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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6월을 보내며 당신들의 희생을 기억하겠습니다

6월은 호국의 달이다. 우리가 현재의 평화로운 삶를 누릴 수 있는 것은 6.25 전쟁이 있었지만 패하지 않고  나라를 지킨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후세들은 이같은 사실을 대부분 잘 모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최근에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6.25 전쟁이 일어나자 군번도 계급도 없이 나라를 지킨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동키'라는 무명유격대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에겐 공산군에게 빼앗긴 고향과 조국을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낙하산을 타기도 했고 유엔군 전투기 조종사를 구하기도 했다. 치열한 전투는 예사였다. 이름 대신 ‘동키’ ‘켈로’ ‘울팩’ 등으로 불렸다. 무명용사 유격대원. 존재조차 몰랐던 그들은 다름 아닌 기독교이 많았다. 6·25 전쟁 당시 비정규전을 수행했던 이북 출신 유격대원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 전쟁 발발 64년 만에 확인됐다.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는 27일 “선친이 속해있던 동키4부대의 경우 70%가 크리스천이었다”며 “그들은 고향과 땅을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신앙적 박해 때문에 유격대를 조직해 싸웠다”고 말했다. 최 목사의 선친은 최희화 동키4부대(백호부대) 독립대대장으로 지난해 그의 혁혁한 공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유격대원들의 존재도 드러났다.

동키4부대는 황해도 장연군 출신 반공청년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청년들은 북한이 남침한 이후 인민군들의 악행이 끊이질 않자 1950년 10월 최희화 대대장과 청년 26명이 향토 치안과 주민 보호를 위해 민간 유격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이듬해 2월 미군 산하 레오파드 작전기지인 백령도에서 미 육군 중령 버크 휘하의 부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51년 3월 6일 미 극동군사령부가 8240부대를 창설, 여러 개의 유격부대를 통합하면서 동키4부대로 명명됐다.

동키4부대원들은 월내도에 주둔하면서 몽금포 개성촌 전투, 후남면 기습작전에서 전과를 올렸고 51년 9월에는 월내도 남방 500m 해상에 추락한 영국군 전투기 조종사를 구출하기도 했다. 최 목사는 “동키부대는 북한 공산군으로부터 서해 5도와 NLL 이북 16개도를 철통수비하며 북한의 해상 전력을 완전 봉쇄했다”며 “이들 무명용사들은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조국을 지켰다”고 말했다.

소망교회 원로인 곽선희(81) 목사도 동키부대 출신이라고 한다. 곽 목사는 지난 26일 “나는 6·25 당시 동키5 부대원으로 복무했다”며 “당시 동키부대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거나 교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는 “황해도가 복음화율이 높았던 탓에 공산군의 박해가 매우 심했다”며 “박해를 받은 기독교인 청년들이 유격대를 조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키5부대는 이후 울팩부대라는 이름으로 분화돼 강화도 전선을 맡았다. 곽 목사는 만 20세에 동키부대에 들어가 정전과 함께 전역했다. 그의 군번 ‘0783811’은 제대해서야 부여받았다. 곽 목사의 고향은 황해도 장연군 용현면 석교리다. 그는 ‘석교돌다리’라는 이름의 교회를 다녔다고 했다.

동키15부대 역시 기독교인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타부대가 황해도 출신이 절대 다수라면 동키15부대는 평북 정주 출신으로만 구성됐다. 상당수가 오산학교 학생들이었다고 전우회장인 최성룡(64)씨가 밝혔다. 최씨의 부친은 최원모(1910년생)씨로 유격대 활동을 펼치다 제대했다. 이후 1967년 연평도 인근에서 선원과 함께 납북돼 동키부대원으로 활동했던 사실이 알려져 1970년 북한으로부터 처형당했다. 최씨는 지난해 납북자로는 최초로 전공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내달 11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첫 봉안된다. 최 회장은 “당시 동키부대 중 15부대 인원이 가장 많았다고 들었다”며 “오산학교 출신이 많아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키부대는 ‘당나귀(donkey)’란 이름에서 땄다. 무전기에 필요한 발전기 모양이 당나귀와 닮았다고 해서 붙였다고 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 따르면 8240부대 산하에는 20여개의 동키부대가 존재했다. 부대원들은 고공 침투, 국지전 수행, 첩보 활동 등 이른바 ‘특수전’을 펼쳐 오늘날 특수전사령부의 모태가 됐다. 부대원 대다수가 황해도 출신이었다. 8240부대에는 첩보활동을 담당했던 ‘켈로(KLO)’부대도 포함돼있다.

동키부대는 당시 서해안 옹진반도 서부 및 북부에서 압록강 하구까지가 작전지역이었다. 이들은 서해5도와 황해도 등에서 기습공격과 첩보활동으로 북한의 해상 전력을 봉쇄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2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부대원들은 군번이나 계급도 없는 데다 참전 사실 자체도 인정받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특수전사령부 공보참모 임병환 대령은 “비정규 유격대로 활동한 탓에 공로가 알려져 있지 않다”며 “생존한 대원들 중엔 각종 노인 질환과 경제적 궁핍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황해도 지방은 한국 개신교의 요람으로 불렸다.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가 황해도 해안 지방 선교를 나섰고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 순교에 앞서 1865년 9월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에 도착해 두 달여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한문성경(마태복음)을 주민에게 전했다. 1884년에는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한국 개신교 최초의 소래교회(황해도 장연군)가 설립됐다.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는 평양노회와 함께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강했다. 민경배(80) 백석대 석좌교수는 “황해도와 평안도 장로교인은 전국의 모든 교파를 합한 교인수의 3분의2에 달했다”며 “황해도와 평안도 교회가 한국교회를 주도했다”고 말했다.

황해도 교회는 1919년까지 성장을 거듭했고 일제에 항거한 민족주의 기독교인들의 집회도 활발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교회사가들은 이 같은 민족주의적 기독교인들이 공산군이 침입하자 맞서 싸우기 위해 전쟁 초기에 자생 유격대를 조직해 활동했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동키4부대 전우회 민병렬 회장에 따르면 당시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엔 2개의 교회가 있었다. 동부교회와 서부교회로 동부교회는 4층 목조건물로 지어진 ‘대형교회’였다. 동부교회가 부흥하자 서부교회를 세웠다.

동부교회는 정일산 목사가 담임했으며 전쟁 통에 순교했다. 민경배 석좌교수는 이 교회를 다녔다. 서부교회는 박경구 목사가 맡고 있었다. 박 목사는 공산당에 저항하다 6·25 당일 순교했는데 그의 집안은 5대에 걸쳐 목회자를 배출한 걸로 유명하다. 박 목사의 삼촌은 1913년 중국 산동성에 파송됐던 박태로 선교사였으며 아들은 장로회신학대 총장을 지낸 박창환(91) 목사다. 손자와 증손자도 목회자로 활동 중이다.

최일도 목사는 “반공유격대 3분의 2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며 “작전상 비밀유지와 사료 부족으로 존재조차 알 길 없는 그들에게 이제라도 교회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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