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의 청소년 세대를 가리켜 흔히들 N세대 또는 디지털 세대라고 부른다. X세대 이후 청소년 세대를 지칭하는 용어는 일종의 부호로 바뀌었다. 질풍노도의 시대니 주변인이니 하는 용어는 이제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 된 것 같다. 청소년문화를 가리켜 저항문화, 부분문화, 하위문화니 하는 설명들도 이제는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의 정답 표시를 위해 자신들을 가리키는 과거의 단어들을 외우면서 청소년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요즈음의 청소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TV 광고를 보라는 말이 있다. 광고란 상품을 팔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마케팅 방법의 하나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매우 엄청난 비용을 쓰고 있고 이 비용은 결국 상품값으로 소비자들이 지불하게 된다. 그러나 원가 상승으로 물건 판매가 감소할 수 있음에도 왜 기업들은 광고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가? 특히 이른바 N세대 마케팅이라 불리듯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광고에 열정을 쏟고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업은 이윤이 목표이다. 광고비 이상으로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N세대 마케팅의 성공 여부가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생존 여부를 판가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청소년들의 의식과 가치관, 그리고 그 문화를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기업이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기업들이 스스로 그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무조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환경과 사고 방식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 얼마 전에 나왔었던 한 과자 광고는 모델 얼굴과 몇 가지의 숫자를 마치 무의미한 것처럼 나열하였다. 그러나 그 숫자들은 핸드폰의 번호를 이용하여 과자의 이름을 나타내는 문자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고의 대상은 누구인가? 이 숫자를 알아들을 수 있는 청소년집단이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또는 그 밖의 현장에서 단지 청소년들을 만난다는 것만으로 청소년세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것이 가능할지 생각해보게 한다. 청소년들의 속마음과 문화를 정확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이른바 새로운 세대의 특징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의 접근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정리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점점 더 이렇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일에 대해서도 어른들이 생각하고 있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만 그 공통점은 어른들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간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새로운 세대의 가치관과 관련하여 과거에는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이제는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어진다는 지적을 한다. 이들은 이제 자신이 판단하여 좋은 것인가 아니면 싫은 것인가에 더 큰 의미를 둔다고 한다. 평범함에 대한 거부는 ‘무난함’이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어른들과 달리 분명한 표현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공부와 논다는 것도 이제는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모범생이고 얌전하며 착해서잘 놀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은 이미 사회에서도 통용되지 못한다.
[PAGE BREAK]시키는 일에만 소처럼 충실한 사람은 지식정보사회에서 반드시 실패하는 사람이며 그래서 기업에서는 공부만 잘하는 소극적 인재보다는 다양한 재주를 가진 개방적인 인재를 찾고 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는 아이들이 인기를 얻게 된다. 공부와 논다는 것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건널 수 없는 강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사례가 청소년세대를 대표하는 특징의 전부는 아니다. 더군다나 모든 청소년들이 이러할 것이다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한 때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청소년상에 대한 강조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 자기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학교 밖을 벗어나면 성공할 것 같은 신화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에 만족을 못하고 스스로 학교를 떠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육당국에서조차 대안학교나 대안교육을 위한 정책을 거론하는 것이 어찌보면 학교 교육에 열정을 가진 교사들을 씁쓸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청소년들이 다 그럴 수는 없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특별한 재주가 있는 아이들이 전체와 비교한다면 얼마나 되겠는가? 오히려 또는 이상을 차지할 보통의 아이들에게 더 특별한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누구나 자신의 재능을 찾고 그 재능을 키울 기회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어떠한 유형에 속하든지 우리 사회와 어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이 청소년들은 이른 바 지식정보사회라고 하는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라는 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21세기 지식정보사회의 인재상에 대한 제안을 보면 새로움에 대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창의력과 인성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한다. 산업사회 속에서 태어나 자란 어른들이 나면서부터 TV를 보고 컴퓨터와 인터넷, 무선통신망을 통한 사이버 세계의 문화 속에서 자란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사회는 붕어빵과 같은 인재보다는 독특한 생각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인재를 찾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문화의 시대이다. 어른들에게는 그 실체가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어른들의 고정관념과 상관없이 청소년 세대의 문화는 변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도 생각보다 빨리 변해간다는 것이다.
청소년세대에 대한 문화적인 접근은 학교의 교육현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야 교과서를 매개로 한 평면적인 교육이 아니라 삶 중심의 입체적인 교육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학생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학교 울타리로 보호를 받고 있는 갇힌 세상은 아니다.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가 교육내용으로 들어와야 학교 교육의 내용도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10년간 아니 20년간 유지되어오던 학습 내용도 앞으로는 1년도 지속되기 어려울 수 있다. 변하는 아이들을 앞서 가지는 못해도 가까이 뒤따라갈 정도는 되어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청소년들의 문화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과연 어른들은 얼마나 아이들을 이해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청소년의 문화를 위한 토양으로서 사회적 환경이 가진 의의나 한계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어른들의 이중구조의 모순
변해가는 청소년들과 비교하여 어른들에게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생각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잠재된 시각이 있다. 그것은 보호와 통제의 대상으로서 청소년들이다. 청소년에게 관심을 갖는 때는 1년에 두 차례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연말연시와 5월이다. 12월과 1월에 각 지역에 걸리는 현수막(대체로 경찰서에 걸려 있는)에서는 ‘연말연시 청소년을 선도 격려합시다’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이 말은 보기에는 어른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 반면에는 연말연시에 방황하는 청소년을 선도 또는 단속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PAGE BREAK]5월이 청소년기본법에 의한 청소년의 달이기는 하지만 실제는 어린이의 달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외에는 학교 폭력, 화재사고와 같이 문제가 발생할 때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다. 물론 어느 때나 온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입시와 관련된 상황은 예외로 해야 할 것이다.
학교 성적과 입시에 대한 관심을 제외한다면 청소년들이 관심을 얻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특히나 학교 밖에서 청소년들이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갖고 건전하게 살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방향에 모두가 동의는 하지만 정책적인 지원은 항상 후순위로 밀려난다. 특히 사회적 환경은 청소년을 위한 건전한 환경이 필요하다고 동의하는 것과는 역방향으로 흘러간다. 학교 앞의 러브호텔 문제로 한 때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학교 앞은 그래도 집단적인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학부모 입장에서 당장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유흥문화는 무조건 청소년들이 접근만 못하면 상관없다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단지 학교만은 아니다라는 점은 다시 강조되어야 한다. 물론 지금 여러 가지 한계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최선의 교육적 환경을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청소년들이 삶을 살아가는 학교 밖은 최악의 교육적 환경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19세 미만에게 술과 담배 판매를 금지하기 위해서는 술을 파는 구역이 구분되어야 한다. 주택가와 유흥가와 교육시설이 한 데 어울려 있는 환경 속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선도 보호해야겠다는 어른들과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중구조 속에서 청소년들은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의 솔직한 생각은 학교를 든든한 울타리로 생각하고 청소년들을 울타리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해야 안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학교 밖으로 나오고 싶은 청소년들의 욕구는 통제와 금지 속에서 점점 커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이중구조 속에서 학교의 영향력은 점차 더 감소하고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자유를 추구하였다. 여기에 사교육 의존과 같은 다양한 상황과 맞물려 학교 교육에 대한 불신과 함께 학교위기 현상도 초래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정작 학교 밖으로 나온다고 하여도 지금은 그저 막연하게 내몰리고 있다. 청소년들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사회전체가 교육의 장이라는 교과서적인 이야기에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학생 선도 보호대책, 청소년 성매매 대책, 출입제한 지역 대책과 같은 소극적 정책만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다. 실상은 어른들의 상업적 욕구에 따른 환경이 통제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된 환경 속에서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건전한 성장을 원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건전한 문화가 없다는 지적은 어른들의 걱정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청소년들에 대한 질책이 될 수도 있다. 좀더 심하게 비유하자면 왜 너희는 좀 더 착하게 살지 못하냐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과연 그러할 자격이 어른들에게 있는 것일까라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가지 말아야 할 곳은 많지만 언제라도 가라고 추천할 만한 공간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유해환경 문제에 발목을 잡혀 있을 때는 아니다. 물론 금지해야 할 것은 사회적이든지 정책적이든지 확실한 대처가 필요하다. 건전하지 못한 환경 속에서 제한된 공간 울타리와 통제, 금지를 통해 청소년에게 건전하게 자랄 것을 요구하는 것, 더 나아가 창의적 인재가 되어달라고 강요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이제는 보다 적극적인 관점이 요구된다. 변화하는 청소년 세대의 문화가 보다 생산적이고 창의적이며 다양화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경쟁의 시대, 지식정보사회, 21세기 문화시대를 말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인재 양성을 위한 거창한 구호와 계획이 실생활 속에서는 기본적인 토양도 갖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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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문화, 삶의 탈출구에서 창의력의 원천으로
그렇다면 사회적 환경이 청소년들의 건전한 성장을 넘어서서 창의력 개발의 토양으로까지 확대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우선은 학교가 가지고 있는 부담이 감소될 필요가 있다. 학교에 너무 많은 짐을 지우다 보니 학교 밖에서 경험해야 할 활동의 기회가 제한되어 왔다. 결국 학교에서 모든 것을 다해줄 수 없음에도 우리는 학교에만 책임을 물어왔다. 문제는 너무 많은 교육내용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 내용들이 정작 21세기에 필요한 지식인지조차 의문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한 보도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영어교육 방식이 라틴어식 교육이어서 비실용적 영어 교육이 되었다고 한다. 라틴어는 누구와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언어이다. 실생활에서는 죽은 언어이다. 그저 외우고 단어와 문법을 익혀 이해할 수 있으면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나 중등학교뿐만 아니라 대학교육조차 사회에서 필요한 능력 개발은 비실용적이어서 기업은 매년 막대한 비용을 지불한다고 한다. 물론 실용적인 지식과 기능만 가치가 있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그 바탕이 되는 인문학적인 지식이나 기초 과학이 없다면 그 발전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이제는 21세기의 교육내용이 살아 있는 교육이 되기 위한 방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용과 방법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 즉 교육적 차원에서도 이제 청소년들의 놀이문화에 대한 관심이 달라져야 한다. 놀이문화를 통한 체험활동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체험활동 경험은 단지 학교 학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청소년들의 사회적 능력 개발과 성장에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된다. 학교 안에서도 그리고 학교 밖에서도 다양한 문화체험 활동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물론 많은 어른들의 걱정은 아이들이 유해한 환경에 빠지고 불량하게 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제대로 놀 수 있는 좋은 사례도 볼 수 없었고 또 그러한 활동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도 어릴 때부터 갖지 못하였다.
놀이란 보다 폭 넓게 보면 생활 자체가 된다. 창의적 인재를 요구하는 21세기 교육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창의적이고 자발적이며 좋아서 하는 활동의 경험이 필요하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매니아, 골드칼라라고도 부르며 앞으로의 사회를 주도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은 지적해왔다. 청소년들에게 놀이문화란 단순히 건전하고 착하게 시간을 보내는 활동이 아니다. 놀이를 통한 체험활동이란 누가 시켜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경험, 창조적인 경험을 갖게 한다. 청소년들에게 논다는 것은 다양성과 창조성의 경험이다.
청소년을 위한 놀이공간, 문화공간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의 수량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청소년시설의 수는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다. 문제는 전용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시설조차 수익구조 중심으로 내몰리고 있고 다른 문화 복지 공간도 말할 것 없는 실정이다. 이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정책적인 이중구조의 문제이다. 단순히 청소년시설만 있으면 청소년놀이 공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의 놀이문화, 그리고 놀이공간이란 일정한 틀에 얽매이는 것도 아니고 건물 공간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경험이 중요하다. 실패도 있을 수 있다. 어른들은 일정한 틀과 공간에 청소년을 가두어 놓지 않으려는 자세부터 가질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스스로 건전한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스스로 문화적 경험을 만들어 가면서 주입식에 의한 창의성이 아닌 놀면서 스스로 체득하는 진정한 창의력의 터를 제공해야 한다. 학교 교육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도 학교 밖에서의 청소년의 놀이활동과 자율문화는 필요한 일이다. 사회의 다양한 기관들이 학교와 함께 청소년들의 자율적인 문화 공간을 제공하는 노력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