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또 다가왔다. 하지만 옛날의 그 설레는 추석은 퇴색하였다. 객지에 나가 있던 가족들이 모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껏 받던 추석. 가족들의 따뜻한 정을 오붓하게 느껴보던 추석 명절이 그리워진다.
고향집은 텅 비워둔 채로 모두모두 고향 떠나 객지에 살고, 집안 어른들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시니 우리 집 명절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즐거운 추석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우리 고유의 명절만큼은 한결같이 아름답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추석 무렵의 햇살
천지에 가득한 저 햇살이
모두모두 태양이 골고루 뿌려주는 선물이어서
우리는 항상 태양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린애처럼 그 햇살 아래 마냥 기쁘게 살고 있다
아침햇살은 찬란하게
온 세상을 희망과 설렘으로 맞게 하고
저녁햇살은 조용히 하루 일을 축복하며
평화와 휴식을 마련하여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햇살은
우리들의 마음을 잘 알고 달래 주는 것이다
내일 모레가 추석
밖에는 지금 밝고 고운 금빛 햇살이 지천으로 내려와
명절 분위기를 한껏 북돋워 주고 있다
- 필자의 졸시 전문-
나는 대도시에 살고 있지만 고향은 전형적인 농촌이다. 나는 대가족제도 아래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큰댁과 이웃하며 한 가족처럼 살았다. 추석이나 설날이 오면 신바람이 났다. 객지에 나가 있던 가족들 기다리던 일, 작은형과 함께 수북수북 밤을 따던 일, 마을 앞엔 황금물결, 부엌과 대청에서 음식 만드느라 분주하던 큰어머니 어머니 누이들 모습.
이런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촌형들이 일터를 찾아 떠나고 사촌누님들이 결혼하면서 고향은 비어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울 큰형댁으로 차례를 옮기면서 고향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고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부렵다. 아무리 교통체증이 심하더라도 그 끝엔 옛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향이 있지 않은가. 부모님이 계시고 어릴 적 뛰어놀던 골목이 그대로 있는 고향, 저만치 내가 다닌 초등학교가 옛모습 그대로 나를 반기고 있다.
논밭에서 부모님 농삿일을 도와드리며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던 날이 아련하다. 그때 나는 어떤 꿈을 꾸었던가. 세월이 흘러 그 꿈에 조금이라도 근접해 있는 건지. 고향은 바로 내가 무의식적으로 꿈꾸던 천국의 모습을 닮아 있다. 고향은 내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통로다. 객지에 아무리 오래 산들 어찌 고향을 아주 잊기야 하겠는가.
작은형
작은형이 죽고 나는 울지 않았다
같이 자란 형을 생각하면 울음이 터져야 마땅한데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 울지 않았다
어느새 나도 죽음에 많이 익숙해진 것인가
나를 데리고 장어구이집으로 들어가던 형
뙤약볕 아래 같이 콩을 거두던 형
시라도 한 편 지어 바쳐야 하는데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도 그냥 담담할 뿐이다
어머니 적에도 그랬다
8월에 어머니 돌아가셨는데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반 년이 지난 한 겨울
화산처럼 터져 나온 통곡에
같이 술 먹던 동료들이 기겁을 했었다
추석이면 함께 밤을 따던 형
어릴 적 나의 든든한 빽이었던 형
같이 감자를 캐고 보리타작을 하던 작은 형
언제 형 생각에 눈물을 쏟아낼지, 그 때가 언제일지
혼자 밤을 따는 추석무렵일지
술 생각 나는 눈내리는 저녁일지
왈칵 형 생각에 목이 메일 때가 언제일지
-필자의 졸시 전문-
고향과 가족이 항상 평화롭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가난 속에서 함께 자라며 남다른 우애를 쌓았던 형제자매들이 부모의 재산을 놓고 심한 갈등을 빚고 재판정을 오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옛날 함께 자랄 때 서로 위해주고 감싸주던 그 따뜻한 정은 다 어디로 가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결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누누이 사랑과 화목을 외치지만 인간의 내면엔 이렇듯 탐욕과 어리석음이 가득하다. 차라리 물려줄 재산 한 푼 없는 부모가 더 좋을 듯 싶다. 물욕이 앞을 가리면 효심도 우애도 다 소용 없다. 형제자매는 물리쳐야 할 적이 되고 부모님은 효도해야 할 소중한 어버이가 아니라 그저 한 무더기 재물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재벌가의 싸움에서부터 땅 몇 뙈기 놓고 벌이는 형제들 간 다툼에 이르기까지 가정불화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아무리 황금만능 시대라 해도 인간사회 기본 질서는 보전되어야 한다. 가치전도 현상이 아무리 심해도 사회를 떠받치는 기본 가치체계는 확립되어야 한다.
사랑, 평화, 생명, 효도, 우애 등 모든 상위 가치가 물질이라는 하위 가치에 능욕당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소중한 가치들을 내팽개치고 오로지 물질을 놓고 벌이는 진흙탕 싸움에 세상은 점점 살벌해지고 있다. 형제자매를 등지고 재산을 조금 더 차지한다면 어떤 행복이 따라올 것인가. 천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광규 시인의 시 한 편 소개한다.
유산 상속의 노래
제각기 이 세상에 태어나
제 나름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입장료를 내고
오후 7시에
세종문화회관에
모인다 무대 위에
체구와 음성과 분장과 의상이 다른
네 사람의 남녀가 등장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딸은 아버지를 잃어서 슬퍼하고
아들은 재산이 생겨서 기뻐하고
사위는 장자상속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며느리는 보석상에 진 빚을 갚아달라고 호소한다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제 나름대로 절박한 사연을
노래하는 이 장면은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별로 아름답게 보이지 않고
1980년대의
서울과
전혀 다른데
오랫동안 박수가 나올만큼
감동적인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김광규 시 전문-
1986년에 나온 김광규 시인의 시집 '크낙산의 마음'에서 발췌했다. 오래 전 시다. 연극이나 뮤지칼의 내용을 시의 형식을 빌려 간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요새 시인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시를 쓴다면 훨씬 더 살벌하고 험악한 시어들이 동원되지 않을까.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내 형제들간에도 이런 문제로 집안이 시끄럽고 형제지간에 금세 냉기류가 흐를 수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 장자 상속을 주장한다든가, 대를 잇는다는 명목을 내세우거나, 출가외인을 들먹이거나 모두 낡은 사고방식이다.
부모를 모셨다고 내세우는 것도 속보이는 일이다. 형편에 따라 노부모를 모실 수도 있는 것이지 꼭 그것을 재산을 물려받는 조건으로 내세우거나 증거자료로 삼는다면 진의가 의심스럽다. 이번 추석은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모두 평화롭고 화목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