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살랑거림, 가을바람! 속삭인다 떠나라고. 주름살처럼 갈라진 흰 구름장 사이로 엷은 쪽빛 하늘이 드러나고 쏟아지는 광선이 결실의 서걱거림으로 가득한 들녘을 깨운다. 벗어남! 누구나 떠나고 싶은, 죽으라 뛰어도 끝이 없는 러닝머신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그리움이 여행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카피’의 말처럼 게으른 일탈의 유혹이 고개 드는 때, 모든 것을 충적시켜 줄 수는 없지만 마음을 다독여준 여행이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이란 책이었다. 진정한 여행가도 아니고 기호도 다르지만 상상 속의 이입은 진한 흥분과 설렘으로 또 다른 열정을 갖게 해주었다.
10가지 테마로 100가지의 다양한 풍물과 느낌을 부드러운 감성과 우윳빛 숨결로 읽은 이에게 ‘정여울’만의 아우라를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장소가 바뀔 때마다 읽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고 머릿속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라 하는 속삭임과 더불어 바쁘다는 말을 훈장처럼 달고 사는 지금의 나를 반추하게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LTE 속도로 살아가며, 호모카스트렌시스라고 지칭되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에 편안하게 자신을 끼워 맞추는 일상을 허물고 감성과 느긋함, 자신의 발소리를 귀 기울여야 한다였다. 그런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행지가 101번째인 헤르만 헤세의 고향 칼프였다. 칼프에서 이야기는 조급함으로 갈라진 나의 감성을 촉촉이 적셔 주며 느긋함의 소중함을 갖게 했다.
떠남! 우리는 보통 망설임을 거듭한다. 낯선 곳을 무턱대고 직접 찾아가지 못하는 것은 일이나 돈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 바깥을 꿈꾸지 못하는 나 자신의 닫힌 마음 때문이다. 그게 허물어지는 순간 진정한 자신의 귀 기울임이 일어난다. 내게 있어 여행과 관련된 노스텔지어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이 책에서 소개된 지중해와 그 보석이라는 아드리아 해가 있는 남부 유럽이 아닌 북유럽에 대한 그리움이다. 6년 전 1월 춥고 낮도 짧은 고도의 헬싱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헬싱키 마켓광장 건너 물안개 속에 드러난 스톡홀름 오가는 크루즈선 실자라인을 보고 감탄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 배를 타고 북해를 횡단하여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밤새 두근거린 시간을 뒤로 스톡홀름 시내에 접어들었을 때 낮은 기울기의 태양광에 드러나는 물의 도시의 깔끔함은 지금도 아련하다.
우리는 종종 여행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미리 갖추어진 패키지여행은 지신만의 추억을 만들 시간이 적다. 생애 처음 내 나라를 떠난 그 여행길은 신선한 충격으로 가족과 나라에 대해 멀리 있어 더 그립고 아픈 곳이라는 나의 노스텔지어를 진하게 관찰하게 했다. 두 번째 여행은 이 책이 주는 머릿속 여행과도 같은 ‘제임스 힐든’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샹그릴라에 대한 향수였다. 이 이야기는 세상사는 소리에 반하여 또 다른 자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타인의 발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내면의 이상향 세계를 그린 여행이었다. 흡사 작가가 경험한 헤세의 고향 칼프를 거닐며 느끼는 기분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짧은 떠남 긴 여운! 여행은 그 자체로 산을 오르며 갈증에 베어 무는 오이 한입과 같다. 보통 일반적 여행이라면 더 많은 것을 더 빨리 효과적으로 보고 싶어 하는 욕심쟁이 관광이 주류이다. 그러나 참 여행은 좀 더 느리게 더 차분하게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머물고 싶으면 철퍼덕 주저앉아 배낭을 베고 누울 수 있는 자신만을 위한 여행이 아닌가 한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한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느긋함을 부여하면 가을로의 내 작은 여행이 된다. 여행을 통하여 삶이란 만유인력에서 벗어나 일상을 멀리서 바라보게 되면 가지고 싶은 것 보다는 버려야 할 목록이 많은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불혹도 지났고 지천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삶이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찰나이다. 우리가 향유하는 시간에는 살아가는 시간, 증언하는 시간, 창조하는 시간이 있다고 까뮈는 말하고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시점에서 추구해야 할 시간은 소유의 욕심을 버리고 창조하는 시간에 접어들어야 할 시점이다. 그런 되새김을 던져주는 것이 바로 여행이 아닐까 한다.
소망해 보고 싶다. 앞으로의 삶에서 단 한 번의 여행이란 미션이 주어진다면 인도인이 말하는 인간의식 최고의 지점, 제3의 눈 ‘챠크라’를 가질 수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택하고 싶다. 신을 향한 믿음 하나로 친구가 되는 길, 모두가 경험하고 도전함으로써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길이라 한다.
가을바람이 깃발을 흔들고 태평양을 보듬고 올라온 소식들을 교실 창틀에 내려놓는다. 모두가 꿈꾸는 것은 일상에서 자유롭기를, 행복한 자신의 내면을 추억하길 원한다. 이런 무한한 꿈은 실현 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약속해 본다. 여행! 그것은 무한한 시간의 바다 위에 내 그리움의 닻을 내리는 법을 아는 것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