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간다.
신갈나무 숲에서는 우수수 바람에 황금빛 잎사귀가 쏟아진다. 화려한 금은보화처럼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잎들이 바람에 날린다.
지난 주 만들었던 국화차를 꺼냈다.작고 동글동글한 감국들을 뜨거운 물에 담구었다. 노오란 꽃들은 배시시 짙은 향내를 풍기며 꽃잎들을 다시 피운다. 사르르 풀리는 작은 꽃잎들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환한 감국 송이는 시간의 교차점에서 다시 꽃을 피우나보다. 경계에 꽃이 핀다는 말이 생각난다. 모든 것은 경계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노자 도덕경을 지난 여름 읽으리라 하다 놓여버렸다. 깊어진 가을, 나는 노자를 만나리라 결심하고 최진석 교수의 책을 읽어나간다.
첫장,
도가 말해 질 수 있으면 도가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다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같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구나.
道可道也, 非恒道也. 名可名也, 非恒名也. 无名, 萬物之始也. 有名, 萬物之母也. 故恒无欲也, 以觀其妙. 恒有欲也, 以觀其所皦. 兩者同出, 異名同謂, 玄之又玄, 衆妙之門
사물을 정의내리면 그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최진석 교수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 이라고 개념화 했을 때 이것은 사랑 혹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개념화의 작업은 오히려 사랑이라는 이름을 눈물의 씨앗이라는 한정된 의미에 가두는 일로서, 이는 사랑을 오히려 제한하고 죽이는 것이라 한다.
인문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 말하는 최진석 교수의 살뜰한 해석을 짚어가며 이 가을 국화차와 도덕경을 함께 할 것이다.
행복한 가을을 보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