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든 지나고 나면 다 추억과 낭만이 된다. 수많은 사연과 애환을 담은 기차.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던 기차역. 기차여행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칙칙폭폭' 수증기를 내뿜거나 '삐익~' 기적소리를 울리지 않으면 어떤가. 학창시절 기차통학을 경험했던 나에게는 그 자체가 '추억과 낭만 찾기'이다.
9월 20일, 사진을 사랑하는 설레임 회원 8명이 고창의 선운사, 담양의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 길을 둘러보는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은 피사체를 보면 들떠 두근거리듯 늘 마음으로 정을 주고받는 회원들이 함께 하여 더 즐거웠다.
아침 6시 40분 청주시립정보도서관에 모여 자가용 두 대에 나눠 타고 청주국제공항 가는 길에 있는 청원구 외남동의 오근장역으로 갔다. 이른 시간이지만 역사 안은 관광열차를 타고 여행 떠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선선한 바람이 살랑대는 맑은 날씨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행복이 느껴진다.
개찰을 하고 플랫폼으로 나갔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기차를 기다리는 풍경이 재미있다. 시간이 되자 관광열차가 몸집을 키우며 미끄러지듯 조용히 플랫폼으로 들어온다. '덜커덩' 소리를 크게 내던 옛날 열차가 아니다.
7시 42분 오근장역을 출발한 열차가 철로 위를 빠르게 달리지만 여행객들의 표정은 여유롭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산과 들판, 마을과 도회지를 구경하는 것도 기차여행의 별미다. 철로 옆 내 고향마을 작은 소래울, 미호천의 옛 철교, 황금색으로 변하는 농촌의 들녘풍경을 바라본다.
찐 달걀, 음료수, 과일, 동동주, 양주...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설레임의 맏언니 꽃나무님이 어머니처럼 이것저것 먹을 걸 챙겨준다. 먹을 게 지천이니 ‘하하 호호’ 정도 넘쳐난다. 연세 드신 분은 나무젓가락 준 게 고맙다고 전을 내놓는다.
사실 별 것 아닌데 무척 서운할 때가 있다. 그때는 다 가난한 시절이었고 수학여행 못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불현듯 기차 안에서 김밥과 삶은 달걀 먹으며 신이 났을 친구들이 부럽던 초등학교 수학여행이 생각났다. 경상도에서는 ‘왼손잡이’, 전라도에서는 ‘감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의 사투리로 사용되는 말이 ‘째비’다. 왜 그 당시 무임승차로 기차통학 하는 것을 째비통학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철모르고 친구들과 어울려 째비통학 하던 학창시절도 떠올렸다.
웃고 즐기는 사이 홀로 부지런히 달려온 관광열차가 종착지인 정읍역에 도착했다. 역사 밖 광장에 동학혁명농민군의상과 정읍사망부상이 서있다. 광장 앞에 대기 중인 관광버스에 올라 서남쪽 바다와 가까운 고창의 선운사로 향한다. 정읍은 내장산국립공원이 인접해 길거리에서 쌀, 한우 등 단풍미인을 앞세운 간판을 많이 만난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때(577년)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로 선운사 주변은 봄철의 동백꽃, 가을철의 꽃무릇과 단풍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공원관리사무소에서 선운사로 가다보면 왼쪽 도솔천 건너편 바위에 크기로 보아 수령이 오래된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이 절벽을 뒤덮고 올라가는 모습이 멋지다. 송악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늘푸른 덩굴식물이다.
사찰 입구부터 잎이 지고 난 뒤 꽃이 피어 ‘상사화’로도 불리는 꽃무릇을 만난다. 군락지에 지천으로 피어난 꽃이 온통 붉은 세상을 만들어 황홀하다. 때로는 홀로 외롭게 피어난 꽃이 더 소중하다. 맑은 물이 졸졸졸 흐르는 냇가에서 귀를 쫑긋 세운 한 송이 붉은 꽃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선운사에서는 누구나 시인이고 가수다. 미당 서정주의 시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와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를 생각하며 중얼중얼 시를 읊고 흥얼흥얼 노래를 한다.
우람한 느티나무와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냇가에 늘어선 숲길이 인상적이다. 세상은 참 좁다. 사찰 입구 도솔천의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다 대학 동문인 안경덕 선배를 만났다. 같이 교직에 근무했었다는 반가움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경내로 들어서면 수령 500년에 높이 6m인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이 대웅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보전(보물 제290호),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등 19점의 유물이 있다.
꽃무릇 구경나온 행락객이 넘쳐나 식당마다 만원이다. 편의점 앞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같은 음식도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음식도 궁합이 맞아야 한다는데 이날 설레임 회원들과 컵라면을 안주로 마신 양주 맛이 최고였다. 돌아나가는 길 꽃무릇 군락지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높은 하늘은 눈이 부시게 파랗다.
일행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선운사에서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로 이동한다. 담양을 상징하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옆에 국도가 새롭게 뚫리면서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학동교차로에서 금월교에 이르는 옛 24번 국도다. 높이 10~20m의 메타세쿼이아가 양쪽 길가에서 울창한 가로수 터널을 만든 이 길이 산림청과 생명의숲가꾸기운동본부 등에서 주관한 ‘2002 아름다운 거리숲’ 대상, 2006년 건설교통부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무엇이든 적당할 때 약이지 과하면 독이 된다. 주말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관광객이 힐링 보다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여행지를 만든다. 메타세쿼이아 길을 배경으로 홀로 사색하거나 연인의 다정한 모습을 담겠다는 욕심을 일찍 포기하고 대나무 바구니를 형상화한 호남기후변화체험관을 배경으로 메타세쿼이아 길 사진을 몇 컷 남겼다.
죽녹원은 담양군이 성인산 일대에 조성한 대나무 정원으로 울창한 대숲이 넓게 펼쳐져 있다. 산책로가 시작되는 입구의 죽녹원전망대에서 담양천과 수령 300년의 고목들로 조성된 관방제림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전남 5대 명산 중 하나로 가을이면 산봉우리가 보름달이 맞닿을 정도로 높다는 추월산을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으로 만나는 곳도 있다.
죽림욕을 즐기며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철학자의길 등 산책로를 걷다보면 어느 길이든 길은 길로 연결된다. 그래서 가보지 않은 길로 가야 새로운 걸 구경한다는 것도 깨우친다. 알포인트, 일지매, 1박 2일 촬영지를 배경으로 추억남기기도 한다. 생태전시관, 인공폭포, 생태연못, 야외공연장, 정자, 한옥 등의 쉼터는 대나무 향을 맡으며 사색하기에 좋다.
죽녹원에서 정읍역까지는 관광버스로 1시간여 거리다. 멀리 추월산과 내장산이 바라보이는 차창 밖 풍경이 멋지다. 3시 20분경 정읍역을 출발한 관광열차가 8시 54분경 오근장역에 도착했지만 기차 안에서 시작된 설레임 회원들의 ‘하하 호호’가 청주 금천동의 25시해장국(043-225-0025)까기 길게 이어져 오래 전에 쓴 시 ‘좋은 사람’을 슬며시 떠올린다.
좋은 사람은
앉은자리에 온기 남겨
다른 사람 따뜻하게 합니다
좋은 사람은
상대방 마음 헤아리며
배려하는 걸 즐거워합니다
좋은 사람은
조용히 왔다 갔는데
발자취가 오래 남아있습니다
좋은 사람은
스쳐 지나갔는데
인연의 끈 매듭져 있습니다
좋은 사람은
빈자리 만들며
그리움 몰고 옵니다
정녕 좋은 사람은
그리움 살포시 솟아나도
멀리서 바라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