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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같은 고통, 정상에서의 희열…해외에서 느끼는 민족혼

교육에 몸담은 지 21년째인 임형칠 교사는 방학기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매년 한 차례씩 해외원정 등반을 해왔다. 대자연 속에서, 죽움과 삶의 갈등 속에서, 지구촌의 거대 산맥에 큰 산드을 오르내리면서 느끼고 경험햇던 내용은 자신은 물론 학교 현장에서도 수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직접 쓴 등반기 곳곳에서 이런 느낌을 읽을 수 있다.

임형칠(광주 정광고 교사)


지난 7월 중순부터 한 달 가까이 (사)대한산악연맹이 주최하고 문화관광부, SBS,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조직위원회, 강원일보, 광주일보, 대전일보, 매일신문, 부산일보, 제주일보가 후원하는 세계 6개 대산맥의 ‘2001 한국 청소년 오지탐사대’중 유럽 카프카스 탐사대장으로 탐사활동을 벌였다. 전국의 대학생들과 함께 지구촌 오지를 찾아 거칠고 황량한 대자연 속에 한국인의 진취적 기상과 불굴의 도전정신을 새기고 돌아왔다.  
필자는 처음 기획단계에서부터 준비위원회의 집행위원장으로서 탐사대를 조직하고 훈련하여 지난 여름방학 기간을 통해 등반한 유럽 최고봉 엘브루즈를 비롯한 러시아 카프카스 산맥의 산군들을 등반한 것이다.
올해로 교육에 몸담은 지 21년인 필자로서는 방학 기간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매년 한 차례씩 해외원정 등반을 해온 것이다. 대자연 속에서, 죽음과 삶의 갈등 속에서, 지구촌의 거대 산맥에 큰 산들을 오르내리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내용은 자신은 물론 학교 현장에서도 수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81년 일본 북알프스 등반을 시작으로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Ⅲ봉, 4차례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등반, ’88년 한국 최초 세계 4위의 로체봉(8,516m) 등정, ’99년 KBS가 히말라야 등반 전과정을 TV로 생중계한 캉첸중가(8,586m)의 원정대의 원정대장으로 등반한 것을 비롯하여 20여 회의 히말라야, 유럽 알프스 등 해외원정 등반 및 트래킹을 해왔다. 히말라야 등반 중 3차례에 걸쳐 4명의 동료대원을 잃기도 하였다.
이번 등반은 카스피해에 접해 있는 독립국가연합의 아제르바이젠 공화국 수도 바쿠에서 북서쪽으로 흑해를 향해 1,500km의 길이로 뻗어있는 카프카스산맥이 목적이었고, 이 산맥은  동서양을 나누는 역할을 한다. 코카서스산맥이라고도 부르는 이 산맥은 또한 남북으로도 110∼180km에 이르는 넓은 산자락을 펼치고 있어 전체적으로 커다란 산군을 이루고 있다. 이번 등반 중 엘브루즈를 중심으로 센트럴 카프카스 지역의 등반기를 소개한다.
 
도전 사흘만에 엘브루즈 정복하다

영광의 엘브루즈! 그들의 눈에는 대륙이 담겨 있었다. 엘브루즈 여신이 빚어낸 카프카스 산군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사방으로 너울져나갔다. 구름을 뚫고 홀연 치솟아 오른 봉우리들, 광대한 설원과 초원구릉, 원시림에 둘러싸인 호젓한 산마을. 유럽과 아시아의 모든 것들이 그들의 발 아래 있었다.
지난 7월 중순 세계 6개 대산맥을 향해 대장정에 오른 ‘2001 한국 청소년 오지탐사대’. 그중 유럽 카프카스 탐사대(단장 이병완·대장 임형칠) 대원 12명은 같은 달 28일 낮 11시 50분 유럽 최고봉이자 카프카스 산맥의 제왕인 엘브루즈(Elbrus:해발 5,642m) 정상에 올랐다.
대원들은 만년설 뒤덮인 산정에서 가쁜 숨을 고르며 대등한 적수와 겨루고 난 뒤의 기쁨을 나눠 마셨다. 구름에 잠긴 카프카스의 연봉들은 영웅들의 신화를 속삭이고 있었다. 제우스에 거역하여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사슬로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심장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은 곳. 이아손이 아르고선을 타고 세상의 끝을 지나 마법사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황금 양털을 찾은 곳이 바로 여기라고.
첫 해외원정에서 등정에 성공한 대학생 대원들은 감격의 탄성을 질러댔다.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거쳐 미네랄 보디까지 12시간이 넘는 비행, 박산계곡 상류 테르스콜까지 3시간 가량의 버스여행, 6박 7일간의 아들수 산군(山群) 탐사와 등반 등 지난 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엘브루즈 등정은 고소순응을 위해 고도를 점차 높여가는 방식으로 사흘만에 이뤄졌다. 첫 날인 7월 26일 숙소인 테르스콜에서 아자우역(2,180m)으로 이동, 케이블카와 체어 리프트 구간 3곳을 올라 가라바쉬(3,750m)의 배럴에 도착한 대원들은 좌우 빙하 사이의 설원을 헤쳐나가 ‘프리유트 11’(4,200m)까지 진출했다. 반나절만에 무려 2,000m 가까이 고도를 올리는 모험을 했지만 이상증세가 나타난 대원은 없었다.
현재 은백의 철판 지붕이 얹힌 산장이 있는 ‘프리유트 11’에는 3년 전까지만 해도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텔(산막)이 있었는데 등반객들이 취사도중 불이 나 전소됐다. 해골처럼 남아있는 철골뼈대와 화산석에 매달린 추모판들을 바라보며 대원들은 한 번의 실수가 얼마나 큰 참화를 불러오는지를 절감했다. 날씨가 급변하며 순식간에 빚어진 화이트 아웃(가스나 눈보라로 시계가 하얀색 일색으로 되며 원근감이 없어지는 현상) 속에서 배럴로 하산했다.
[PAGE BREAK]다음날에는 4시간만에 파스투코프 락스(4,800m)에 올랐다. 엘브루즈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데 공헌한 19세기말 러시아 군인이자 지형학자인 안드레이 파스투코프(Andrei Pastukhov)의 이름을 딴 이곳에는 각국에서 몰려온 산악인들이 10여 동의 텐트를 치고 야영중이었다.
무수한 별들이 맑은 날씨를 예보해주던 28일 되어 새벽 어둠을 뚫고 마침내 정상 공격이 시작됐다. 새벽 4시, 12명의 대원이 스노우 모빌에 몸을 실었다. 불도저를 응용한 차량인 스노우 모빌은 원래 스키어를 높은 고도까지 운반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으나 대부분의 등반대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이를 이용, 파스투코프 락스 부근까지 올라간 뒤 등반을 시작한다. 우리 팀도 이미 이틀 동안 고소적응을 마친데다 등반성이 떨어지는 구간이어서 스노우 모빌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급경사의 눈밭에서 하차, 1시간만에 파스투코프 락스에 오르자 50∼60도 경사의 광대한 엘브루즈 남면 설원이 펼쳐졌다. 정상인 서봉과 동봉(5,595m) 사이의 콜(col:산정과 산정을 잇는 능선상의 움푹 들어간 곳)까지 이어지는 트래버스(횡단) 구간이다. 등반경험이 풍부한 임 대장의 전략에 따라 대원들은 길고 지루한 설사면을 기차가 지나가듯 흐트러짐 없이 한 줄로 올랐다. 어느새 카프카스의 연봉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해는 천지를 붉게 물들이며 태고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표지목을 따라 3시간 반만에 콜에 오르니 목조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작은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1930년대 산막이 지어졌던 곳이다. 서봉 자락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니 눈평원과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났다. 사실 엘브루즈 정상은 뒤에 숨어있어 남면 자락에서는 잘 볼 수가 없다. 따라서 홀로 등반할 경우 다른 지점을 정상으로 착각하거나 등반 도중 길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산정부의 눈평원을 헤쳐나가는 동안 이중화의 무게가 천근만근인양 느껴지고 목마름과 거친 호흡으로 가슴이 타들어갈 무렵 전원이 정상에 다다랐다. 산행 시작 7시간 45분만이었다. 3∼4평 남짓한 꼭대기에는 정상임을 알리는 철제표지판 3개가 바위에 부착돼 있었다. 북쪽에는 예상과 다르게 하얀 산 대신 초원구릉지대가 펼쳐졌다.
고산에서는 하산이 고비. 일부 대원들은 다리가 풀려 아이젠 찬 발이 엇갈리고 탈진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끈끈한 연대의식과 동료애로 어깨를 부축해가며 비교적 빠른 속도로, 4시간만에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었다. 베이스 캠프인 배럴에서는 이 단장과 약간의 고소증세가 나타나자 대원들을 위해 과감히 정상 도전을 스스로 포기했던 대원이 눈물까지 흘리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탐사를 마친 대원들은 엘브루즈의 여신을 향해 손을 모았다. 등반 기간 내내 좋은 날씨를 가져다준 데 대한 감사의 기도였다. 엘브루즈는 페르시아어로 ‘눈 덮인 산’을 뜻하는데 현지 주민들은‘행복의 산’이라고도 불렀다. 과연 그랬다. 대원들에게도 엘브루즈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산이었다.

베이스 캠프까지 트레킹 하다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지구촌의 오지, 카프카스산맥에 접근하기 위해 대학생 8명과 지도위원으로 나선 전문 산악인, 취재진 등 14명으로 구성된 카프카스 탐사대는 러시아 모스크바를 거쳐 남남동쪽 민보디(Mineralnye Vody)까지 비행기로 날아갔다.
창밖으로 아득히 엘브루즈가 보일 무렵 민보디 공항에 내려서니 광활한 초원이 펼쳐졌다. 볼가(Volga)강 하류의 저지에서 이어지는 스텝(steppe) 지역이었다. 연 강수량 250∼500mm사이의 스텝은 우기에 키 작은 풀이 자라나 초원을 이룬다.
민보디에서 중앙 카프카스산맥과 엘브루즈 등반기점인 테르스콜(Terskol)까지 가기 위해서는 한여름이지만 냉방도 되지 않고 창문도 열리지 않는 전세 버스를 타고 4시간 가량 남하해야 했다. 그루지안 하이웨이를 따라 달리는 동안 지평선 끝까지 초원이 이어졌다. 경작지로 개간된 들판에는 감자와 해바라기, 목화, 밀 등이 재배되고 있었는데 특히 드넓게 펼쳐진 노란 해바라기 물결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누렇게 익은 밀은 수확이 한창이었다.
2시간여 만에 소도시 박산(Baksan)에 도착, 계곡으로 접어들자 비로소 삼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검문소와 엘브루즈 동·서봉 초등자의 동상이 서있는 카프카스의 관문을 지나 몰리브덴과 텅스텐 광산이 있는 타르나오즈(Tyrnyauz)에 이르렀다. 생필품을 파는 시장은 우리의 옛 5일장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특히 위도가 비슷해서인지 마늘과 감자, 양파 등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채소와 과일이 많아 탐사기간 동안 필요한 신선한 식량을 구입하는 데 용이했다.
[PAGE BREAK]엘브루즈 마을을 지나니 고산초원 위로 암릉과 만년설이 드문드문 보였다. 박산계곡 최상류에 이르자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유럽풍의 호텔들이 나타났다. ‘카프카스의 샤모니’로 불리는 해발 2,130m의 테르스콜에 도착한 것이다. 정부가 운영하는 대형 호텔과 소형 개인 호텔, 전통 양고기요리인 샤슬릭(shashlik)을 파는 식당과 카페를 비롯한 우체국, 소방서 등이 있는 관광촌이었다. 목축업과 관광,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주민들은 친절하고 순박하기만 했다.
대원들은 당초 테르스콜을 기점으로 아들수(Adylsu)강 계곡과 돈구조룬(Dongusorun) 계곡의 산군(山群)을 각각 3∼4일 일정으로 탐사·등반할 계획이었으나 그루지야와 접경인 돈구조룬은 대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일정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가이드를 포함한 현지인들도 등반에 나섰다가 국경 초소에서 장비와 소지품을 모두 빼앗긴 경우가 왕왕 있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들수 지역 탐사 일정을 6박 7일로 늘리고 돈구조룬은 국경 부근까지 트레킹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테르스콜에서 하루 동안의 달콤한 휴식을 마치고 대원들은 1주일분의 장비와 식량을 다시 꾸려 아들수 계곡으로 향했다. 거리가 멀어 소형버스를 이용, 아들수강을 따라 가풀막진 산길을 곡예하듯 달리니 커다란 대포가 반대편 산중턱을 향해 놓여 있었다. 인위적으로 눈을 쏟아내려 더 큰 눈사태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이 부근에만 10문이 있다고 했다. 도로는 호텔과 7∼8동의 배럴, 텐트 사이트가 있는 잔투간 알파인 캠프에서 끝났다.
이곳에서 아들수 계곡 탐사의 베이스 캠프로 이용되는 그린 호텔까지는 도보 트레킹 구간. 계곡 왼쪽을 따라 뻗은 등산로 양쪽으로 숲과 야생화 만발한 초원이 번갈아 나타났다. 수정같이 맑고 찬 지류들이 쏟아져 내리는 계곡 좌우의 사면에는 캠핑나온 가족들이 옹기종기 앉아 여름을 만끽하고 있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비키니 차림의 아름다운 카프카스 여성들이었다. 테르스콜의 도로에서든, 모스크바 호숫가에서든 수영복만 입고 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한 달 반도 안되는 짧은 여름동안 햇빛을 가능한 한 많이 받기 위해 그런 차림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태양을 따라 돌며 햇빛을 절실히 그리워하는 그들은 해바라기를 닮은 사람들이었다.
계곡 상류 모레인 지대로 올라갈수록 만년설을 인 봉우리들의 모습이 뚜렷해졌다. 하얀산에 점점이 박힌 암릉들이 대원들을 유혹했다. 고도 2,300∼2,400m를 넘어서면서 삼림이 사라지고 고산초원이 시작됐다.
1시간 50분만에 해발 2,620m의 그린 호텔에 도착했다. 이곳은 실제 호텔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싱그러운 초록이 물결치는, 대형 빙하호수 옆의 고산초원 캠프지를 부르는 이름이다. 빙하수를 마시고 자라나 생명의 환희를 전하는 하얗고 노란 빛깔의 보석같은 꽃들은 하상을 유유히 거니는 검은 마소들과 어울려 보는 이를 눈부시게 했다. 특히 진보라의 초롱꽃이 지천에 널려 있었는데 계곡에 구름이라도 깔리면 구름 위의 꽃밭, 천상의 화원이 되곤 했다. 날씨와 해의 방향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변화하며 대원들을 흥분케 했다.
그린 호텔 주변에는 러시아 국내와 유럽에서 온 산악인들이 20여 동의 울긋불긋한 텐트를 설치한 채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는 그린 호텔과 모스크바대 빙하기지 사이에 4동의 텐트를 쳤다. 30여 년 전 지어진 숙소와 식당 등 2동의 검붉은 함석오두막과 기온과 기압 등을 측정하는 백엽상으로 구성된 빙하기지에는 방학을 맞은 10여 명의 모스크바대 학생들이 묵고 있었다. 볼쇼이 카프카스에는 무려 2,200여 개의 빙하가 발달해 있는데 온실효과에 따른 환경재앙으로 지난 100년 동안 절반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 기지는 그 빙하들과 눈사태 연구용으로 설치해놓은 것이었다. 대원들은 금새 그들과 친숙해져 밤늦게까지 기타를 치며 러시아 민요와 팝송을 부르거나 축구시합을 통해 긴장을 풀며 내일의 등반을 준비했다.
본격적인 카프카스산맥 탐사에 앞서 대원들은 테르스콜의 구조대 본부를 방문했다. 대원들을맞이한 부대장 자말은 “3개 팀 25명으로 구성돼있으며 24시간 사고에 대비, 대기하거나 순찰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시즌에 80∼100명이 구조대의 도움을 받는데 지난해에는 우쉬바(Ushba:4,700m)에서 8명이 하산도중 얼음 붕괴로 사망했다. 탐사대가 엘브루즈를 등반하는 동안에도 체겟봉 등지에서 5명이 조난사해 구조대를 바쁘게 했다. 탐사대가 `‘2002 한·일 월드컵’을 홍보하며 축구공과 배지를 선물하자 자말은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와 특히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한다”고 덕담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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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치는 한국인 최초 등정

“네팔은 너무 대중화됐고 남아메리카는 관광지가 되어버렸으며 알프스는 사람이 많아 혼잡해 보인다구요? 진정한 산악 모험의 마지막 참맛을 찾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10년 동안 러시아와 중앙 아시아가 당신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카프카스를 비롯 러시아의 산들을 소개한 책 ‘금지된 산들(Forbidden Mountains)’은 이렇게 등산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카프카스의 산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등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고 오염도 되지 않아 매력이 넘치지만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소비에트 제국의 해체는 닫혀 있었던 이들 놀라운 산군들의 문을 한순간에 열어 젖뜨렸다.
엘브루즈에서 보면 동서로 카프카스의 주능선이 장엄하게 달린다.
돈구조룬(Dongusorun:4,468m)과 나크라타우(Nakratau:4,451m)를 필두로 어금니처럼 솟은 우쉬바(Ushba:4,700m)와 스켈다(Shkhelda
:4,320m), 바쉬카라(Bashikara:4,241m), 체겟카라(Chegetkara:3,770m) 등 고봉들이 이어진다. 볼쇼이 카프카스에는 5,000m급 봉우리 14개와 4,000m급 12개 등 등반성 높은 봉우리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들의 파노라마는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올라 보고 싶은 열정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렇지만 엘브루즈와 우쉬바, 체겟봉을 제외하고는 한국인에 의해 등정된 봉우리가 없었다.
탐사대가 아들수 계곡으로 들어온 데는 이러한 우리 산악계의 과제를 풀기 위한 의도도 담겨있었다.
가이드와 상의 끝에 구마치(Gumachi:3,805m)와 처쳇(Chotchat:3,740m), 알프스의 마터호른을 닮은 잔투간(Dzhantugan:4,012m) 등 3개봉을 도전 대상으로 정했다.
7월 19일 새벽 5시40분 첫 대상 봉우리인 구마치를 향해 출발했다. “여러분이 성공하면 한국 초등이다. 최선을 다하되 안전에 주의하기를 바란다”는 단장의 당부를 되새기며 릿지와 설선이 만나는 2,820m 지점을 지나 1시간만에 암설혼합지대에 도착, 이중화에 아이젠을 부착했다. 완만한 눈언덕 2개를 오르니 60도 경사의 설사면이 나타났다. 지그재그로 비탈을 올라서는 동안 어느새 햇살이 눈부시게 들기 시작하면서 구마치봉이 완연히 드러났다. 뒤를 돌아보니 육중한 엘브루즈에도 여명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원들의 체력이 천차만별인데다 첫 등반이어서 그런지 행렬이 길어지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더욱이 햇발이 닿자마자 눈이 녹으면서 이중화 바닥에는 스노우볼이 생겨 대원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오전 10시 3,340m 지점의 4번째 눈언덕을 넘어 안부(3,600m)에 도착했다. 오른쪽으로는 잔투간 피크가 날카롭게 서 있고 릿지 건너편 암릉릿지와 설벽은 U자곡을 형성, 장관을 이뤘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바위릿지 아래서 대열을 재정비했다. 모두 함께 올라서기 위해서였다. 50m의 암릉을 곡예하듯 타고 올라 정상에 다다른 것은 낮 12시 30분. 진행 방향 왼쪽으로 돈구조룬, 오른쪽으로는 또 다른 계곡인 아들수 계곡의 산군들이 펼쳐졌다. 통신·식량을 담당한 막내인 유승규(19) 군은 등정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물 마시고 싶어요.”
아들수 계곡에는 거의 매일 저녁 무렵 소나기가 내렸다가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개곤 했다. 산의 정기는 등반의 피곤함까지 물리쳐 주는 듯 대원들은 휴식일에도 일찍 일어나 산책하거나 식사준비를 하고 폭포 근처로 물을 받으러 달려가곤 했다. “고소에서 건강을 유지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대장의 충고도 대원들을 더욱 분주하게 했다. 대장은 틈나는 대로 고소증세 극복요령과 장비 사용에 대해 교육을 실시했다.
다음 목표는 처쳇봉. 7월 21일 오전 6시 베이스 캠프를 나서 모레인(빙하에 밀려 퇴적된 암석과 토사)과 청빙지대를 통과, 거대한 세락(serac:빙탑) 아래서 아이스 폴(ice fall:빙하지대에 나타나는 크레바스 밀집지대나 급사면)을 우회하기 위해 왼쪽 암석지대로 올라섰다. 끊임없이 돌들이 흘러내리는 불안정한 비탈의 여기 저기에서 “낙석!”을 외치는 목소리가 잇따라 터져나왔다. 돌틈 사이로 피어난 앙증맞은 꽃들이 황량함을 덜어주었다. 대형 크레바스를 끼고 반원으로 휜 폭 1m 남짓한 설사면을 오르니 정상을 향한 전망이 트였다.
그곳에선 모스크바에서 온 7명의 젊은이들이 로프를 깔고 오르고 있었다. 대원들을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러시아 산악인들의 등반장비는 우리의 ’70∼’80년대 수준. 옷 색깔이나 신발, 안전벨트 등은 역사가 오래된 대학산악부 동아리실에 걸려있는 선배들의 빛바랜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항상 조를 이뤄 함께 행동하며 위험한 지점에는 반드시 자일을 설치하는 등반 스타일에서 기본에 충실하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PAGE BREAK]마지막 피치를 오르는 동안 가벼운 눈사태가 발생, 눈더미가 대원들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70∼80도 급경사를 피켈로 찍고 오르면서 ‘세상이 모두 수직으로 이뤄졌다면 어떻게 살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까마귀 한 마리가 유유히 창공을 헤쳐갔다. 정상에는 작은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하산할 때는 빙하수가 불어나 모레인 지대를 관통하는 바람에 우회하느라 애를 먹었다.
처쳇과 구마치 오른쪽에 자리잡은 잔투간은 탐사 대상 중 난이도가 가장 높아 보였다. 북벽 아래 모레인 지대를 지나거나 잔투간 패스(3,460m)를 거쳐 동릉을 타고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는 데 최소 12시간은 잡아야 했다. 7월 23일 새벽 2시간 동안 눈평원을 거슬러 올라 암석지대 밑에 섰다. 이 구간은 낙석 통로여서 위에서 확보를 봐주며 한 사람씩 자일을 잡고 올라야 했다. 대원들이 모두 통과하는 데는 40분이 걸렸다. 고원을 가로질러 첨봉 아래 3,500m 지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긴급 회의를 했다. 정상 릿지는 푸석푸석한 바위로 이뤄져 위험이 높은데다 시간도 오래 걸릴 것으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결국 5명만 오르기로 했고 2시간 35분만에 정상에 도달했다. 하산은 플래토를 거치지 않고 급경사의 사면을 현수하강했다. 등반 도중 3명이나 크레바스에 빠지는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14명의 대원들은 6박 7일 동안 온갖 역경을 딛고 카프카스 3개 봉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올랐다. 끈기와 협동,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정신의 승리였다.

카레이스키의 애환을 느껴보다

카프카스는 아프리카 동부의 사바나(흑인종), 몽골의 건조한 초원지대(황인종)과 더불어 인류 발상지중 한 곳으로 꼽힌다. 코카서스 인종이라 불리는 백인종의 고향이다. 하지만 여러 방향에 걸친 민족의 이동으로 지금은 문화가 다른 여러 소수 민족이 섞여 있다.
그 중에는 ‘카레이스키’라고 불리는 한인 동포들도 포함돼 있다. 그들은 중국이나 사할린, 블라디보스톡 등 러시아 원동(遠東) 지역에 살고 있는‘조선족’과 구분돼‘고려인’이라 칭해진다. 대다수는 조선말기 심한 기근과 학정(虐政)에 못이겨 러시아 극동으로 옮겨가 살다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의 자손으로 해외동포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유랑의 세월을 보낸 이들이다.
탐사대는 러시아로 떠나면서부터 고려인들의 현황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쉽지 않았다. 심지어 주 러시아 한국대사관에서조차 별다른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다행히도 모스크바행 비행기에서 만난 교포 2세 김영웅씨로부터 북 카프카스 지역에 있는 고려인의 분포와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에 따르면 로스토프에 2만 명, 크라스노다르와 스타브로폴, 엘브루즈가 있는 카바르디노 발카리오에 각각 5천 명, 북오세티야에 3천 명 등 4만∼5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씨는 “러시아의 동포들이 연해주에 처음 진출한 것은 1863년으로 현재 5∼6세손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날씨가 따뜻하고 살기 좋은 북 카프카스 지역에는 1950년대 말부터 중앙아시아의 동포들이 이주하기 시작, 특히 소련이 해체되고 난 뒤 많이 몰리고 있어 고려인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대원들은 산맥 탐사가 끝난 뒤‘핏줄찾기’에 나섰다. 김씨로부터 소개받은 서 마이세이 니까라이비치(51)씨와 전화로 약속을 한 뒤 엘브루즈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130km)에 있는 카바르디노 발카리오 자치공화국의 수도 날칙(Nalchik)을 찾아갔다. 서씨가 30년 동안 근무해왔다는 날칙 중앙우체국에서 그를 만났다. 갑작스런 방문이었지만 그는 대원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대구 출신인 그의 집안은 러시아 원동에서 태어난 아버지 서 니콜라이(75)씨가 강제 이주 때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가 트럭 운전을 하며 가계를 일구었으며 1964년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했다.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묻자 서씨는 한 신축중인 교회로 대원들을 안내했다.
북 카프카스의 고려인들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개방된 이후의 일로 거기에는 기독교 선교단체들의 역할이 컸다. 서울 영등포 당일교회에서 부인과 두 딸 등 일가족과 함께 파송돼 선교활동중이던 김광선(42) 목사는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해 일본과 내통 혐의로 소금기 많고 척박한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된 우리 동포들은 17만 명에 달한다”며 “그들은 사실상 `‘집단 고려장’을 당했다고 여기면서도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으로 농사를 짓거나 공장·광산노동자로  일하며 뿌리를 내렸다”고 소개했다. 그 후 흐루시초프 때인 1956년 거주 이전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자 기름지고 드넓은 카프카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교회에서는 그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실도 운영하고 있었다.
[PAGE BREAK]탐사대는 김 목사와 서씨에게 그동안 고려인들이 살아온 얘기를 들려줄 만한 노인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이일용(83) 옹은 “부모가 지난 1903년 조선에 흉년이 들자 아무르 강 인근으로 건너왔으며 강제이주 후에는 타슈켄트에서 살다 이곳까지 옮겨왔다”고 소개한 뒤 “먼 이국땅에서 청년 학생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며 대원들의 손을 꼭 쥐었다. 대학 2학년때 2차대전이 발발하자 소련군에 입대, 평양과 서울을 오가기도 했다는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되자 전공인 지질학을 살려 북방지역에서 광산탐사를 해오다 1973년 은퇴, 지금까지 연금생활을 해오고 있다.
노 니콜라이(76)씨 역시 타슈켄트에서 옮겨와 트럭운전 등으로 생계를 꾸려왔으며 맏아들은 현재 부산에서 선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고려인도 많았으나 월급이 적고 몇 달씩 밀리는 바람에 기피하고 있다”며 “가정에서나 친구들끼리 거의 러시아어를 사용하는데 수년 전부터 우리말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함께 나온 서씨의 아버지는 “한국말을 잘못해 미안하다”며 여러 차례 쑥스러워하기도 했다.
카프카스의 고려인들은 김치와 개고기, 장국을 즐겨 먹고 화투놀이를 즐기며, 우리와 같은 성을 갖고 있는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불모지에 버려졌다 또 다시 낯설고 물설은 카프카스로 들어가 어렵게 뿌리를 내린 인동초들이었다. 대부분 집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밭에서 배추와 수박, 참외, 양파 등 채소와 과일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가고 있으며 근면하고 인정많은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었다.
안타까웠던 것은 탁월한 농사꾼인 그들도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고 월 10%에 달하는 고율의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하는 사례가 흔하다는 사실이었다. 8년 전 태권도 보급과 선교를 위해 카프카스로 들어온 박천수(46) 사범은 “그동안 고려인들의 삶을 지켜본 결과 농업부문에 대한 한국 정부나 민간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거창한 행사보다 특수작물 전문가들이 와서 3박 4일 가량 세미나도 하고 농사지도와 함께 자신감을 심어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원들은 전통인형과 축구공, 배지 등 2002년 월드컵 기념품을 선물한 뒤 서씨 집을 방문, 아버지 서씨의 발라라이카 연주로 아리랑을 들으며 향수를 달랬다. 서씨는 “우리는 팔자대로 운명대로 러시아로 흘러왔지만 한국은 사랑하는 우리의 모국”이라며 “앞으로 한민족이 국경 없이 살 수 있게 되고, 사랑하는 조국에 갈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원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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