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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위의 발자국

김호신(경기 포천여중 교사)



올 봄에 나는 이 학교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출을 명 받아 와 낯설고 어색하기도해 물끄러미 뒷산만 바라보았습니다. 산에는 진달래를 비롯해 벚꽃이 어찌나 자기들의 웃는 모습을 봐 달라고 조르는지 귀찮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나를 성가시게 한 꽃들이 밤사이에 갑자기 지고 온산이 파란색으로 뒤덮였습니다. 친구가 들려 준 말이 생각납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가로수를 가리키며 친구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나무가 파란색 잎을 지니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고 있느냐고. 나는 뜬 금 없는 그의 질문에 당황하면서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사람의 눈이 파란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뭇잎이 파란색일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친구가 내 말을 듣고 설명해 주길 나무는 원래 여러 가지 색소를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무를 세밀히 분석해 보니 나무가 가장 싫어하는 색이 파란색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가 가장 거부하는 색이 파란색인데 그 색과 더불어 나무는 일생을 같이 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너무 놀라워 내 작은 가슴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습니다.

약 15년 전의 일입니다. 장교로 제대한 나는 교사가 되었지만 지역예비군으로 편성되어 동원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어디에 가서든 기죽지 않고 자신 있게 행동을 하였습니다. 점심시간에 우린 훈련장을 빠져나가 그 근처 허름한 식당에서 닭도리탕을 시켜 식사도 했습니다. 해 질 무렵 훈련이 끝나면 비릿한 현실을 안주 삼아 밤을 패가며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며칠 훈련을 받다 보니까 누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후배가 말수를 죽이고 그저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군에서 제대를 하고 사회에 적응이 안돼 세상 물결에 부딪혀 표류하는 듯 보였습니다. 무슨 말을 물어도 시큰둥하였고 그저 책임감 없이 떠도는 회색구름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나타내려고 무던히 말을 많이 늘어놨지만 그만은 유독 병이 든 중닭처럼 머리를 떨구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제대한 후 무엇을 하였느냐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대답하기를 그저 산에서 놀고 지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세상에 ROTC 장교 출신으로서 저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나 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나는 그를 세워놓고 처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래도 그는 나를 의식하지 않고 훈련이 끝나는 그날까지 히쭉거리며 잘 따라주었습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떤 후배는 철이 없어서인지 자기가 한 달 뒤에 결혼을 할텐데 선배님들이 참석할거냐 안 할거냐 확답을 받겠다며 때를 썼습니다. 꼭 와달라고 하는 그 후배가 딱해 보여 나는 속으로 지금 서로 바쁜 세상에서 훈련을 받으러 와 이 곳에서 처음 대면한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할 선배가 과연 있겠는가 하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습니다. 우리가 모이면 그만큼 허물이 없다는 겁니다. 일주일간 동원 훈련을 한가하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습니다. 그 부초 같은 후배가 나에게만 특별히 드리니 집에 가서 조용히 보아달라며 누런 색 봉투를 슬며시 건넸습니다. 저녁 무렵 집에 도착한 나는 그의 피곤한 간청을 회상하며 무심히 봉투를 뜯어보았습니다. 조금 작고 얇게 생긴 책이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몇 장 넘기면서 나는 뒤통수를 되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의외로 이름 있는 화가였고 얼마 전에 전시회를 한 팜플렛을 제게 선물을 한 것입니다. 그가 여러 각도로 세상살이를 그려 인쇄한 하나의 그림책이었습니다. 그가 혼신의 힘 기울여 그린 그림을 나는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바로 이거다. 인생이 허무해 내가 그토록 방황한 것은 채울수록 목마른 강 같은 갈증의 욕구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먼 산을 넋 놓고 바라본 것도 어쩌면 자기가 걸어야 하는 길 위에 고통을 잠시 잊으려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습니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 선배가 무지해 자네가 힘들어하는 줄도 모르고 나무란 것에 대해 서운해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후배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미술교사를 하였답니다. 얼마 전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 화가로서 불후의 명화 한 작품이라도 남겨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교직을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아내가 대학 강사를 하면서 근근히 꾸려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PAGE BREAK]요즈음은 틈틈이 그림을 그리지만 아기 보는 일이 하루의 일상이 되었다며 멋 적게 웃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골몰히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 그가 그림을 그려 흔적을 남기 듯 나도 무엇인가 남겨야 한다는 각오를 화인처럼 새겼습니다. 얼마동안 나는 그 후배와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골 풍경을 사진기로 찍어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내 차에 그를 태워 험한 산골짜기까지 들어가 그를 도와 사진을 찍기도 하였습니다. 겨울 방학이었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살얼음 낀 빙판 언덕길을 그와 함께 오르다 미끄러져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습니다. 그렇듯 아찔한 순간을 몇 번이나 경험해 가며 그와 함께 동행했습니다. 한 번은 눈오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윗도리를 벗고 맨 몸으로 추운 산등성이에서 어설픈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어 그의 그림의 한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특이한 점은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까 그가 대답하길 깨끗하게 살고 싶었고 담배는 몸에 해를 끼치며 술은 손이 떨려 그림을 그리는데 지장을 줄 수도 있기에 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을 그가 숨넘어갈 듯 전화를 했습니다. 월간 미술에 자기의 그림과 기사가 실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서 책방으로 가 나보고 직접 사서 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늦은 저녁에 나는 잠을 밀치고 일어나 서점을 찾아가 그의 그림과 기사를 보았습니다.

내 소년의 시절 아브라함 링컨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 지금의 모습을 나이 40이 되었을 때 책임 질 수 있느냐’고 어떤 책인지는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분명 내게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나의 삶에 어둠의 그늘이 드리워 질 때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흑인을 노예에서 해방시킨 링컨을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성난 돌풍으로 하여 나의 삶이 피폐해졌을 때 나는 성경에서 역경을 딛고 일어난 기적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후배에게 흔적이라는 단어를 미친 듯이 배우고 나는 시를 써야겠다는 각오를 하였습니다. 얼마 간 시를 짓다 보니까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망가진 세상이기에 고칠 것이 너무 많아 나는 격렬하게 글을 썼습니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낚시 바늘에 걸려 퍼들적거리는 물고기처럼 실성한 듯 날뛰었습니다. 나는 정의사회 구현,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언어에 속은 세월과 함께 살아온 교사입니다. 그와 헤어져 세월은 흐르고 몇 년 전 나는 우연히 한 신문을 읽은 듯합니다. 그 신문지면에 그의 얼굴과 이름이 선명하게 나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느 비중 있는 미술관에서 그를 올해 최고의 화가로 선정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그가 화가로서 자기가 바라고 원하는 경지까지 올라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그의 그림이 아름다워 그 충격으로 인하여 시를 쓰기 시작한 나는 지금까지 시집을 6집 내었고 제2건국위원회가 선정한 ‘신지식인’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내 의지로는 근접하기도 힘든 ‘한하운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요즈음 교사들은 몇 명만 모이면 승진 점수 얘기가 주를 이룹니다. 아직 파랗게 젊은 교사들도 승진 점수에 매우 민감합니다. 관리자는 전출 온 교사의 낯을 익히기도 전에 먼저 하는 질문이 승진을 할거냐 아니면 포기를 한 거냐를 묻고 눈치를 살펴 업무를 부여합니다. 승진을 목적으로 교직에 발을 들여 놓은 교사는 그 질문의 취지를 알고 있는지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지각있는 교사는 자존심이 상해 머리를 반쯤 돌리고 관리자의 말을 건성으로 들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세상을 등진 친구가 불현듯 떠오릅니다. 그는 나와 같이 고등학교 때 운동 실력을 겨루고 같은 대학을 특기생으로 같이 들어가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운동부가 해체되고 그와 나는 ROTC에 입단하여 훈련을 같이 받았습니다. 피 눈물나는 과정을 거쳐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임관과 동시에 보병학교에 가서 힘겨운 훈련을 함께 거치고 그는 공수부대로 나는 보병부대로 전출 받아 군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덧 약속된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그와 나는 무사히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어 약속이라도 한 듯 앞다투어 교사가 되었습니다. 결혼도 비슷하게 하여 그의 아들과 내 아들이 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는 모교에서 교사를 하여 누구보다 학생들을 위해 솔선수범 했을 겁니다.
[PAGE BREAK]교사는 2년마다 한 번씩 건강진단을 받습니다. 그의 간에 이상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설마 하고 지나쳤습니다. 교사로서의 책임의식과 가장으로서의 본분 때문에 아마 쉬지도 못했을 겁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간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동기생들은 병원 비용에 보태라고 조금씩 성의를 보였습니다. 몇 년 전 망년회에서 나는 그를 만났습니다. 술잔을 기울이지 못하고 씁쓸해 하는 그에게 나는 다가갔습니다. 먼저 건강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괜찮다고 하는 그의 눈가에 이미 검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나 역시 간에 이상이 있다고 말하자 그는 나의 손을 힘없이 펼쳐 보더니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자신의 투병과정을 목소리 낮춰 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날 그가 나에게 한 말이 너무 의미가 있어 나는 그 친구가 생각날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립니다. 가족과 함께 병원을 들렸답니다. 가슴 조리는 시간을 넘기고 의사로부터 간암이라는 최종 통보를 받았답니다.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 와 차를 길 가장자리에 세워 놓고 하나밖에 없는 처와 자식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돌아 와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 호흡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죽음에 직면하는데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그와 같은 슬픔을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죽음과의 이별을 가장 슬프게 흐느끼는 사람이 그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그의 숨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같이 살을 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서글픈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몇 달 전 나는 여섯 번째 시집이 출판되어 종로에 나와 있었습니다. 핸드폰이 울려 받아보니 대학동기생의 전화였습니다. 그 아픈 친구가 지금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니 시간 나는 대로 면회를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신촌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중단하고 그가 있는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는 곤한 잠을 자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침대 아래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차마 깨울 수가 없어 문 앞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내가 온 것을 꿈에서 보았는지 그가 눈을 떠 내 이름을 부르며 낯선 웃음을 띄웠습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수척해 있었고 목과 어깨부문은 노란색으로 물들인 듯 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보더니 오히려 나를 걱정하며 건강을 물어 오기에 나는 작년에 농촌학교로 내신을 내어 전근을 가 그곳 산과 들에서 나오는 두릅나물, 민들레, 익모초 등 보이는 대로 뜯어다가 주전자에 넣고 한참을 끓여 차처럼 마신다고 하였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그의 아내가 저이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고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그날 그가 나에게 너무 뜻있는 조언을 했습니다. 자기가 몇 년 전부터 간암으로 고생을 하여 식이요법도 해 보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휴직을 하고 쉬었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학교의 업무도 잠시 뒷전에 묶어 놓고 몸을 회복시켰어야 했는데 그게 불찰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날 나에게 누군가를 조금은 원망하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오히려 그것이 그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실낱 같은 종교적 소망을 갖고 그와 헤어졌습니다. 몇 달은 정말 유속같이 흐르고 해질 무렵 그의 죽음을 전달받고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미 내 마음에 예견된 일이었기에 오히려 차분했습니다. 그 다음날 나는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그의 아내와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습니다. 금새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서러운 절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상국 시인의 시가 저절로 생각났습니다. ‘세상은 큰 잔치 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라는 중간 구절이 떠올라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서러운 눈물을 애써 감추면서 나는 이렇게 되뇌였습니다. 내가 이렇듯 가슴 아프게 흐느끼는 것은 꼭 친구의 죽음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나의 슬픔이 너무도 겨워 이 곳에 스스로 무너져 울고 있다고 남 모르게 읊조렸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죽어 세상 떠나면 속 썩인 아들이 자기 설움을 못 이겨 가장 많이 애통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이 나이 돼서야 조금 이해를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그의 상이 나가는 날은 다행히도 하늘이 맑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영구차는 그 친구가 근무한 모교를 들러 장지로 향했습니다.아카시아 나무가 우리의 슬픔을 먼저 알았는지 모두 상복을 입고 고개 숙이고 서있어 산들마저 그새 늙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매몰차게 그를 땅속 깊이 묻고 그것도 모자라 발로 꾹꾹 밟았습니다. 이 세상에 들었던 깊은 정들을 때기 위해 그를 밟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한 사람을 가슴에 묻고 모두 눈을 씻으며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몇 년 동안 병 수발하느라 고생한 그의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의 몸의 피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창백한 얼굴이 너무 안쓰러워 나는 살아 있음에 죄인이 되어 애를 써 눈을 돌렸습니다. 하늘이 무너져 신음하는 아내에게 천만 가지 말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날 나는 사람들과 헤어져 홀로 강가에 갔습니다. 강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강물이 먼저 나를 보더니 바위가 자기를 때렸다고 일렀습니다. 저 아래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바위가 나를 올려다보며 대꾸하길 강물이 달려와 스스로 부딪혀 놓고 저런다며 껄껄거렸습니다. 강물도 나도 모처럼 그를 따라 크게 웃었습니다. 웃고 있는데 눈물이 맺힌 이유를 당신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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