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이 지진으로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그곳을 다녀온 한 지인은 주민들의 진심과 열정을 가진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 사고에 무사할까 걱정이란다. 지금 카트만두에서는 지진으로 집을 잃거나 건물의 추가 붕괴를 우려해 여전히 주민 수십만 명이 노숙하고 있다. 그런데 비도 내렸다. 네팔 정부는 지난 25일 발생한 강진으로 지금까지 네팔에서만 5천57명이 숨지고 8천여 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유엔은 이번 지진으로 피해를 본 이들이 8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안타깝게도 아직 피해 규모조차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니 온 나라의 사정이 딱하고 아프게만 느껴진다.
매일 수백, 수천으로 사망자가 늘어나고, 경제가 10년 이상 후퇴할 것이라는 소리도 들려 온다. 하지만 성금 얼마를 보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마땅치 않으니 더욱 답답하다. 생명을 명분 삼아 한국인들이 그곳에 병원을 만들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재난의 절반, 그리고 고칠 수 있는 일 대부분이 사람 탓이라 더 아쉽다는 것이다. 몇년째 큰 지진의 가능성을 경고했다니 몰랐을 리가 없다. 충격과 피해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곳곳의 낡은 집은 물론이고 새로 짓는 건물 역시 작은 충격조차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도시의 인구집중과 난개발, 이를 따르지 못하는 사회기반시설은 미약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사회적 대비와 조처를 못했으니 참사는 적어도 절반의 인재라 해야 할 것이다. 돌이켜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자연재해가 인재로 바뀌는 일은 또 되풀이될 터이니 마땅히 이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사고 가능성과 대비가 모두 뻔한데 왜 이토록 무력한 것인가. 한 가지 원인만 꼽는다면 가난에 일차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의 살림이 어떠할 것이며, 그 구성원인 국민은 또 무슨 여력이 있을 것인가. 가난이 체제화, 제도화되면 부자조차 위험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업가로 지진으로 큰 부상을 당한 ‘아추트라이 수베디’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네팔의 주택과 건물은 기둥도 없고, 철근도 쓰지 않은 콘크리트, 그것도 매우 묽은 콘크리트로 지어졌다”고 말한 것을 보면 참사는 언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물론 이 나라의 가난에도 이유가 있고 특히 그것이 오래 지속된 데는 구조적 요인이 작용한다. 국제정치의 역학과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불평등은 언급하는 것으로 그친다. 개발도상국이라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비슷한 처지임을 모르지 않아서다. 이 나라로 한정하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정치야말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오랜 내전을 탓할 수도 있으나, 2008년 공화정이 된 뒤에도 난맥의 정치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직 헌법도 만들지 못한 상태이니 짐작하고도 남는다.
정치가 혼란과 교착을 거듭하는 사이 국가 관리를 위한 지도력은 약화되고 사회는 갈라졌으며 국정 기조는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언제 또 바뀔지 정치가 불안정하면 관료는 움직이지 않고 정책은 동요하는 법이다, 빈곤과 재난 대책이 없거나 무력한 것은 당연하다. 큰 위기를 맞은 지금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는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가난한 나라의 대부분은 허약한 정치의 조각들이 또렷하게 남게 된다. 그 피해가 국민들에게 되돌아간다. 재난의 불행을 두고 정치가에 책임을 묻는 것은 회고의 비판이 아니다. 마땅한 대안이 모자란다고 뜻이 공허하다 할 수도 없다. 자연재해는 되풀이되고 쉽게 인재와 결합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생각하면 어디 네팔만 그럴까. 세월호 사고와 그간의 대응이 웅변하듯, 어떤 나라 어떤 재난에도 정치의 책임은 무겁다. 사람을 살리는 정치로 만들어야 하는 것을 차마 남의 일이라 하지 못한다. 구호와 복구가 얼마나 제대로 이뤄지는지도 모두 정치에 달렸 있다. 한국과 네팔 두 곳 모두 정치를 주목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