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들은 옆자리 ‘짝’을 좀더 친근하게 표현하여 ‘짝지’라고 부르고 있다.(부산 지역에서 특히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들은 ‘짝지’란 말을 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부르고 행동으로 부른다. 그들에게 있어 짝지는 그들의 정서이고 문화이다. 또 좋은 토양이며 거울이다. 그들이 짝지를 따르고 위로하고 보호하는 모습은 보기가 좋다. 때로는 찡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선생님 짝지가 너무 아픕니다.”
짝지가 아플 때, 마음이 아파, 눈시울 붉히며 친구의 입이 된다.
‘짝’이 이름 그대로 옆자리에 앉는 학생이라면, ‘짝지’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된 단짝 짝꿍을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친구야’하거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짝지야’하고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정겨우며 티 없이 맑아 보이기도 한다.
여학생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일면이 있는가 하면 또 누구를 보살펴 주려는 모성애적 자질이 있다. 이 양면적 품성이 짝지에게 유감 없이 발휘된다.
짝지는 항상 그림자가 되어 어려운 자리를 풀어 준다. 등·하교시에 손을 꼭 쥔다. 선생님 책상 위에 꽃을 꽂을 때도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주고, 들킬세라 망을 봐 준다. 그리고 꽃을 두고 간 사람이 짝지란 것을 선생님께 넌지시 알려주는 몫도 짝지가 한다. 식당에 가기 싫어도 짝지가 간다면 따라 간다. 친구가 빵을 먹고 나면 껍질이라도 버려 주는 것이 짝지의 임무이다. 화장실 앞에서도 악당이 침범할세라, 문고리 꼭 잡고 가슴을 졸인다. 여학생들은 짝지와 걸어가면 발이 아주 잘 맞는다. 마음이 맞으니 발이 맞을 수밖에.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이다.
학창시절에 ‘짝’은 매우 중요하다. 인연이란 가까운데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짝이 된다는 것은 친해질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나 짝이 된다고 모두가 감동적인 선연(善緣)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 호흡이 맞지 않는 경우도 꽤 있다.
어떤 아이는 자기 짝과 하루 내내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며칠이 지나도록 이름도 모를 정도로 냉담하다. 그가 어떤 아이인지, 무엇을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아이의 앉은 자세도 밉고 목소리를 듣는 것도 싫다. 공책 등 학용품 따위가 경계선을 넘기 무섭게 밀어낸다. 숙제를 물어도 건너편 아이에게 묻는다. 점심시간에 식판을 들고 다른 자리로 옮겨간다.
소독을 한다든지 청소를 하느라고 짝지의 의자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자기 의자만 내려놓고 책을 들여다본다. 짝지의 의자를 좀 내려주라고 하면 이내 입이 부어오른다. 이런 짝지는 어쩔 수 없이 자리만 같이 하는 그야말로 ‘짝’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분명히 악연(惡緣)이다.
대부분 우연하게 짝이 되는 수가 많다. 신학기가 되면 담임은 새로운 자리 배정을 한다. 기준을 정한다. ‘선착순은 안 된다. 추첨도 안 된다.’ 더러는 이를 허용하는 담임도 있지만 대부분의 담임들은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 선착순은 엄청난 과열 경쟁의 단초가 된다. 꼭두새벽부터 잠을 설치며 자리다툼을 하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다. 공연히 자리 때문에 시기하고 증오하는 마음이라도 생기면 곤란하다. 추첨도 선착순 이상으로 부작용이 많다. 추첨은 사행성이 짙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추첨을 하여 행운을 잡는다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추첨도 불공평하기는 마찬가지다. 기회만 같이 준다고 공평한 것은 아니다.
학교에 가면 정해진 자리가 있어야 한다. 정해진 자리가 없다면 출발부터 부담감을 가진다. 이런 저런 것을 고려하다 보면 담임들은 너무나 보편적이며, 일종의 원시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번호순 배정. 키가 큰 학생은 뒤로 가고 작은 학생은 앞에 앉는다. 그 중에 시력이 나쁘거나 청각 상태가 나쁜 학생들에겐 가청(可聽), 가시권(可視圈)에 배려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불합리하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편의에 의한 객관성일 뿐이다.
이렇게 자신의 뜻과 관계 없이 만난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쉽게 융화되는 것을 보면 무척 기특하다. 그러나 개중에 어떤 짝은 내내 냉냉하게 평행선을 유지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서로의 마음이다. 마음을 열거나 닫는 데도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겠지만 마음은 빨리 열수록 좋은 것이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구애를 하거나 두 쪽 모두 자존심 싸움을 하듯이 등을 돌리는 것은 서로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마음을 열면 어떤 미운 사람도 없게 마련이다.
열 여덟의 내게 왼손잡이 안향숙이 캔디를 한 상자 건네준다. 갑자기 웬 캔디? 열 여덟의 나, 안향숙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그녀가 내게 미안한 듯이 속삭인다. “너, 계속 나와 짝하자.”
왼손잡이 안향숙은 열 여덟의 나보다 나이가 넷이나 위다. 안향숙보다 그저 한 살 많은 미서와 짝이 되고 싶었던 열 여덟의 나는 대답을 안하고 가만있다. -신경숙 ‘외딴방’-
작품 속의 ‘나’는 지난 해 같은 짝이었던 향숙이가 싫다. 그녀는 왼손잡이기에 글을 쓸 때마다 서로 팔꿈치가 부딪친다. 그러는 그가 천박해 보인다. 그녀보다는 나이도 비슷하고 사려가 깊은 미서가 짝이 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향숙이가 다시 짝이 되고 만다. 처음에는 좀처럼 마음을 열 기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한다. “미안해서 말야, 너는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지만 다른 사람하고 짝하면 또 글씨를 쓸 적마다 부딪쳐야 되구, 구경 당해야 되구 그렇잖니.” ‘나’는 그녀의 울먹이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고쳐먹는다. 마음을 열고 보니 그녀의 좋은 점만 보인다. 진작 그녀에게 따뜻한 정을 주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사람을 사귀기 전에 미리 선입관이나 편견 등으로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금물이다. 위의 ‘나’도 계속 거부감을 가지고 짝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한 걸음 물러서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짝의 만남은 우연일지 몰라도 사귀는 과정은 우연이 아니다. 노력이 필요하다. 참다운 우정이란 열매는 보물찾기나 복권 추첨처럼 완성품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진실 되게 마음으로 부르고 행동으로 찾으며 좋은 토양과 거울이 될 때 비로소 향기로운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모든 짝지들이 아름답고 행복한 미소를 나눌 것을 바라며 교문에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