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수업에 관한 책을 읽었다. 조벽 교수의 ‘수업 컨설팅’부터 사토 마나부 교수의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이혁규 교수의 ‘수업, 비평의 눈으로 읽다’까지 독후감도 썼다. 그리고 틈틈이 수업 관련 연수를 받고, 논문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읽었다.
책을 집중적으로 읽게 된 이유는 수업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적어도 이 정도 교직 생활을 했다면 나만의 수업 전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법 오랜 교직 생활을 하고 있는 만큼 나만의 수업 기술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수업 기술 향상에 초점을 두었다. 실제 수업 장면을 전사한 글을 보면서 발문 하는 연습을 하고 동기 유발을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도 꼼꼼히 익혔다.
서근원 교수의 ‘수업을 왜 하지’라는 책도 같은 맥락에서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수업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왜 하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처음 만나는 질문이다. 수업에 대한 교수법을 알려고 노력은 했지만, 수업을 왜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없었다.
간혹 '사람은 왜 사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답을 구할 때가 있다. 삶이 팍팍하고 보잘 것 없을 때 이런 문제에 다다른다. 내가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 등 답을 찾기 위해 고민을 한다. 그것은 삶에 대한 목적을 찾는 것이 된다. 결국 정답도 없다. 끊임없는 자문(自問)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수업을 왜 하지’라는 질문도 비슷한 데가 있다. 무엇을 위해 수업을 하는가, 어떻게 수업을 하는가 등은 수업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다. 그것은 의미 있는 수업에 대한 탐구 과정이다. 우리는 수업에 대한 목표는 자주 이야기했지만 목적은 없었다. 이것은 수업의 목적을 묻는 질문이다.
교사는 수업 방법의 전문가 이전에 교과를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 주고 있다. (중략)
교사가 수업 방법의 전문가임을 자처하고, 수업 방법이나 각종 수업 교구와 교재를 개발하는 데만 전념할 경우에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 등의 질문을 소홀히 할 염려가 있다. 유은선 교사는 그 자신이 수학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함으로써,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보다 중요한 것은 연산 기능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사가 교과를 충실히 이해하고자 할 때 수업을 통해서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 자신이 먼저 성장할 수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P. 163).
사실 우리는 수업 자체에 대한 물음은 접어 두고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가르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사 대상의 연수도 거의 여기에 몰입한다. 이런 교수 방법은 결국은 학생의 입장을 소홀히 한다. 수업의 질도 오직 교사의 활동으로만 밀고 가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는 학생 개인의 능력에 대한 고찰이 미미하다. 지식 전달을 하고 그것을 다시 평가로 확인하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교사의 성장은 있지만 학생의 성장은 간과된다.
학생들에게 교과서의 지식들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이 학습 내용을 얼마나 수용했느냐가 수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업은 교사에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두어야 한다. 학생이 성장하는 경험의 산물이 수업이어야 한다. 특히 학생들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수업도 그런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교사와 학생이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업 시간에 학생이 살아 움직이는 배움이 있어야 한다.
교사의 교수 방법 개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학교가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그대로 둔 채 미시적인 해결책만을 강구하고 그 해결책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교사에게 선구자적인 희생만을 요구하는 것이다(p. 66).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가장 먼저 ‘학급당 정원의 감축(p. 68)’과 같은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교사가 주어진 정답을 따라가는 수업이 아니라, 각자가 해답을 찾아가는 수업을 해야 한다. 교사들이 가가자 자신의 해답을 찾아간다면 교과와 교육과정, 아이들과 학교가 처한 여건 등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그 이해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할 것이다. 거기에는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교사가 점점 더 세상을 교육의 눈으로 이해하고, 내면이 성장하며, 세상의 모든 것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교과를 배우는 것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가 그의 수업과 삶에서 먼저 배어나기를 바란다(pp. 32~33).
교사가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구조적인 동기유발을 하고, 적절한 시점에 발문을 하고, 시청각 기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고 하자. 여기에 더 나아가 학습 모형을 통한 수업이 매끄럽게 진행될 때 과연 좋은 수업이 이루어진 것일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좋은 수업이라는 것이 과연 좋은 수업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점검을 해야 한다. 좋은 수업은 구조적인 문제 점검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교사로 하여금 자신의 수업에서 당면한 문제를 소홀히 하고 수업 방법에만 얽매이도록 한다. 학생들도 교과 내용을 주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교과와 교사로부터 소외되는 일뿐이 없다.
이제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교과서의 지식들을 전달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어떻게 가르치는 것인가에 맞춰야 한다. 최근 배움중심 수업의 실천은 이를 뒷받침한다. 배움중심 수업에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개인 차이를 고려한 학습 지도이다. 한 학급 안에 학습 수준과 속도가 서로 다른 아이가 함께 모여 있으며, 교사는 각각의 학생을 배려하는 수업을 해야 한다. 이러한 고려 하에 배움이 일어나도록 학습하는 것이 최근 시대의 교수법이다. 교사는 학생들의 말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학생들이 지금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교사의 가르침은 세상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삶의 방향과 실천의 동력까지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인간적 관계를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교사는 수업 방법의 전문가 이전에 교과를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학생은 교사의 설명을 수동적으로 저장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의미를 능동적으로 이해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매일 똑같은 생활 속에서 습관처럼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을 볼 때 교사에게 수업도 그리되기 쉽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은 예술적이며 창의적인 행위다.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매 순간 조심스럽고 불안하다. 이러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더 채찍질해야 한다. 그리고 늘 새로움으로 충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사라는 숙명의 길을 가면서 몸과 마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수업은 겉으로는 학생이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교사가 함께 성장한다. 수업이 다소 힘에 부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점검하고, 그 한계를 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수업을 왜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