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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한(限)의 여인 허난설헌

스물일곱의 꽃나이로 짧은 인생을 한으로 마감한 비운의 여류시인 난설헌.

하많은 꿈과 재주를 이승에서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평소 동경하던 선계(仙

界)로 훌쩍 승천해 버리고 말았으니, 이름만 외더라도 애통함이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다.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면 어떻고, 내 이름조차 그녀의 기억에도 없다

한들 관계하랴. 다만, 그 재주가 너무 아깝고 청춘의 나이가 너무 애처로운 탓이

런가,

그녀의 절절한 시편들과 고달픈 삶의 모습이 나름대로 떠오르며, 연민의 정을

감출 수가 없다. 그래, 먼 거리도 아니고 마음 내키면 틈틈이 차를 몰고 달려간다.

이기순(서울 오산고 교사 / 시인)


그녀의 무덤 위치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마을. 지금은 중부고속도
로가 바로 묘 앞을 널찍하게 내달리고 있지만, 20여 년 전 처음 찾았을 때는 지금
의 자리로 이장하기 전으로 봄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논둑을 지나고 조팝나무 꽃
이 하얗게 피어있는 개울을 따라 봄기운을 실컷 느끼면서 걸어 들어갔다, 물기 오
른 버들가지로 호드기를 만들어 불기도 하면서 두어 시간은 걸린 듯하다. 나지막
한 능선이 동북향으로 뻗은 산자락 중턱쯤의 반응 달에, 후처와 합장한 남편과는
등을 지고 외따로 동떨어져 있었다. 사후까지도 시댁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영원의 세월을 고독과 한에 묻혀 지내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 자기 이름을 지녔던 여성, 허초희
난설헌은 1563년, 강릉 초당(草堂)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양천 허씨, 이름은 초
희(楚姬)이며, 당대의 문장가로 소문난 초당 허엽(許曄)의 셋째 딸이다. 난설헌(
蘭雪軒)은 당호(堂號)로서, 난초의 청초한 이미지와 눈빛처럼 맑게 살아가라는 의
미로 해석된다. 부친은 첫 부인 한 씨에게서 1남 1녀, 후처 김 씨에게서 봉(封)과
난설헌, 균(均) 등, 2남1녀를 두었다. 김 씨 소생 세 남매들은 서로 간에 정이 자
별하고 우의가 두터웠다,

아버지를 닮아 3남매 모두가 총명하고 세사에 밝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부
친 엽(曄)과 난설헌, 《홍길동》의 저자인 균(均)을 가리켜 ‘동방의 3소(三蘇)’
로 부를 정도로 일가족이 문장에서 대가의 경지를 이룬 것이다. 부모의 사랑과 정
성은 언제나 지극했다. 여자도 글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부모의 배려로, 그
녀는 오빠인 하곡(河谷) 허봉의 친구 손곡(蓀谷) 이달(李達)을 집으로 모셔놓고
아우 균과 함께 글을 배웠다.

이달은 당대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꼽힐 정도로 당시(唐詩)에 능통한 이물이
었지만, 서자 출신으로서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지내며 학문에만 몰
두하였다. 인륜에 반하는 적서차별의 부당성과 신분제도의 모순을 통렬히 비판하
고 천하를 유랑하며 자연에 묻혀 살던 인물이다. 난설헌과 균의 글 중에 자유분방
함이 나타나는 것은 스승인 이달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탓이기도 하다.

실의와 비통에 빠졌던 불행한 결혼 생활
난설헌이 결혼한 것은 14,5세로, 남편 김성립은 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다. 김성
립은 안동 김 씨 명문의 후예이나, 학문엔 관심이 없고 방탕을 일삼으며 술과 친
구로 젊은 나이를 허송하여 28세에 겨우 병과에 급제할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인
물이었다. 아예 홍 씨(洪氏)라는 여자를 첩으로 집안에 들여놓기도 했다. 남편의
외도와 방탕에 애원과 훈계도 하고, 부부간?금실을 유지하려 애써보기도 했으나,
애당초 학문이 높은 아내와 보통의 남편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불가한 일이었다.
재주나 능력을 무시하고 집안끼리 물건을 주고받듯 자녀의 혼사를 결정한 탓에 그
녀는 결국 불운한 끝을 맺고 말았다. 어울리는 부부로서의 만남이었다면, 내조와
외조가 상승의 힘을 얻어 남편도 더 성장할 수 있었고, 아내도 요절의 횡사는 없
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다.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여있음은
    임 그린 일 년 방초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읊으니
    배꽃은 비에 지고?문은 굳게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 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않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들못 위에 연꽃만 맥없이 지네

                     閨怨(규원)


규중의 한을 달래며 외로움을 풀어낸 시편이다. 고추 당초보다 맵다는 것이 시
집살이라고 하더라만, 시부모는 남편의 외도를 아내의 보필 부족 탓이라고 다그치
고 몰아쳤다. 이 같이 혹독한 냉대는 난설헌을 견디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
다. 더욱이 어린 남매를 의지하며 모정을 쏟았는데, 딸이 먼저 가고 이듬해에는
아들마저 잃는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 남편의 외도, 시가의 독선, 자식의 죽음,
이 세 가지 일을 모두 겪고 버티어 나가기는 어느 여자에게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난설헌 무덤 왼쪽 아래 두 자녀의 쌍분을 남겨두었으니, 자식을
잃고 실의에 잠긴 난설헌의 비통함을 가히 짐작할 만도 하다.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哭子(곡자)


난설헌의 친정은 부친이 경상감사로 내려갔다 병에 걸려 상주 객관에서 죽고,
자신을 끔찍이도 아껴주던 오빠 허봉이 율곡을 탄핵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유
배 3년 만에 돌아오는 길에 금강산에서 객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갔다. 아무리
안으로 삭이고 아픔을 시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설상가상으로 겹쳐오는 불
행에 삶의 의욕이 꺾여갈 수밖에 없었다. 걷잡을 시간도 없이 밀려오는 현실의 복
잡다단한 일련의 사건들은 차츰 그의 건강을 해치게 되고, 쇠잔해지는 의지는 이
미 자신의 힘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난설헌은 <몽유기(夢遊記)>
에서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푸른 바다가 요지에 잠겨들고
    푸른 난새 채색 난새에 어울리누나
    스물이라 일곱 송이 부용꽃 떨어지니
    서리 내린 달빛 속에 차기만 하네

                         夢遊廣桑山(몽유광상산)


'한'으로 얼룩진 인생과 도교적 작품세계
그녀는 생전에 세 가지를 후회하고 탄식하였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첫째요, 제
대로 된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이 다음이고, 조선 땅에서 낳아진 것이 셋째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가 결혼 후로는 여자의 길에서 한 치도 벗
어날 수가 없었다. 사내대장부로 세상에 나왔으면 그 형제들에서 보듯이, 자신의
재주와 이상을 마음껏 펼쳐보고 실현도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녀를 마음대
로 선택할 수는 없더라도, 이왕 결혼할 바에야 능력있고 재주있는 남편을 만났더
라면 수준에 걸맞은 대화도 가능할 뿐더러, 금실 좋은 부부로 해로하기를 바라는
것이 세상 여자들의 바람이 아니겠는가.

조선시대의 유교적 사회는 삼종지도(三從之道), 여필종부(女必從夫), 칠거지악(
七去之惡) 등의 보이지 않는 제도로 여자들을 사슬로 묶고, 질곡 속에서 숨통을
조이며 인간이 아닌 사회적 부속물로 만들어 버렸다. 난설헌의 세 가지 탄식은 남
자 중심의 봉건 사회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그녀는 동생 허균과 함께 서얼제
도의 모순을 지적하고, 전통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신분제의 개혁을 부르짖고, 여
성의 인간다운 권익 보호를 위해 몸부림치다가 쓰러져 간, 폐쇄 사회의 상징적 희
생물이다. <貧女吟(빈녀음)>에서는 자신이 만든 베가, 제도의 특혜 속에 영화를
누리는 어느 권력층의 딸이 시집갈 때 쓰일 것을 미리 알면서도, 밤새워 베틀 위
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미천한 신분과 가난한 민중의 한탄이 배어 나온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 여류시인
한으로 얼룩진 짧은 인생인데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어 어느 것인들 남겨둘
필요가 있겠는가. 그 동안 자신이 짓고 써두었던 모든 작품들을 광주리에 담아 불
살라 버리고는 1589년, 난설헌은 27세의 짧은 일생을 마감해 버렸다.

난설헌의 묘는 고속도로 공사로 이장하는 바람에, 정부 지원을 일부 받아 가족
묘지로 잘 정돈되어 있다. 경사진 비탈면을 3단으로 층을 이루어, 시조부로부터
시부모, 남편까지 그녀 덕분에 한 자리에 모여 있다. 난설헌 묘 오른켠으로는 이
장시 새로 건립한 그녀의 시비가 있다. 비의 앞면엔 앞서 인용한 〈哭子(곡자)〉
가 적혀있고, 뒷면엔 〈夢遊廣桑山(몽유광상산)〉이 기록되어 있다. 전자는 어려
서 죽은 자식에 대한 애끓는 모정을 울음으로 통곡한 작품이요, 후자는 숨 막히는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죽어서나 갈 수 있는 이상 세계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작품
이다.

그녀의 작품 밑바닥에 깔려 있는 도교적 신선사상은 그녀가 한결같이 추구하고
갈망하는 기본 정서이며 바탕사상이다. 몰락해 가는 집안의 안타까움에다가, 고부
간의 갈등, 남편으로부터의 버림, 어린 자식의 죽음까지 고통의 현실로부터 탈피
하기 위한 한탄과 절규가 맺혀있고, 이상향을 동경하는 그녀의 정신세계가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그녀의 원혼은 강릉 생가에서의 행복했던 낭만을 회상하며, 환상
으로 그리던 선계(仙界)에서의 신비로운 생활을 마음껏 즐기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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