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치고 안동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아마도 경주나 제주 다음으로 안동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요? 이 글을 쓰는 저도 열 번은 넘게 다녀온 것 같습니다. 안동하면 ‘양반의 고장’ ‘추로지향’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한 고장’ ‘간고등어나 찜닭의 고장’ 등 다양한 이력이 붙습니다. 둘러볼 곳도 한 두 군데가 아니지요. 이번 호에서는 자존심 센 안동사람들이 만들어낸 화합의 문화를 높이 사고자 합니다.
안동이란 지명은 왕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창(옛 안동의 지명) 전투에서 이 고장 사람들인 김선평, 김행, 장길이 왕건을 도와 견훤을 이겨, 왕건은 이 고장을 안동(安東)이라 부르고 삼태사에게 안동을 본관으로 하사하였습니다. 당시 고창군수였던 김행은 ‘능히 일의 기틀을 밝게 살피고 권도(權道)를 적절하게 결정하였다’ 하여 권 씨 성을 하사받았습니다. 안동 권 씨, 안동 김 씨, 안동 장 씨가 여기서 출발합니다. 안동이란 지명이 탄생할 때부터 세 성의 화합문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서민들의 탈춤, 양반들의 선유줄불놀이
안동에서는 매년 10월초에 국제탈춤페스티벌이 열립니다. 이 축제는 문화관광부 선정 국내 최우수 축제로 인정을 받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데 안동민속축제, 하회마을축제, 봉정사 등축제, 도산별시, 경북과학축제 등이 함께 열려 안동 전체가 축제장으로 바뀝니다.
2004년의 경우 주공연으로 대만, 인도, 터키, 라트비아, 일본, 러시아, 태국 등의 외국탈춤과 고성 오광대, 봉산탈춤, 북청탈춤, 가산탈춤, 동래탈춤 등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탈춤이 공연되었습니다. 이 축제의 시원은 양반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우롱하던 하회 서민들의 하회별신굿탈춤에서 시작합니다.
이 축제기간에 반드시 봐야 하는 행사가 하회마을 부용대와 만송정에서 펼쳐지는 선유줄불놀이입니다. 만송정 솔밭에서 낙동강을 가로질러 병풍처럼 선 부용대까지 다섯 가닥 줄을 길게 연결해 두고 수백 개의 뽕나무 숯가루 봉지를 걸어 점화시키면 숯가루 봉지가 한 마디씩 타올라 가면서 그 불티를 백사장과 강위로 뚝뚝 떨어뜨립니다. 여기다 “낙화야!” 하는 참가자들의 함성소리에 맞추어 부용대 정상에서 어머어마한 불덩이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면 줄불놀이는 절정을 이루며 그야말로 장관을 이룹니다. 불붙인 달걀불이 강위를 떠다니고 배위에선 선비들이 시를 읊조립니다.
저는 선유줄불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백사장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낙화야!” 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고 줄불 아래 백사장에서 마구 뛰어다니기에 분주한 아이들의 신나는 모습……. 눈을 감았습니다. 환상 같은 현실이 계속됩니다.
“낙화야!” 하는 소리가 그치고 줄불들이 부용대를 오르는데 더 힘들어 할 때쯤이면 부용대 정상에서 폭죽이 ‘펑펑’ ‘후더덕’ ‘히지직’ ‘쏴자작’ 온갖 소리를 내며 강위에서 춤을 춥니다. 하마터면 폭죽 소리에 초롱초롱한 별들이 깜짝 놀라 떨어질 듯 아슬아슬 합니다. “와!” 하는 탄성 소리가 일시에 들리고 모두가 얼빠진 모습으로 부용대 하늘을 올려다 볼 뿐입니다. 강에도 백사장에도 부용대 절벽에도 부용대 위에도 온통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아직까지도 제 마음 한 켠에는 선유줄불놀이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회마을은 양반들을 비꼬는 서민들의 애환이 탈춤으로 전해 내려오고 넓은 아량으로 그들을 수용할 줄 알던 양반들의 선유줄불놀이가 공존해온 곳입니다. 엄격한 신분을 초월한 상생의 문화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꺼쟁이들의 음식문화
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에 시내 ‘음식의 거리’를 찾았습니다. 음식점이 많았지만 아쉽게도 안동의 전통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큰 고등어 조형물로 외부를 장식한 ‘꺼쟁이’라는 식당이 눈에 띄어 가 보니, 이 가게는 이름부터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간고등어를 주문하고 주인장에게 물었습니다.
“아줌마, 식당 이름이 와 ‘꺼쟁이’ 입니꺼?”
그 아줌마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안동사람이 ‘꺼쟁이’ 아닙니꺼?”
순간 내가 물어본 ‘-니꺼?’와 그 주인장의 ‘-니꺼?’에서 직감이 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대구 사람들이 ‘-능교’투를 쓰고, 안동 사람들은 ‘-니껴’ ‘-니꺼’투를 쓰는 사람들 아니던가. 그래서 ‘니껴’나 ‘니꺼’에서 ‘꺼쟁이’, 즉 안동사람들을 지칭하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이로구나.”
대단한 발견을 한 듯 흐뭇해하며 이 꺼쟁이들의 음식문화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안동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이 보통이 아니라는데 음식문화 또한 그런 것 같습니다. 간고등어만 해도 그렇지요. 고등어가 상하지 않게 소금으로 간을 한 것은 전국의 내륙지방에는 다 있었을 텐데 유독 간고등어 하면 ‘안동 간고등어’를 대명사처럼 떠올리게 만든 꺼쟁이들 아닙니까? 그들의 일상이었던 유교문화에서 헛제사밥이 독창적으로 개발되었고 안동한우, 안동찜닭, 건진국시 등 전국 곳곳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들에 ‘안동-’이라는 고유명사를 붙이는 그들의 창조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안동의 음식문화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고지식하고 자기를 소개하면 윗 조상들을 두 줄 이상 거론하며, 안동장과 풍산들이 전국에서 제일 큰 줄로 안다는 그들의 애향심과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일군 ‘꺼쟁이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감이 만든 그들만의 음식문화, 지인에게서 들은 다음 우스개 이야기는 안동 사람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큰 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통계상으로 안동의 음식점에 들어가면 주인의 70퍼센트가 손님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사하는 사람은 객지인이 운영하는 관광지 식당이 대부분이라는데 하루는 손님이 안동의 어느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주인: (물 컵을 둔탁하게 놓으면서) 뭐 물라니껴?
손님: 곰탕 하나, 갈비탕 하나 주세요.
주인: (주문된 요리가 나오자 무표정하게 곰탕과 갈비탕의 순서를 바꿔서 놓는다.)
손님: (그릇을 바꾸려다 너무 뜨거워서) 곰탕과 갈비탕 자리 좀 바꿔 주세요.
주인: (퉁명스럽게) 머리는 도따 뭐하니껴, 바꿔 앉으소.”
손님: (기분이 나빠 먹지 않고 나간다.)
주인: 손님 알고 나가소. 안동은 어디가나 똑같소.
손님: …….
자신감에 찬 꺼쟁이들이 일군 꺼쟁이들만의 독특한 음식문화, 전통을 재창조할 줄 아는 안동 사람들의 저력입니다.
안동시내에서 떠올린 비빔밥 문화
대개들 안동을 찾으면 하회마을이나 도산서원, 봉정사 등 안동 외곽에 있는 유적지를 많이 찾는다지만 안동시내만 해도 볼거리가 상당합니다. 태사묘에 가면 안동 김 씨, 안동 권 씨, 안동 장 씨 화수회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세 성씨가 나란히 한 건물에 현판을 달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 사람의 묘도 서후면 내에 모두 있습니다. 태사묘에서 잠시 우리 정치판을 생각해봅니다. 자신들의 당리당략과 무관하면 으르렁거리는 사람들, 자신도 모르게 표출되는 지역감정, 국민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라며 저질러지는 기타 구차한 핑계들을 생각하면 씁쓸해집니다.
안동역 한 구석에는 기차 소음에 시달리는 운흥사지 당간지주와 동부동 전탑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탑은 모두 다섯이 남았는데 그 중 셋이 안동에 있다는 것은 안동이 전탑의 고장임과 함께 불교의 고장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동네 사람들이 굴뚝으로 알았던 동부동 전탑은 이웃한 임청각이나 신세동 전탑마냥 철길에 의해 반 도막난 신세가 되었지만 화려했던 안동의 불교문화를 기억하게 합니다.
태화동에 위치한 관왕묘는 무안왕(武安王), 즉 삼국지에 등장하는 촉한의 명장 관우를 모신 곳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진린 등이 극진히 관우를 신앙하고 그의 사묘(祠廟)를 세운 데서 조선에 유행하게 되었다는데, 관우는 무력과 재력을 겸비한 신으로 도교에서 숭상받고 있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는 동묘에 비하면 그 규모가 비할 바 아니지만 안동이 관우신앙이 유행했던 곳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안동의 문화를 한 마디로 말하면 ‘비빔밥 문화’라 일컫고 싶습니다. 양반마을 한 가운데 삼신당이 자리하고 있고 양반과 서민의 문화가 공존하며 세계적인 탈춤 축제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곳곳에 산재한 안동의 종택은 지금도 안동만의 자존심으로 당당합니다. 봉정사를 비롯한 불교사찰과 불교문화재가 많이 남아있고 게다가 도교의 신앙대상인 무안왕묘 또한 남아있는 곳이 안동입니다. 전통적인 고유의 문화에다 유교·불교·도교의 이질적인 문화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만들어진 안동판 ‘비빔밥 문화’인 것입니다. 각기 성격이 달라 화합되지 않을 것 같은 이질적인 문화가 안동에 와서 저마다 고유의 맛을 간직한 채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낸 것이 안동의 비빔밥 문화요, 안동의 힘, 한국의 힘인 것입니다.
안동의 화합 문화는 곳곳에서 개인과 단체의 권리만 주장하기에 바쁜 이 시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화두라 하겠습니다.
내가 만난 안동 사람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 그들이 보여주는 친절함에 고장 인심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들의 불친절에 고장 전체 인심을 비뚤게 바라보기도 합니다. 마을 잔치가 있으면 지나가는 나그네를 불러 음식을 대접하는 정이 살아있는 고장, 아직은 그런 곳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안동시청 공무원인 권영태 씨는 풍류를 아는 사람입니다.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인 관광객을 안내하는 그는 하회마을 곳곳에서 시를 수십 편 읊어 주는데 절제된 감정이 묻어나는 그의 시낭송은 듣는 이들이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듭니다. 특히, 색소폰을 비롯하여 빨래판 등으로도 훌륭한 악기 연주를 하는 재미있는 재주를 가진 분이라 형식적이고 경직되었다는 공무원상을 깔끔하게 바꿔주는 분이십니다.
지난 해 병산서원을 찾았다가 날이 어두워 우연히 찾아간 민박집, 그 민박집 주인은 우리를 방으로 안내하고는 무릎을 꿇고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은 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민박집 주인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어쩜 저렇게 깍듯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그분은 서원을 관리하는 류시석 씨였습니다. 크지 않은 몸체지만 곳곳에 배인 그의 깍듯한 예절, 그는 살아있는 조선의 선비였습니다.
남안동 IC로 안동을 드나들 때면 일직면에 이르러 조탑동 전탑이 보입니다. 그 전탑에서 시선을 뒤로 두면 평생을 아이들의 마음으로 사신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의 집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허름한 집에 너무나 검소한 모습으로 소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전까지의 환상적인 동화관을 현실적인 동화관으로 바꾸게 해 준 적어도 동화계의 거장임은 분명할 텐데 어쩜 저렇게 검소하다 못해 가난한 생활을 하고 계실까. 사뭇 그분이야말로 일직(一直)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안동을 떠나며
바야흐로 문화의 시대가 왔습니다. 문화는 이제 최고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며 문화의 힘이 곧 나라의 힘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연예인이었던 배용준 씨는 드라마 한 편으로 일본 열도를 뒤흔드는 대스타로 변신했습니다. 그가 입은 옷, 그가 쓴 안경, 그가 하는 말,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상품이 되고 표준이 됩니다. 한국문화가 일본의 안방에서부터 자리를 잡아가고 덩달아 국가 이미지가 엄청나게 좋아졌습니다. 수십 명의 외교관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그가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승부수는 우수한 인재가 가진 기술력, 유구한 역사가 일궈놓은 유무형의 풍부한 한국문화에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각각의 문화가 제 색깔을 가진 채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안동의 화합 문화, 비빔밥 문화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지침이요, 좌표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