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해남 윤씨 가문은 고산 윤선도를 배출한 명문가 집안이다. 그러나 남인 계열로 중앙 정치 무대에서 밀려났다. 본인도 정치적 탄압으로 귀양 생활을 했지만, 결국 후손들도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운명을 안고 살았다. 벼슬에 나가지 못했지만 선비로 기품을 잃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특히 서화를 통해 내면의 아픔을 달래는 일생을 보냈다. 해남 윤씨 어초은파 종택 녹우당에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보물 제481호로)이 전한다. 이 화첩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 공재의 아들인 낙서 윤덕희, 낙서의 아들인 청고 윤용 3대의 그림 70여점을 모아놓았다.
공재 윤두서는 1688년 해남 연동에서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윤선도의 종손 윤이석에게 입양되었다. 여느 양반 집안의 자제들처럼 그는 학문에 정진했다. 그는 나이 25세에 (숙종 15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 당시는 서인이 득세하고 있어 남인인 해남 윤씨에게는 뜻을 펴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대신 친구들과 학문에 열중하며 다양한 식견을 넓혔다. 그는 실학자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와 친했다. 윤두서의 사망 때에 성호 이익 선생이 제문을 썼다. 여기에 “우리 형제는 매사에 자신이 없었지만 공의 칭찬을 듣고 용기를 내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을 대성했던 성호 형제와 교우는 그의 학문의 세계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집안 녹우당에 전하는 유물 ‘방성도, 송양휘산법, 동국여지지도, 일본여도’ 등을 보면 천문, 수학, 지리 등 폭넓은 분야에서 학식을 지닌 실학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재가 활동한 시기는 조선 역사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회,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실사구시의 새로운 조짐이 싹트기 시작했다. 조선 전기에 관념성을 지향하던 예술 분야에서도 변화가 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정서를 반영한 풍속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공재의 그림은 자화상(국보 240호)이 으뜸이다. 이 그림은 화폭 전체에 얼굴만 그려지고 몸은 생략된 형태로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수염을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그는 말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때마다 하루 종일 관찰한 뒤에야 붓을 들었다고 한다.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백동경(녹우당에 있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며, 나아가 정신까지 그리려고 애썼다. 얼굴만 그려진 자화상은 눈동자가 부각되어 강한 힘과 생기를 느끼게 한다. 사실적인 외모는 단호한 정신세계도 풍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동양인의 자화상으로는 최고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윤두서는 정선·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대 화가로 평가한다. 전하는 화첩에는 산수화·인물화·풍속화 등 여러 종류의 그림이 실려 있다. 선비화가였던 윤두서의 다양한 회화 세계와 그림솜씨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아울러 그의 그림은 당시 화단의 주류였던 산수화에서 벗어나 농민들의 현실적인 삶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이를 통해 실학자적인 면도 엿볼 수 있다. 그의 풍속화는 후에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작품으로는 ‘채애도’, ‘선차도’, ‘백마도’, ‘노승도’, ‘심득경초상’, ‘출렵도’, ‘우마도권’, ‘심산지록도’ 등이 있다.
윤두서의 화풍을 이어받은 사람은 맏아들 윤덕희이다. 그는 어릴 때는 서울 회동에 살며 이저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덕희와 그의 동생들 역시 모두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1694년 갑술환국 때 남인이 폐비 민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실권하면서 아버지 윤두서가 당쟁의 타격으로 관직에 진출하지 않자, 그의 자재들도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한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한양 생활을 정리하고 해남으로 낙향했지만, 정착 2년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윤덕희는 차분하게 집안을 지켜나갔다. 물려받은 토지를 동생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고 선조들이 남긴 글씨와 그림을 서화첩으로 꾸미는 등 양반가 종손으로서의 업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윤선도의 문집과 윤두서의 그림 등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는 데는 그의 공이 컸다.
윤덕희는 아버지의 화풍을 전수하여 전통적이고 중국적인 소재의 도석인물(道釋人物), 산수 인물, 말 그림을 잘 그렸다. 그 중에 압권은 ‘여인독서도’이다. 이는 여염집 여인네가 마당 탁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광경이다. 당시에 여인에게 책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매체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인도 앎에 대해 접근하고, 책을 통해 즐거움과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다. 여인이 책을 보는 광경에 주목하고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그가 여자들의 인권에 선구자적 사상을 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누이’, ‘공기놀이’ 등도 평범한 일상을 담았다. 이런 그림은 과거의 산수화에 집중한 조선의 그림과 많이 다르다. 작품으로 ‘송하고사도’, ‘마상부인도’, ‘마도’, ‘산수도첩’, ‘연옹화첩’, ‘송하인물도 등이 있다.
윤용은 덕희의 차남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글과 그림에 뛰어났다. 28세 때인 1735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역시 벼슬을 멀리 하고 서화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술을 즐겼으며 기품이 있고 성격이 맑고 깨끗했으며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윤용도 여인을 그렸다. ‘나물 캐는 여인’이다. 들녘에서 일을 하다가 모처럼 허리를 펴고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을 포착했다. 이 그림 역시 우리 주변의 평범한 여인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그러나 그림의 소재며 구상은 할아버지 윤두서의 ‘채애도’를 연상하게 한다. 실제로 그는 산수화에서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남종화풍을 따랐고, 풍속화에서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보였다. 하지만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독자적인 화풍을 남기지 못했다. 작품은 ‘수하필서도’, ‘홍각춘망도’, ‘연강우색도’ 등 많이 남기지 못했다.
윤씨 삼부자의 공통점은 풍속화에 대한 관심이다. 윤두서에서 시작된 여인 풍속 장면이 아들 윤덕희를 거쳐 손자 윤용에까지 전승된다. 해남 윤씨 삼부자 이전에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부각한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 이들은 여인의 생활상에 착안한 여러 소재를 개발하여, 후배 화가인 신윤복, 김홍도가 그린 미인도나 사녀도의 전범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남 윤씨 삼부자가 조선 회화사에서 실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화와 그림의 소재로 여성을 내세운 것은 신선한 시도를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