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책상 위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 위에 찍힌 낯선 전화번호가 그다지 반갑지가 않아 통화버튼 누르기를 망설였다. 그런데 잠깐 울리다 꺼질 줄만 알았던 전화벨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순간 주위 선생님께 방해된다는 생각에 얼른 버튼을 눌렀다.
졸업한 지 십 년이 훨씬 지난 제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언제부턴가 오랫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제자로부터 전화가 걸러올 때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멘트가 있다.
“그래, 너구나. 그간 잘 지냈니? 직장은? 결혼은?” “선생님, 오늘 저녁 시간 있으세요? 찾아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녁 일정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교무실에 다다르자 복도에 한 건장한 청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조금 전 통화했던 제자 ○○○였다. 제자는 교무실로 걸어오고 있는 나를 보자 반가움에 달려와 인사를 했다. 제자의 얼굴은 예전보다 살이 조금 빠지기는 했으나 학창시절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지금 펜션을 운영하고 있으며 미혼이라고 말했다. 제자는 나를 기다리는 동안 학교를 둘러보면서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느낀 감회를 말했다.
“선생님, 학교가 많이 좋아졌어요.” “그럼, 네가 졸업한 지 십 년이 훨씬 지났는데…”
제자는 고등학교 졸업 후 지내 온 생활과 앞으로의 계획을 잠깐 이야기한 뒤, 오늘 학교를 방문한 이유를 말했다.
최근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해 동기 중 한 명이 카페를 만들었다며 3학년 때 담임인 나도 그 카페에 가입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제자는 그 카페에 올릴 모교 관련 사진과 선생님과의 인증 샷을 찍으러 왔다고 했다. 이제 서른 후반의 제자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우정을 나누기 위해 카페를 만들었다는 제자의 말에 환영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잠시 뒤, 제자는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듯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온 진짜 이유를 말했다.
“선생님, 이런 부탁을 해도 될지…” “그래, 무슨 부탁인데.”
그러자 제자는 부탁 내용을 말하기보다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 ○○라는 제자 아세요? 고3때 담임이 선생님이라고 하던데….” “그럼, 잘 알지. 그런데 왜?” “○○가 제 친동생이에요.” “그렇다고? 그 사실을 몰랐구나.” “제 동생이 고3때 담임인 선생님을 존경한다며 8월 말 결혼식 때 선생님께서 주례를 봐줄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어요.” “주례를?”
주례를 봐달라는 제자의 말에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천명을 갓 넘은 내가 주례를 선다는 것 자체가 선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동생을 대신해 주례 부탁을 하러 온 제자의 부탁이 너무 완강해 단호하게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선생님, 부담 갖지 마시고 제 동생을 위해 주례 한번 서 주시죠. 동생 또한 선생님께서 주례를 서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아직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이 다소 남아 있는 터라 나 아닌 또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주례를 서 줄 사람을 도저히 찾지 못했을 때 생각해 보겠노라고 대답했다. 제자는 동생의 주례를 꼭 봐 달라고 부탁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난 뒤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제자와 헤어지고 난 뒤, 지나간 내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은 왜일까? 무엇보다 나 자신이 제자의 주례를 서 줄 만큼 훌륭한 선생님인지 주례사로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등 제자가 내게 큰 숙제를 던져준 것 같아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사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주례사를 많이 들어본 적은 있으나 내가 직접 주례사를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직 나이도 그렇고 연륜도 되지 않기에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제자가 던져준 과제로 지나온 내 삶을 한 번 더 뒤돌아 볼 수가 있는 계기가 됐으며, 그 과제를 당당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참 스승의 길을 갈 것을 다짐해 본다. 그리고 제자가 살아가면서 마음에 새길 멋진 주례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