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이다. 얼마전까지 드문드문 보이던 보리밭이 모두 사라지고, 논들은 모심기가 한창이다. 마늘뽑기가 아직 덜 끝난 논이 있기는 하지만 모심기로 논에 물을 실어 찰랑찰랑 하다. 밤꽃은 그 절정을 향해 산언저리부터 뭉게뭉게 피어난다. 뜨거운 햇살 아래 새로 심은 모들이 데워진 논물 위로 힘을 돋우고 있다. 이 어린 모는 뜨거운 유월과 칠월의 여름 동안 젊은 벼포기로 자라날 것이다. 잠자리떼와 눈을 맞추고 개구리 울음을 들으며 그 젊음을 태우고 바람과 비를 맞으며 성장하여 화려한 가을을 기다릴 것이다. 참 고맙고 어여쁜 존재이다. 학교 앞에 심어진 어린 모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세상의 풀로 태어났지만 그 곡식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이것 또한 얼머나 근사한 일인가? 어여쁜 꽃이 행복한 미소를 준다면, 한 그릇의 밥은 포만한 행복을 선물한다. 그만한 일이 또 있을까? 나도 다음 생에는 푸른 벼포기가 되어 칠월의 소나기에 내 몸을 온전히 맡기고 가을이면 내몸으로 살신성인하는 그런 삶을 꿈꾸어 볼까?
남편이 밤낚시를 준비하 있었다. 고맙고 반갑고 즐거웠다.(?) 조정래의 [정글만리]를 읽어야 하는데 출장과 연수가 많아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황금같은 금요일과 토요일을 온통 책과 함께 할 기회가 온 것이다.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햄버그를 시켜주고 정글만리 첫장을 시작하였다. 다음 날 아침 햇살 속에서 세 권을 모두 끝내었다. 모처럼 밤을 새워 읽었다. 구성이 어렵고 치밀하지 않아, 책장이 잘 넘어갔다. 흥미진진한 중국의 경제 전쟁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애국심이 확 살아나기도 하는 즐거운 책읽기였다. 정글만리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 속에서 종합상사원인 전대광을 중심으로 경제 전쟁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우리들이 중국을 너무 모른다는 작가의 말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고 마치 한 편의 경제 르포기사를 보는 듯하였다. 지난 날 태백산맥의 치밀한 구성을 생각하고 접근한 사람은 실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책을 보는 내내 하였다. 그래서인지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려버리는 소설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이 뭐니뭐니 해도 칸시이다. 한국에서 줄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 중국 경제를 움직이는 엄청난 존재인 것이다. 한국이라고 해서 이런 것이 없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고등학교 시절 심취하였던 헤세의 대표작이다. 헤세의 소설을 읽으면 어디선가 마른 풀과 들꽃 향기가 나는 듯하다. 여행을 하다 낯선 길에서 만난 들꽃과 마른 풀이 가득 쌓인 헛간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듯 그렇게 다가온다. 지성으로 대변되는 인물인 나르치스와 감성형 인간인 골드문트 두 인물의 성장소설로 볼 수 있다. 나르치스는 수도사의 길을 택하여 오직 학문의 길을 정진하는 것이 신의 섭리이고 자신의 소명으로 느끼며 사는 이성적 인물이다. 그에 비해 집시의 피를 타고난 정숙하지 못한 어머니의 기억을 지우도록 교육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수도사의 길로 나아가기로 되었던 골드문트는 금기의 대상이었던 어머니를 나르치스가 일깨우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결국 어머니의 세계에 속한 골드문트 수많은 여인들을 만나 사랑하고 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쁨을 얻는다. 예술가로 아름다운 작품을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사랑을 쫓아가다 마지막 삶을 마친다. 지성으로 충만한 나르치스에게 골드문트와의 만남과 사랑은 신의 축복 같은 존재이며, 골드문트에게 나르치스는 영혼의 스승이며 인도자이자 안식처이다. 두 사람의 모습은 동전의 양면 같지
갑오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는 새롭다는 말로서 시작한다. 새롭게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로 뜨는 해를 맞이하고 새마음으로 출근을 한다. 새해와 묵은 해의 경계는 무엇일까? 새털처럼 많은 날들 중에서 하나일 뿐이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면 새롭고 다른 해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경계가 있다. 삼각형이든지 사각형, 오각형의 도형부터 학교와 학원 모두 출발과 졸업이라는 경계를 가지고 있다. 선을 넘어서면 이제는 다른 세상인 것이다. 지난 해부터 끝없이 '경계'라는 말을 생각해 왔다. 그 전부터 이 말이 있었겠지만, 유난히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것은 내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기여서 일 것이다. 올해 나는 지천명에 접어든다. 불혹을 지나 지천명이라는 새로운 경계를 시작하며 많은 것을 허물 수 있으리라. 여자로서의 삶보다는 인간으로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되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같은 청춘에서 한 걸음 벗어나 보다 깊은 영혼을 들여다보고 공부를 하는 삶이고 싶다. 자연의 일부로서 내가 이 대지와 호흡하고 싶다. 철학책을 진지하게 읽으며 밤을 새우고 싶다. 욕망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지고 싶은 것은 가지고 싶다고 말하
소설이 지났습니다. 이십 사 절기 중 스무 번째 해당하는 절기입니다. 이날 첫눈이 내린다고 하여 소설(小雪)이라고 합니다. 강마을에는 눈은 내리지 안았지만, 추위가 제법 세찹니다. 추수가 끝난 들에는 커다랗고 둥근 짚덩이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습니다. 이 절기 무렵의 농촌은 이미 농사철은 지났지만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위한 잔일이 남습니다.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기도 하여 겨우살이 준비를 합니다.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대학 은사님의 블로그에 들어갔더니, 소상팔경 관련 학술세미나 소개가 있었습니다. '소상강'은 고전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어서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소상이란 중국 남부 호남성과 동정호의 남쪽 영릉부근, 즉 소수와 상수가 만나는 곳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말한다고 합니다. 소상 팔경은 다음과 같다고 하네요. 1. 산시청람 (山市晴嵐) - 봄 기운에 싸인 산촌풍경 (山市는 날 개여 부는 바람) (山市淸風) 2. 연사만종 (煙寺晩鐘) - 해 질 녘 山寺의 종소리 (먼 절의 저녁 종소리)煙寺暮鐘) 3. 어촌석조 (漁村夕照) - 어촌에 깃드는 석양 (어촌에 저녁 해) (漁村落照) 4.
하얀 서리가 켜켜 내린 강마을의 아침은 싸아하니 춥습니다. 화살나무, 꽝꽝나무, 편백나무 모두 얼음테를 두르고 있습니다. 은빛 보석으로 치장한 듯 차갑게 아름답습니다. 차고 아름다운 것이 세상을 감싼 아침, 긴 스카프 자락을 휘날리며 떠나는 가을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네는 베이지색 더블프렌치코트를 입고 오렌지색의 실크 스카프를 하고 있네요. 긴머릿채를 풀어헤쳤고요. 굽 높은 갈색 구두를 신었습니다. 보랏빛 여행케이스를 끌고 한 손에는 들꽃부케를 장식하듯 들고 있습니다. 커다란 눈은 우수에 젖어 있고 웃음 소리가 시냇물처럼 상쾌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적인 여인입니다. 그녀의 계절은 풍성하고 화려합니다. 들에는 많은 곡식들이 익어가고 과수원에서 붉은 능금을 수확합니다. 고운 단풍 든 산과 살진 숭어가 돌아오는 계절입니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합니다. 아름답고 부유한 그녀 곁에 오래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아주 잠시 왔다가 갑니다. 아쉽고 서럽게 왔다가 떠납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그녀에게 열광할까요? 가을은 겨울의 시작이고 지난 여름의 그림자입니다. 지난 여름 뜨겁게 내리쬐던 햇살 아래 밭을 매던
꽃향유는 가을꽃답게 서늘하다. 보랏빛 꽃이 피어있는 모습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꽃향유를 따기 위해 산을 두 번 올랐다. 지금쯤 꽃향유가 피었을 것이라 하여 가위를 챙겨 가니 봉우리가 부풀어 있었다. 보랏빛 꽃이 없는 산에서 여뀌꽃을 몇 가지 꺾어 왔었다. 다시 두 주일이 지나 꽃향유를 만나러 나선 길은 참 맑고 고운 날이었다. 길섶마다 보랏빛 꽃향유가 피어 서늘한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하였다. 지퍼백에 꺾어담은 꽃향유를 두꺼운 백과사전 갈피에 넣어두고 그 위에 인명사전으로 눌러두었다. 그리고 다시 두 주일을 기다렸다. 이렇게 만난 꽃향유를 예전에 알던 분께 보내드렸다. 나에게 가장 먼저 잡지 칼럼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분이었는데 그 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하였다. 강마을의 소식을 담아 엽서를 썼다. 서늘한 바람같은 꽃향유와 함께.
주말이면 무학산을 오른다. 산자락에 집이 있음에 누리는 호사이다. 황갈색 상수리나무와 신발에 깔아도 될 듯 커다란 신갈나무를 만나고, 청설모, 다람쥐, 작은 새와 인사를 한다. 여유가 되면 무학산 주봉에 오르지만, 바쁜 날에는 무곡탑 약수터까지 가거나 학봉엘 오른다. 낙엽 밟는 소리, 눅눅한 낙엽냄새, 어제와 다른 풀들의 모습까지 착하고 예쁘다. 그리고 야생화가 한창일 무렵이면 작은 가위를 가지고 올라 몇 가지의 꽃을 얻어 온다.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며 수북하고 많은 곳에서 몇 가지를 잘라 와서는 누른 꽃을 만들어 그리운 벗들에게 계절인사를 한다. 몇 주 전 산엘 오르다 작고 여린 고사리 잎을 몇 가지 얻어왔다. 책갈피에 말렸는데 참 예쁘다.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보이는 잎사귀가 싱그럽다. 솜털 보송한 가지도 사랑스럽다. 가을이면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새잎을 파랗게 올린 고사리, 회춘한 듯 그렇게 가을엽서를 쓴다.
가을이 깊어진 강마을은 점점 비어간다. 추수한 들판에 희고 고운 서리가 내렸다. 우수수 노란 은행잎이 건드리지 않아도 떨어져내린다. 붉은 화살나무 잎도 꽃잎처럼 바람에 날리고 그 사이로 작은 벌레의 주검이 보인다. 비어 있다는 것은 다시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비어 있는 공간, 비어있는 마음, 비어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화장대에 바르지 않는 립스틱이 있고, 들지 않는 가방들이 있고, 쓰지 않은 수첩들이 몇 개나 있고, 보내지 않은 편지지 뭉치가 발견된다. 일 년에 몇 번 사용할 지 모르지만 꼭 필요해 보여 샀던 전기오븐, 야쿠르트 만드는 것, 쥬스기, 커피를 내리는 기계, 작은 찜질기.... 옷장을 열어보면 더 많은 옷들이 걸려 있다. 일년에 한번도 입지 않는 코트, 스카프, 머플러. 그리고 서랍을 열어보면 옥색 개구리 모양의 반지, 팔찌, 목걸이가 수북하다. 이렇게 많은 물건들을 내 옆에다 가두어 두고 나는 계속 내 삶을 비워가리라 하면서 노자 도덕경을 읽는다.이렇게 채우지 못해 안달하는내가 부끄럽고 미안하고 한심하다. 눈부신 황금비가 내리는 신갈나무 숲이 보인다. 우수수 바람에 고운 잎을 날리
가을이 깊어간다. 신갈나무 숲에서는 우수수 바람에 황금빛 잎사귀가 쏟아진다. 화려한 금은보화처럼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잎들이 바람에 날린다. 지난 주 만들었던 국화차를 꺼냈다.작고 동글동글한 감국들을 뜨거운 물에 담구었다. 노오란 꽃들은 배시시 짙은 향내를 풍기며 꽃잎들을 다시 피운다. 사르르 풀리는 작은 꽃잎들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환한 감국 송이는 시간의 교차점에서 다시 꽃을 피우나보다. 경계에 꽃이 핀다는 말이 생각난다. 모든 것은 경계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노자 도덕경을 지난 여름 읽으리라 하다 놓여버렸다. 깊어진 가을, 나는 노자를 만나리라 결심하고 최진석 교수의 책을 읽어나간다. 첫장, 도가 말해 질 수 있으면 도가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다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같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구나. 道可道也, 非恒
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다. 도시에는 국화축제에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찻집의 창가에도 작은 국화화분이 놓여 있다. 들판에는 그야말로 국화천지이다. 노오란 감국과 산국, 연보랏빛 쑥부쟁이, 흰 구절초 모두 들국화로 총칭된다. 며칠 전 낚시를 다녀온 아이 아빠가 들국화가 많이 피었다고 소식을 전하며 올해는 국화차를 만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몇 년 전 출장을 다녀오면서 감국을 한 아름 꺾어 와서 꽃을 하나하나 따서 국화차를 만들었다. 어린 두 아들이 옆에서 재잘거리며 같이 꽃을 땄었는데 그 때는 거들어주지도 않고 쳐다보기만 하였다. 두 아이들이 반항의 불꽃을 휘감는 사춘기에 접어들 때까지 국화차를 만들지 않았었다. 여행길에 노오란 감국을 만나면 그냥 지나가는 말로 " 아, 국화차를 만들면 참 좋겠다." 혼잣말을 하곤 했다. 남편이 스스로 국화차를 만들지 않느냐고 묻기에 "깨끗한 곳에 많이 핀 들국화가 보이면 좀 꺾어주세요." 라고 부탁하면서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제 퇴근을 하여 아파트 문을 여니 싸아한 국화향기가 먼저 나를 맞이하였다. 일부러 들국화를 꺾으러 다녀왔다고 하길래 보니, 베란다에 가득히 국화꽃 무더기가 보였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본격적으로 국화차
강마을의 들은 절반쯤 비어 있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들 풍경은 조각보의 다양한 색감처럼 그렇게 변화무쌍하다. 가을이면 서늘한 들꽃이 핀다. 진보라의 꽃향유와 연보라의 여뀌꽃 그리고 오이풀이 산야를 장식한다. 쑥부쟁이와 흰 구절초. 여뀌꽃으로 압화엽서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가을소식을 전했다. 행복한 가을되기를 기원한다.
다진 박순형님께서 보내주신 수필평론집 [수필로 세상읽기]를 읽었다. 좋은 수필에 날개를 달아주시는 것이리라. 좋은 평론, 그리고 좋은 수필들을 읽으며 좋은 수필을 쓰리라 다짐을 한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엽서를 한 장 썼다. 여름철 무성한 강아지풀의 모습처럼 푸른 마음으로 좋은 평론을 쓰시기를 기원한다.
중복을 지난 강마을은 여전히 뜨겁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방과후학교를 시작하니,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바쁘다. 학교 옆 푸른 논에는 뜨거운 논물에 모들이 자라고, 수로 옆 언저리마다 점박이 참나리꽃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왕원추리는 이제 끝물이어서 몇 개 보이지 않는다. 중간중간 붉은 칸나가 축대옆에 꽃송이가 부풀어 있다. 우리 학교 주위에는 연밭이 없지만, 칠원 지역으로 조금 나가면 논에 심어놓은 연꽃이 많이 보인다. 넓고 푸른 연잎과 군자같은 연꽃이 참 시원하다. 여름철 잘 어울리는 꽃이다. 더위를 식히려 계속 연꽃을 엽서에 그려 벗과 지인들에게 보낸다. 나의 여름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