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중국의 시도를 철저히 분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구려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체계화하여 그 역사가 한국의 역사임을, 그리고 그 민(民)이 한민족임을 분명히 해야 하며, 정치적으로 남북이 한 민족 한 국가임을 하루 빨리 세계에 천명해야 한다. 역사학을 통해 남북한의 상호이해를 증진하고, 법적 장치와 정책을 통해 민족적 유대감을 고양시킬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중국은 2001년 6월에 ‘동북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 이를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한다)’를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2월 정부의 승인을 받아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1996년에 비공개로 ‘고구려사와 동북 지역의 강역문제’를 중점연구과제로 설정하고, 사회과학원의 변강사연구중심(변강사연구센터)으로 하여금 이를 주도케 했다고 전해진다. 사회과학원은 중국 최고의 학술기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가 설정한 정책과제를 국가예산으로 수행하는 준정부기구이다.
중국은 공북공정 관련 사업에 2002년부터 5년간 200억 위안(약 3조 원)을 투입하기로 하였고(연구비만 24억), 둥베이3성[東北三省; 지린성(吉林省)·랴오닝성(遼寧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성 위원회가 사회과학원과 연합해 사업 추진에 나섰다. 동북공정은 수년간의 은밀하고 치밀한 준비 기간을 거쳐, 중국 정부가 국가정책으로 공식 채택하고, 막대한 국가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여하여 조직적·체계적으로 추진하는 국가사업인 것이다.
동북아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 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어 낙후를 면치 못하였던 동북변경지방에 대해 중국 정부가 이제 관심을 갖고 투자하겠다는 것이야 우리가 시비할 문제가 아니지만, 이 동북공정의 핵심 연구 내용이 고조선 및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는 쪽으로 향하면서 우리의 정체성 자체를 짓밟기 시작했다는 점은 우리로서 결코 좌시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동북공정에 참여한 대다수의 중국학자들은 한입으로 말하듯 일사불란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첫째, 고구려는 중국의 영역에서 기원하였고 중국 왕조와 조공 또는 책봉 관계를 맺어 지속적으로 예속되어온 데다가 그 멸망과 더불어 대부분의 주민이 중국에 흡수되었으므로 그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며, 둘째 현재의 한민족은 신라 및 백제족에 소수의 고구려족이 섞여 이루어졌으므로 고구려족을 계승한 민족이라고 볼 수 없고, 셋째 같은 이유로 고조선 또한 현재의 한민족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고조선 이래 누천년을 두고 이어져 온 우리 한민족사의 계기적 발전과정을 전면 부인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드는 내용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고구려사가 한국사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중국 학자들이 갑자기 천편일률로 이처럼 터무니없는 주장을 피력하고 나선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를 중국 정부가 의도적·조직적으로 유도·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학자의 양심과 소신에 따른 학문적 연구 결과의 산물이라면 정확한 논증과 학술적 토론을 통해 그 오류를 수정해갈 수 있겠지만, 애당초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국가가 나서서 정략적인 암수로 억지 주장을 유도해낸 결과라면 이는 더 이상 학문 논리로써 설득이 불가능한 대외적 침략 행위라 할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미 국민홍보용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왜곡된 한국고대사상(韓國古代史像)을 기정사실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중국 학계와 정계의 동향에 유의할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일단 저들의 논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 주장의 한계를 명백히 지적하는 동시에, 왜 갑자기 저들이 이런 주장을 들고 나왔는지 그 배경과 이유를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적절하고 올바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Ⅱ. 소위 ‘중국고구려’론의 논거와 문제점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사와 관련한 남북한의 상고사 인식체계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고구려는 중국 왕조가 관할하던 변방의 한 지방정권이므로 그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고구려 앞에 꼭 중국을 붙여 ‘중국고구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중국고구려’라는 용어는, 고구려를 훗날의 고려와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강변하기도 하지만, 그 역사가 중국 것이라는 저들의 인식을 고스란히 담아낸 신조어인 셈이다.
남북한 상고사 부정하는 ‘중국 고구려’론 이른바 ‘중국고구려’론은 단지 고구려사만을 문제삼고 있는 논리가 아니다. 단군조선을 상상에 의한 가공의 허상으로 규정하는 등 그 출발부터 남북한의 상고사 체계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이다. 1998년에 비공개로 개최된 제1차 중국동북지방사학술대회의 결의문에서는 한국과 북한 학계의 상고사 인식체계를 자기들에 대한 ‘도전’으로 파악하고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겠다고 천명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선사시대 둥베이3성 지역과 한반도 북부는 한인(漢人)의 이주와 개발에 의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파악하고, 이는 기자조선이 이 지역에 처음 들어선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기자조선은 은(殷)의 유민과 동이족의 습합에 의해 건국된 주(周) 제후국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사관에 의한 역사왜곡보다 그 정도가 심각한 이해형태다.
이러한 논의는, 연(燕)의 동북경략과 한무제(漢武帝)의 한사군 설치를 주목하면서, 고구려현이 현토군의 속현으로 나타나는 기록을 고구려가 본디 중국 중앙정권에 대해 종속된 국가로 출발하였음을 입증하는 자료인 것처럼 인식하는 논리로 확대된다. 둥베이3성뿐 아니라 한반도 북부 또한 일찍부터 중국의 강역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주장이 백두산을 둘러싼 천지의 반환문제를 언급하는 데까지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천지의 반환이나 간도의 귀속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이러한 논의의 궁극적 목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뒤에 다시 자세히 말하겠지만, 동북공정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하는 중국 정부 지도층의 본의를 곡해한 몇몇 학자의 뜬금없는 주장일 뿐이다. 한국에서 동북공정의 핵심이 한반도 통일 후에 전개될 영토분쟁에 대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자 마치 정곡을 찔리기나 한 것처럼 최근 중국의 고위 관리가 갑자기 방한한 것은 한국 내에서의 논의를 이 정도에 묶어두려는 얕은 술책에 불과하다. 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중국 전통 사서들 ‘한국 고구려사’ 인정 중국인들이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동북 지역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을 획정하는 문제가 현안으로 제기되자, 중국은 1880년대에 둥베이3성을 설치하여 만주(滿洲)를 정식 행정단위로 편입하였다. 이를 위한 기초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 광개토대왕릉비인데, 북경의 금석학자들은 이 석비의 발견을 계기로 비로소 고구려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가 고구려사를 일찍부터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이를 정사(正史) 체계 속에서 정리해 왔으며 실학이나 독립운동 과정에서 그 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다져온 것과는 그 역사성과 인식 방향이 크게 다르다. 고구려사가 우리에게 본원(本源)이었다고 한다면, 저들에게는 정치현실상의 한 재료에 불과했던 셈이다. 중국의 전통 사서는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 서술하지 아니하고 동이전에 편제하여 그들로부터 독립한 외국사로 기록해 왔다.
일제가 만주를 차지하고 전면적인 대륙침략을 감행하자 중국인 사이에는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는데, 이런 시류를 타고 동북지역을 중국사로 보는 일부 역사가가 있기도 하였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였다. 중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 마르크스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자국사를 체계화하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한다는 것이 당시 중국 역사학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농민전쟁을 중심으로 한 역사동력 논쟁이나 시대구분 문제 등 사회성격과 관련한 논의가 중국 역사 연구의 주류를 이뤘다. 더구나 ‘항미원조(抗美援朝)’가 정책의 기조를 이루던 때에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는 역사 연구가 가능한 한 억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중국의 교과서와 일반 역사책들은 거개가 고구려사를 한국의 고대정권으로 인정하고 이를 대외관계 속에서 서술하였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중국 고구려사론 그러나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고구려사 이해의 방향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국제사회를 두 진영으로 가르던 냉전체제가 쇠퇴한 데 따른 변화였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체제는 보편주의를 앞세움으로써 국가 중심, 민족 중심의 역사인식을 세계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의식으로 간주하고 이를 억제하는 구실도 해왔는데, 이 체제가 유명무실해지자 그동안 억제되어 왔던 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 다시 고개를 쳐든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사 왜곡이 본격화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중국은 특히 발해사의 귀속문제를 새로운 쟁점으로 들고 나왔다. 발해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한 논거를 개발하고 관련 논문의 수를 양적으로 축적해 나가는 것이 연구의 주된 방향이고 목표였다. 그러더니 1990년대 들어서 급기야 고구려사까지 중국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연구의 방향과 결론이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었으므로, 자연히 그 논의는 학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기존의 역사 사실과 해석을 그대로 둔 채 이해의 방향만 전환한 기술적·정치적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족의 발생과 거주가 모두 중국의 영토 내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이들이 건립한 정권은 중국 역사상 지방의 소수민족정권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논리만 보아도 그 비학문성을 여실히 알 수 있다. 현재의 중국과 고대의 중국 왕조를 동일시하고 현재의 중국 영토가 마치 고대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지속된 것인양 착각한 이 논리를 학문적이라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중국은 처음부터 단일문명체였던 듯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면서도, 기타 주변 민족은 정권 단위로 서로 다른 종족이었다고 파악하는 것은 이중적 관점이다. 중원 왕조의 변천은 종족적 차이에 관계 없이 면면히 발전해 온 문명체로 파악하면서도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 등에 대해서는 정권의 붕괴와 함께 해체된 것으로 인식한 이율배반에는 누구라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백제의 관계를 전혀 다른 종족 간의 경쟁 관계로 처리한 것은 역사의식과 문화계승의식을 무시한 억지이다.
또한, 역대의 조공책봉관계를 모두 정치적 예속관계로 파악한 것도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무리한 논리이다. 조공-책봉 관계는 이른바 천하관념과 화이적(華夷的) 세계관에 기초한 의제화된 국제간의 질서체계였을 뿐이다. 그것은 중국의 정통왕조를 천하의 중심에 두고 기타 지역을 문화적 편차를 기준으로 차등적으로 구별하여 차별 대응하던 인식체계로서, 중국이 제국질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의제적 명분에 불과하다.
상고 이래 ‘중국’ 또는 ‘천하’의 개념 및 범주는 구체적 실상과 상당한 차이가 있고, 또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변화를 거쳐 왔음은 이미 일반상식화한 사실이다. 조공책봉 관계의 실상은 이를 기록한 사서의 서술 자체가 아니라 그 실제적 운용을 고찰할 때에만 드러나는 것이며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실제 운용 면을 애써 외면한 최근 중국 학계의 논의는 학문적으로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책봉 관계를 정치적 예속관계로 파악함을 전제하여 기자의 습봉이나 한사군, 안동도호부 등을 그 예속의 증거로 삼으며 이로써 고구려와 중원 왕조와의 관계를 중앙 정권과 지방 정권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다분히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인식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확실한 증거 그리고 고구려사를 한국사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도 가소로운 작태다. 고구려 멸망 이후 영토와 인구의 귀속 여부를 근거로 발해 또는 고려와의 연계성을 부정하고자 하나, 이는 현재 강역을 중국의 역사 강역에 직접 대입시키려는 데서 온 것으로, 문화적 측면에서 역사의 계승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억지논리다. 특히 이러한 문화적 승계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식일 터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저술이나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발해가 멸망한 후 그 영토와 민호의 많은 부분이 고려로 편입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 역사를 중국사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해의 역사와 문화는 발해 독자의 것이며, 이를 계승한 것은 고구려 계승의 역사의식 위에서 건국한 고려였다. 중국이 발해의 터전에서 일어난 요·금 왕조와 후금(청)을 계승한 국가라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았으면서도 그 역사를 중국사라고 강변하는 것은 모순이다. 청나라로부터 국가를 되찾았다는 ‘반청(反淸)’의 기조는 현재도 중국인 일반의 역사의식이다.
물론 이러한 억지논리들은 근본적으로 고구려사를 자국의 소수민족사로 편입하려는 비학문적 의도가 전제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연구방법론상으로 중국의 정사(正史)를 비판 없이 운용한 결정적 결함을 지닌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얼마든지 더 여러 각도에서 지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체계가 비학문적인 논리로 치닫고 있는 만큼 이를 학문적 관점에서 일일이 검토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 일인지는 실로 의문이다. 또 중국 학계가 고구려사를 다루는 정치적 논리를 앞으로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도 여겨지지 않는다.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거의 모두 제시된 셈이며, 저들 스스로 그 한계를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이에 대한 반박과 비판 또한 대략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고구려를 주체로 그 흥기(興起)와 역사 발전의 과정을 계기적으로 체계 있게 서술해내는 것이 더 급한 과제라고 사료된다. 삼국의 형성을 고조선 사회의 계기적 발전 형태로 파악함으로써 고조선 이래 부단히 발전해 온 한민족사 초기의 역사상(像)을 구성적으로 논증해 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와 같은 무리한 논리를 부추기고 있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접국의 역사인식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면서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야기될 소지가 명백한 도발을 감행하는 데는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를 단순히, 소수민족사를 자국사의 범주 내에서 처리하는 중국의 일반적 방식쯤으로 치부하거나 정치적 협상 카드를 하나쯤 더 확보하려는 노력 정도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Ⅲ. 고구려사 편입 시도의 배경과 의도
문제의 초점은 최근 중국이 고조선 이래로 줄곧 한반도 북부를 지배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런 무리한 시도로 감행하는 의도를 현 단계로서는 자료를 통해 입증하기 어려우나 역사적 맥락에서 짐작해볼 수 있고 또 그 결론은 사실의 실상에 매우 근접할 것이다.
우선 유의할 것은 중국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정치적 의미이다. 중국은 중국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고 자치구를 형성하여 그 언어와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조선족에 대해 그 형성배경 자체를 다른 소수민족과는 다르게 파악하고 대처하고 있다. 즉 중국은 변강지역에 과계민족(跨界民族)을 30개 정도로 파악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중원을 선민문명으로 설정하고 소수민족을 낮은 단계의 사회로 설정하여 한족에 의한 동화 및 융합과정으로 인식하여 왔다. 즉 조방농업생산방식의 남방민족이나 반농반목의 유목민족인 북방민족에 대해서는 선진적인 중원 문화를 받아들여 스스로 동화되어 간 역사 과정으로 묘술해온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의 경우는 이와 다를 수밖에 없는 사정이다. 근대로 접어든 이후의 역사과정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족에 대한 정책 자체가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났다.
중국내 조선족 통제와 간도 영유권 문제 차단 노려 중국 학계는 1990년대 이래 고구려사 귀속 문제를 제기하게 된 배경으로 크게 두 가지 차원의 문제의식이 여기에 개재함을 표출하고 있다. 첫째는 1990년대 이래 한중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족 사회 내부의 변화와 함께 조선족의 민족적 각성이 진행된 사실에 유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족이 스스로 한민족임을 자각하고 북한에서 탈출하는 ‘동족’을 도우며 한국에 진출하여 경제력을 축적하는 등, 국적과 관계없이 민족적 귀속을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 정치적으로 제동을 가할 필요가 긴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차에 주목된 것이, 광개토대왕릉비를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 조선족 사이에서 고구려를 자기 역사의 출발로 인식하는 경향이 제고된 사실이었다. 중국 정부는 이를 긴급히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인의 고구려사 연구 논문에서 고구려는 현재의 조선족과 역사적 계승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애써 주장하고 있는 사실을 볼 때 이는 아마 거의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둘째는 한국 학계의 일부에서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문제에 관심을 보인 데 대해 유의하고 있는 점이다.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해 미리 쐐기를 박을 필요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학자들은 현재의 경계인 압록강 두만강의 역사성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1722년과 1909년 2차례 걸친 조(朝)·청(淸) 간의 영토 획정과 정계비의 건립, 그리고 1960년 북한 정권과의 사이에 맺은 국경협약을 모두 부정하고 간도는 물론 백두산 영역에 대한 배타적인 영유권이 중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고조선의 영역을 자국의 역사 영역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점은 이러한 간도문제 등 장래의 영역문제와 불가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중국 정부와 학계가 유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무리를 감행하는 중국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조선족의 민족적 자각을 억제하고 간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앞으로의 분쟁에 대비한다는 것만으로는 침략성을 띤 중국 측의 동태를 합리화하기 어렵다. 더 심각하고 절실한 정치적 필요성이 달리 있음이 분명하다.
한반도 유사시 개입 근거 확보도 겨냥 이런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 특별한 경우 곧바로 한반도에 대한 간섭 또는 침략을 자행하고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로까지 확대될 여지가 있는 주장들이다. 예컨대 고구려 멸망은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중원 왕조의 말을 듣지 않고 독립을 꾀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고구려에 대한 침공은 중앙권력으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도리를 취한 것뿐이라는 논지가 그것이다. 수·당의 대(對) 고구려 전쟁을 중앙과 지방정권 간의 모순에서 발생한 국내 통일전쟁으로 파악하는 것도 같은 논지이지만, 기왕의 역사적 평가를 애써 부정하고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것은 결국 특정 지역이 중앙정부의 통제를 무시할 경우 언제든지 무력을 사용하여 정벌할 수 있다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특히 이 점은 임진왜란, 청일전쟁, 6·25 등 동아시아의 중요한 만국(變局)에서 중국이 한국에 대해 이미 행해 왔던 역할을 미화해 온 배경이 있는데다가, 현재처럼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국제 사회가 소란한 국면과 연관하여 갑자기 이를 여론화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2000년에 중국은 TV를 통해 이른바 ‘항미원조50주년(抗美援朝五十週年)’ 기념물을 요란하게 방영하고 대담 형식을 통해 북한 정권의 붕괴에 대비한 중국의 대응 방략을 논의한 바 있는데, 이는 중국이 북한 정권의 붕괴 후 이 지역에 대한 처리 문제로 부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대담에서 논의는, 국제사회의 원리를 거론하고 이를 전제로 할 때 어떤 태도가 중국의 이익에 부합하는가를 모색하는 데 초점을 두고 일반론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적어도 분명한 것은 그것이 북한 지역에서 전개되는 국제적인 분쟁 또는 사건에 중국이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의였다는 점이다. 북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개입을 이미 염두에 둔 토론이었다.
따라서 고조선사 및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애써 귀속시키려는 의도는 결국 한반도 유사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려는 데 본심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를 둘러싸고 근래 국내에서 이루어진 분석은 대체로 한반도의 통일 후를 대비한 중국의 선제공격이라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간주하는 인식은 한국이 (통일)신라를 계승한 국가일 뿐이라는 인식을 깔고 있는 것이고,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북한은 이런 논리의 연장에서 결국 한국과 상관없이 중국사의 범주에 들어와야 할 대상이라는 주장을 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논리는 그 자체 이미 한반도의 통일을 저해하려는 의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현 정권이 무너지면 저절로 통일이 이루어질 듯 기대하는 것은 국제간의 역학관계를 무시한 환상에 가깝다는 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냉엄한 현실이다.
Ⅳ.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대응 방향
역사학은 우리가 현재 당면한 과제를 풀기 위해 그 과제가 기인하고 경과한 과거 사실들을 추출하고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흔히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말한다. 역사의 현재성, 즉 역사가 가진 문제해결 능력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역사학의 현재성이 절실히 요구된 때는 일찍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우리 민족과 국가가 당면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학이 나서야 할 때이고, 정부와 의회가 이를 적극 지원해야 할 때다.
중국의 자의적 고구려사 인식 방치 안 된다 지금까지 한국 국사학계는 학문의 객관성을 중시하며 주로 실증적 관점에서 역사 연구를 수행해 왔다. 그리하여 사료의 진위를 판단할 기준을 세우고, 많은 사실들을 새로 규명하였으며, 한국사의 발전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한 문헌고증의 태도를 견지한 나머지 적잖은 문헌과 자료의 신빙성을 부인하였고, 그 결과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고대사회가 성립하고 고대국가가 건국하였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리고 이는 우리 민족이 고조선에서 유래하여 부단히 발전해 왔다는 사실과, 중국 등 주변 민족과의 쟁패에서 밀려 고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였어도 민족의 주체성과 국가의 독립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일정한 장애로 작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한국사 이해에서 고조선사는 국지적이고 특수한 발전의 사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발해사를 우리 민족사로 서술하는 것을 국수적인 태도로 비난하며 동북아사라든가 하는 별도의 역사로 파악해야 한다는 견해가 공공연히 횡행하는 실정에 있다. 고조선사와 삼국시대사를 계기적인 발전 형태로 설명해내지 못한 결과이다.
반면, 중국은 이 틈을 비집고 고조선에서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를 자국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국의 역사인식은 북한 지역을 포함한 고구려의 옛 영토를 정치적·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을 함의한 침략적 인식 형태이다. 저들의 자의적인 고구려사 인식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우리는 결국 우리의 영토와 민족의 일부를 상실할 위기에 당면하고 말 우려가 없지 않다.
중국은 민족적 자각이 점차 고양되고 있는 조선족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그리고 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싼 영토 분쟁에 대비하여, 역사학의 현재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조선족의 민족적 자각에 제동을 걸기 위해 일부 학자는 조선족과 고구려가 전혀 무관함을 주장하기에 이른 실정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노력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의 정치주도층은, 고구려사 자체를 중국사로 편입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고구려인을 중국민족의 하나로 편제하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면, 이는 저절로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고구려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고 여겨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사가 한국사임을 지극히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 온 중국이 갑자기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고 시도하는 배경에는 북한 정권의 붕괴 이후를 대비하는 정치적 포석이 깔려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북한 지역을 군사력으로 장악하고, 역사로서 명분을 세우는 한편 정치력으로 버틴다면 그 지배에 대해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아낼 수도 있다는 믿음이 중국으로 하여금 무리를 감행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이유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타국을 강제로 점령한 강대국이 그 정치적·군사적 강점을 고착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흔히 역사를 동원하는 것을 경험해 왔다. 한(漢)이 고조선을 점령하고 ‘기자동래설’을 내세운 것, 당이 백제를 점령하고 ‘남대방설’을 내세운 것, 청 태종이 조선을 굴복시키고 ‘만주원류고’를 편찬해 그 정치적 간섭을 정당화한 것, 청 말기에 원세개(袁世凱)가 ‘속방론(屬邦論)’을 들고 나와 조선 정치에 간섭한 것,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일선동조론’, ‘임나일본부설’ 등을 내세워 그 식민 지배를 합리화한 것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때, 최근 중국이 뜬금없이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임을 주장하고 나선 배경에는,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싼 동북아의 위기 상황에서 북한 지역에 대한 처리 방안을 모색하는 중국이 정치적·군사적 점령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사실이 놓여 있는 게 아닌지 적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장악에 대비한 역사적 책략일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남북한 힘 모아 파쇄해 나가야 그러므로 우리는 중국의 이런 시도를 철저히 분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구려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체계화하여 그 역사가 한국의 역사임을, 그리고 그 민이 한민족임을 분명히 해야 하며, 정치적으로 남북이 한 민족, 한 국가임을 하루 빨리 세계에 천명해야 한다. 역사학을 통해 남북한의 상호이해를 증진하고, 법적 장치와 정책을 통해 민족적 유대감을 고양시킬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학이 수행해야 할 과제는 분명하다. 즉 고조선에서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진 북방의 역사 전개를 계기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이 명백히 한국민족사의 일부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기자동래설’ 이후 ‘속방론’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이 주장해 온 한국사 인식의 침략성을 체계적으로 규명하며, 문화 계승 관계를 무시하고 현재의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자국사로 간주하는 중국인의 역사인식을 논리적으로 파쇄(破碎)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