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존경하는 한 교수가 있다. 나는 일본에 살면서 라디오 방송으로 그분의 '상상하며 창조하라'는 강의를 듣고서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녹음을 하여 지금은 CD로 보관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분이 쓴 많은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지식생태학자’라고 소개한다. 지식생태학은 지식이 생명력을 지니고 진화・발전해나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그 진화의 조건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는 최근 ‘브리꼴레르’라는 책을 통해 또 다른 인재상을 제시했다. 브리꼴레르란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개념에서 출발한 것으로 ‘손재주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해서 실력을 기른 전문가보다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 식견과 안목을 갖춘 ‘실전형 전문가’에 가깝다. 자신의 지식과 세상의 지식을 끊임없이 융합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 교수님 역시 ‘브리꼴레르’형 인간이다. 그런 그는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을까 궁금하였는데 그의 자녀교육 철학을 공개하였다.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들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의 책과 삶의 자세를 정리하여 보았다.
“저도 집에 가면 다른 이들과 똑같이 자녀 교육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때로는 실수도 하는 아빠다. 하지만 다양한 체험과 경험을 통해 아이들 스스로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인생의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만큼은 늘 강조하고 있다. 아들, 딸 모두 얼마 전에 스스로 진로를 결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을 번복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찾는 데 성공했다.”고 털어놓았다.
교수님의 딸과 아들은 둘 다 스스로가 원해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딸 해리 양(23)은 원래 공부에 뜻이 있어 일찌감치 미국의 유명 사립학교에 진학을 했고, 아들 원석 군(21)은 중학교 2학년 때 ‘농구를 하고 싶다’는 의외의 이유로 미국 유학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는 “아들은 어려서부터 농구에 환장한 아이였다. ‘슬램덩크’ 같은 농구 만화에 푹 빠져 살았고, 농구단 LA레이커스의 열혈 팬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는 말리는 대신 아예 만화책 전집을 사줬어요. 이 기회에 책 읽는 습관을 들이자 했죠. 중학교 내내 공부도 안 하고 오직 농구에 빠져 살았지만 무언가에 빠진다는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원석 군이 농구를 실컷 할 수 있는 미국 학교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을 꺼냈을 때, 조기 유학의 실패, 위험성 등이 우려됐던 건 사실이다. 게다가 아들이 농구 선수로 대성할지 여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영만 교수는 자신의 의지대로 원하는 길을 선택하고, 도전하고, 실패하는 경험 또한 아이에게 좋은 공부가 되리라 믿었다. 결국 원석 군은 중학교 3학년 때 ‘농구 유학’을 갔다. 영어가 서툴렀던 만큼 학년을 한 학년 낮추긴 했지만, 본인이 원하던 대로 실컷 농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찾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공부가 싫고 오직 농구만 좋다기에 농구를 할 수 있는 학교로 유학을 보내놨더니 이 녀석이 공부에 재미를 들이게 됐다는 것이다. 영어가 트이고, 공부에 재미를 붙인 덕에 성적도 눈에 띄게 좋아지게 되었다. 결국 고등학교는 제 누나가 다니고 있는 조지 스쿨이라는 사립학교로 보냈는데, 그곳은 보딩스쿨이고 공부를 ‘엄청 세게’ 시키기로 유명하다. 거기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3년 동안 농구 대표 선수로 활동하고, 체력이 되니까 축구 선수로도 뛰었다.”는 것이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원석 군은 뜻밖에 경영학을 배우고 싶다는 말했다. 그동안 농구를 하면서 경영학, 경제학, 건축학 등에 관심을 가졌던 원석 군은 그중에서 경영학을 선택했다. “저도 몰랐는데 그동안 제가 썼던 ‘용기’나 ‘청춘경영’등의 책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고 하더라고요. 평소에 저작이나 강연, 강의 등으로 바빴던 제 활동들이 알게 모르게 좋아보였는지 교수가 되고 싶다고 해요. 나중에 또 바뀔지도 모르지만, 본인이 선택했으니 자신의 페이스대로 끌고 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 선택의 결과, 현재 원석 군은 보스턴 칼리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렇듯 중간에 진로를 바꾼 건 원석 군만이 아니다. 원석 군의 누나인 해리 양이 먼저 진로를 바꿨다. 원래 국・영・수 중심의 학과목 공부에서 두각을 보여 명문대에 입학할 것이 확실해 보이던 해리 양은 어느 날 갑자기 미술에 흥미를 보이더니 결국 파인아트를 공부하겠다며 맨해튼에 있는 SVA(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 진학했다. 미술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스스로 포토폴리오를 준비하는 등의 노력 끝에 얻은 성과다.
“미술 학교에 가서도 이것저것 해보더니 지금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겠다며 그쪽 공부를 하고 있다. 저는 아이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고, 또 그것을 바꿀 때에도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다. ‘네 뜻대로 하라’고 말한다. 저라고 왜 걱정이 안 되겠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재밌어하는 것은 무조건 해보라고 해요. 재밌는 것을 열심히 하다 보면 재능이 되거든요. ‘재능’은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재미있는 능력이에요. 그것을 찾도록 도와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자녀들이 스스로 진로를 결정했다는 말을 들은 뒤, 딸과 아들에게 편지를 한 통씩 보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휴머니스트가 되길, 대학 4년 동안 하면 신나는 일을 찾기를, 힘든 시기가 찾아와도 의연하게 대처하기를,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적었다. 이제는 남과의 ‘속도 경쟁’이 아니라 ‘밀도 경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밀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 공부에 완전히 빠져야만 가능하다. 그랬을 때 남과는 다른 경쟁력이 생기게 된다. 아이들의 인생은 결국 아이들이 책임져야 한다. 본인이 선택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는 그 모든 과정이 결국은 인생의 소중한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부모든, 누구든 가르쳐줘서 얻는 게 아니에요. 혼자서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 교수는 자신의 자녀 교육 방침을 ‘방목’이라고 표현한다. 지금 시대의 ‘방목’은 ‘방관’처럼 느껴지지만, 오히려 나중을 위해서는 좋은 교육법이라고 믿는다. 아이들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자꾸만 학교와 가정이라는 안전한 틀에 가두려고만 하지 말고, 방목하여 스스로 실험하고 모색하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작은 실수를 두려워하며 자꾸만 가두려 하면 오히려 언젠가는 치명적인 실패를 일으킬 수 있어요. 작은 실수를 자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그 실수를 통해 깨닫고 배우기를 바라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옳은 길을 찾아갈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선택인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유 교수의 자녀들은 본인들이 하고 싶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물론 앞으로도 자신의 선택을 바꿀 수도 있고, 엉뚱한 진로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발견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목욕탕에 그런 간판이 있다. ‘누구나 때는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저마다 피는 시기가 다를 뿐, 분명 자신만의 꽃을 피울 때가 온다. 부모의 역할은 그때를 위해 아이들의 자립심과 야성을 키워주는 일이다.”
딸과 아들, 두 아이가 자신들의 꿈을 찾는 여정을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온 유영만 교수는 2014년 아들 원석 군이 입대하기 전에 함께 히말라야 등반 같은 도전에 나섰다. 이미 2012년에 6박 7일 동안 250km의 사막을 걷는 사하라 사막 레이스에 참여했던 그는 아들에게 우여곡절의 경험을 선물하기로 했다. 자신은 ‘들이대학교 저질러학과 뒷수습 전공’이라고 말한다. 불확실하고 변수가 많은 이 시대에는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사는 사람이 성공한다. 꿈을 키워가는 아들과 함께 재밌는 도전, 경험을 하다 보면 어떤 새로운 그림이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