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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문학의 길을 열어준 선생님

누구나 선생님의 사랑으로 컸겠지만, 나도 선생님의 지도로 삶의 물줄기를 넓혀갔다. 선생님들께서 끊임없이 사랑으로 적셔주워 올곧게 길을 걸었다. 특히 어줍지 않은 글을 써도 칭찬을 해 주신 덕에 문단의 말석에 앉아 있다.

내가 문학의 길에 발을 들인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원용문 선생님(후에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정년퇴임)이다. 선생님은 시인이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나는 제법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묻곤 했다. 그런데 그것은 제대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학교생활의 일탈로 나타났다. 중학교까지는 그럭저럭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며 공부를 잘했다. 공부 잘하는 것으로 부모님은 한없이 기뻐하셨다. 그런데 공부에 재미를 잃었다. 학교 가는 것이 싫었고, 방황의 길목을 기웃거렸다.

성적이 하락한 것에 놀란 부모님은 담임선생님의 도움을 청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담임선생님 앞에 갔다. 그때 선생님께 일방적으로 꾸중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벌이 내렸다. 소설 외우기였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외우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소설의 감성을 통해 나를 위로 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소설 외우기가 황당하기도 했지만, 쉽게 적응했고 정서적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수업 시간이 더 좋아졌다. 선생님께서는 수업 시간에 현대문학 등에 발표한 당신의 시를 읽어 주셨다. 그 시를 받아 써 가면서 읽어보곤 했다.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공부하는 것은 멀리 하고 시를 읽고, 소설을 읽었다.

문학을 공부하면서 학교생활은 안정을 찾았지만, 어른이 되어 먹고 살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현실이 답답했다. 문학 공부도 하고, 생업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담임선생님처럼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와서는 하고 싶은 공부만 한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남광우 선생님 수업 시간은 늘 감동이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선생님의 글을 배웠다. 학문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있는 분이었지만, 어린 학생들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일석 이희승 선생님을 뵙는 기회도 만들어 주셨다. 그때 선생님들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다. 선생님을 뵈면서 나도 국어교과서에 글이 실리면 좋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글이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그 꿈이 실현되었으니 세상은 허황된 기대를 가져 볼만하다는 생각이다.

2학년 때 오세영 선생님의 시론 강의는 본격적으로 문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기억하기에 그때 선생님은 40대 후반이었지만 청년 같았다. 세 시간 강의 동안 쉬지 않으셨다. 감히 선생님을 평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지만, 선생님은 천재에 가까웠다. 선생님은 시인이면서 문학에 대한 학문적 이론도 완벽했다. 우리 문학과 프랑스 문학, 영국 문학을 넘나들면서 현학적인 강의를 하셨다.

3학년 때 당시 현대문학 편집장이었던 시인 감태준 선생님의 ‘시창작론’ 수업을 좋아했다. 문학은 삶의 이야기를 치열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자기 혼을 불어 넣으며 글을 써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이 읽어 주는 시도 한국 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인간 소외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5공화국 출범으로 대학 캠퍼스는 여전히 최루탄 냄새가 많이 났는데, 선생님의 시는 위안이 되었다.

김재홍 선생님 수업은 작품론과 작가론을 연속으로 이어서 수강했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은 있지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안에서 밀어 올리는 강한 기운이 생겼다. 윤동주의 현실 인식의 문제, 조병화 시인의 고독하고 치열한 작가 정신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칭찬을 많이 해 주셨다. 종강 때는 만해 한용운 심우장(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한용운이 만년을 보낸 한옥.)에 데려가 주시고, 종로 피맛골에서 빈대떡을 사 주셨다.

김열규 선생님은 이야기꾼이었다. 옛날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우리를 신화의 세계로 이끌었다. 문학 공부를 하면서 민속학을 연구해 민요나 민담 등을 풀어놓으셨는데 재미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선생님은 왕성한 연구와 그 저작물을 통해 우리들에게 선비로서의 모습을 보이셨다. 그러면서도 늘 선생님은 오직 책 읽기 밖에 할 줄 모른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셨다.

조병화 선생님의 문학 정신은 꿈, 사랑, 멋이다. 당신의 현실적 생활도 늘 그랬다. 베레모에 파이프를 들고 다니시며 크게 웃으셨다. 연구실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낭만을 즐기셨다. 이런 이유로 사실 선생님의 시는 유행가풍이라고 건방지게 평을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부총장이라는 보직을 맡고 계시면서도 연구실에 불러 직접 커피(당시 선생님은 텔레비전에 커피 광고를 하고 계셨다.)를 내놓으시며 나에게 시간을 마련해 주셨다. 그때 일제강점기 때 럭비를 하셨던 말씀을 해 주시며 내면에 움트는 지성의 분출을 노래하는 법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연구실에 가면 아무리 바쁘셔도 홀대 하지 않으시고 반겨주시고 당신의 시집을 많이 주셨다.

나는 좋은 선생님 아래에서 문학의 향기를 키웠다. 그리고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문학이 평생 운명처럼 붙어 다닌다. 선생님들께 배운 것은 문학보다 사랑이었다. 삶을 어루만져 주는 사랑이 문학보다 더 뜨거웠다. 문학이란 인간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야 말로 문학을 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그 옛날 선생님이 주신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 일을 해내기에는 내 역량이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오직 선생님들이 주신 사랑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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