 스캔들” 운운에 불같이 화를 낸 거라든가 은교와 오붓이 하는 데이트에 매우 만족해하는 것, 서지우를 죽일 생각으로 한 핸들조작 등 일련의 상황이나 액션이 이적요의 사랑행각으로 귀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인 은교는 외로워서 섹스를 나누는 여고생이라면 너무 쌩뚱맞지 않은가? 그런 은교라면 차라리 이적요와 그리되어야 영화내적 리얼리티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기 및 체모 노출과 격렬한 이층집이 꼭 필요했는지도 의문이다. 이적요의 홀랑 벗은 모습은 ‘늙음’의 표상으로 설득력이 생기지만, 은교의 격렬한 이층집은 쌩뚱맞다. 17세 여고생이 엑스타시에 전율하는, 마치 ‘애마부인’ 같은 몸짓을 하고 있어서다. 설사 그걸 지켜보는 이적요의 ‘늙음’을 자극하기 위한 의도였을지라도, 그건 아니지 싶다.
또 다른 아쉬움은 그만 놓쳐버린 주옥 같은 대사들이다. 요컨대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파스칼),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스탕달)같이 이적요의 은교에 대한 사랑을 어필시키는 소설 속 대사를 전혀 살려내지 못한 것이다. ‘이상문학상’에다가 출판사 겸 잡지이름 ‘문학동네’가 여러 차례 간접선전된 것도 다소 의아스럽다.
영화가 사회적 의무를 다할 책임은 없지만, 그리고 청소년관람불가영화라곤 하지만 은교의 나이나 신분 때문인지 ‘은교’에 대한 여고생들의 관심이 커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은교는 외로워서 남자와 이층집을 짓는 애마부인 캐릭터가 아니어야 했다. 가난 때문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오르가즘과는 하등 상관없이 오히려 섹스에 고통스러워하는 은교여야 했다.
마치 청년처럼 들리는 목소리를 빼고 30대 박해일의 70대 노인 연기는 300대 1의 경쟁을 뚫고 발탁된 김고은보다 한 수 위다. 특히 첫 부분 은교에게 한눈에 반한 노인 박해일의 표정연기는 일품이다. 김고은의 경우 자연산 얼굴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이미지가 돋보이긴 하지만, 글쎄 빈약한 가슴이나 별로 뇌쇄적이지 못한 표정 등이 이적요를 바위틈 지나 청춘을 다시 찾은 뱀 같은 열정의 노인으로 만들었을지는 의문이다.
부록으로 시는 어떤가?
이적요를 위하여
이적요는 69 또는 70살의 국민시인이다 어느날 17살 은교가 잠자는 모습을 처음 본 후로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는 파스칼의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독한 사랑의 늪에 빠져든다 이적요는 송장이란 소릴 들을망정 은교와의 데이트만으로도 숫총각처럼 마음이 달뜬다 안마시술소에서와 달리 가운뎃다리가 서곤 하는 희귀한 경험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이적요는 다만 꿈속에서 은교와 사랑을 나누고 그만 죽어버린다 영화에선 살아 남지만 이적요에게 은교는 없다 사랑이라는 욕망을 우정 절제하는 이적요의 사랑은? 사랑이다 외로워서라며 애마부인 같은 몸짓으로 서지우와 ‘이층집’ 짓는 17살 여고생 은교를 사랑한 이적요 때로 사랑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