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나라는 재작년처럼 경제가 내내 좋지 않았다. 단, 이렇게만 말하고 지나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최근 우리 경제의 부진은 특히 소비가 부진한 데서 비롯되는데, 소비도 국내 소비와 해외 소비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을 공급자로 놓고 볼 때 국내의 소비, 즉 국내수요(내수)는 매우 부진했던 게 사실이다.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에서의 판매 상황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지만, 도소매 매출실적이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계속 줄었다.
그러나 해외 소비 쪽은 사정이 완연히 달랐다. 작년에 우리나라 기업으로부터 상품 수출을 요구하는 해외수요는 우리 기업과 정부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높았다. 산업자원부가 1월 1일 잠정 집계한 ‘2004년 수출입실적’(통관기준)을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무역은 여러 가지 새로운 기록을 낳았다.
작년, 내수 부진 속 수출은 최고 기록 지난해 우리나라는 수출과 수입 실적 모두 사상 최대 기록을 냈다. <표1>에 나타났듯이 수출액은 2542억2000만 달러로 전년보다 31.2% 증가했고, 수입은 2244억7000만 달러로 25.5% 늘어났다.
연간 수출 2500억 달러대는 캐나다, 중국, 벨기에, 홍콩 등에 이어 세계 12번째이고 지난 95년 수출 1000억 달러를 달성한 이후 9년 만에 2.5배로 늘어난 기록이다. 수출 규모로 순위를 매기면 세계 12번째지만, 우리보다 앞서 2000억 달러대에 들어선 벨기에와 홍콩은 중계무역 비중이 높으므로 이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이제 세계 10대 수출국이다.
지난해에는 또 연간 수출증가액 604억 달러로 종전 최고기록이던 2003년의 313억 달러에 견주어 두 배 가까이 많았다. 하루 평균 수출액도 9억1000만 달러로 2003년의 6억8000만 달러를 훌쩍 넘어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전년 대비 수출증가율 31.2% 역시 우리나라가 이른바 3저(저유가, 저금리, 달러 약세)로 불리는 유리한 해외경제 여건을 맞아 호황을 누렸던 1987년(36.2%)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수출액에서 수입액을 뺀 무역수지 흑자도 297억5000만 달러로 전년도 149억9000만 달러의 배에 달했고 1998년(390억 달러) 이후 6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렇게 수출이 활약(?)을 해 주었기 때문에 작년에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률은 극심한 내수 부진에도 불구하고 4%대를 유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년 한 해 수출의 경제성장 기여율은 2003년에 이어 90%대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경제를 굴려가는 두 개의 바퀴 가운데 내수라는 한쪽 바퀴가 2년 넘게 동력을 잃은 가운데 수출이 나머지 바퀴를 굴리는 견인차 역할을 한 셈이다.
수출이 그렇게 잘 되었다면 체감경기는 왜 여전히 나쁜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여기에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한다. 수출은 주로 대기업이 맡는데, 대기업은 우리나라 전체 고용의 작은 부분을 담당할 뿐이다. 고용의 90% 가량, 압도적인 부분은 중소기업이 맡고, 중소기업은 내수 시장에서 활동한다.
내수가 부진하면 중소기업 경기는 부진할 수밖에 없다. 단, 수출이 잘 되면서 수출경기가 내수시장까지 흘러들어간다면 사정은 나아질 수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대기업을 위주로 수출을 많이 하고 수출경기가 호조를 보이면서 중소기업을 위주로 한 내수시장이 그 덕을 보는 식으로 경기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같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해외수요와 국내수요의 연결이 끊긴 상태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 침하, 과대한 가계부채 누적 등으로 내수시장의 구매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데 있다.
우리나라 무역의존도 세계 70위 그나마 심각한 내수부진으로 작년에 깊이 가라앉을 뻔했던 우리 경제를 연 4%대의 경제성장이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수출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경제는 최근 한층 더 수출, 곧 무역에 의존하게 된 셈이다.
우리 경제에서 무역은 얼마나 중요할까?
어떤 나라의 대외교역, 곧 무역이 그 나라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가리켜 무역의존도(貿易依存度, degree of dependence upon foreign trade)라고 부른다.
무역의존도는 수출액과 수입액의 합계를 명목 국내총생산(명목GDP=경상GDP)으로 나눠 백분율로 나타낸다.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무역의존도 = (수출 + 수입)/명목GDP
무역의존도가 약 69%라면, 국민경제가 연간 100원을 번다고 할 때, 그 중 69원은 수출액과 수입액을 합한 금액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경제의 무역의존도는 지난 1993년 48.1%로 바닥을 찍고 이후 상승 추세를 지속해 2001년 69.1%를 기록했다. 세계 174개국 중 70위다. 2002년에도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는 66.0%로 OECD 국가 중 7번째로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무역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벨기에로 166.2%. 슬로바키아, 체코, 아일랜드, 헝가리 등도 100%를 넘는 수준이다. OECD 국가 중 무역의존도가 가장 낮은 나라는 미국으로 18.2%. 일본도 18.9%로 낮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경제가 무역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다. 그런데 무역은 해외 경기 변동을 잘 탄다. 따라서 무역의존도가 높을수록 그 나라 국민경제는 해외 변수에 취약하다. 거꾸로 무역의존도가 낮으면 경제가 무역보다는 국내 경기에 의존하므로 해외 변수의 영향을 덜 탄다.
무역의존도는 수출액과 수입액의 합계가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실은 수출의존도와 수입의존도를 합한 개념이다.
수출의존도는 수출액이 국민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 수입의존도는 수입액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낸다.
우리나라의 수출의존도는 2001년에 35.6%. 세계 174개국 중 56위다. 1990년대 초 수출의존도는 28%였다. 최근 10년 사이 국내총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한층 높아진 셈이다.
수출, 몇 개 시장 의존도 높아 무역의존도와 마찬가지로 수출의존도가 높아지면 그만큼 국민경제가 해외 경기를 타기 쉽고 대외 경제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힘이 약해진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상대인 미국의 경기가 나빠진다 하자. 경기 악화는 미국의 수입 수요를 줄이고 그만큼 우리나라의 대미 수출은 줄어든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경제 전체에 즉각적인 타격을 받는다.
우리나라의 수출 시장은 크게 미국·일본·EU 등 3대 선진국 시장과 중국·동남아·중동·중남미 시장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미국·일본·EU 등 3대 선진국 시장의 비중이 우리나라가 상대하는 세계 수출시장 전체 가운데 절반이다(1996년 40.7%, 2000년 47.3%, 2001년 45%). 나머지 절반의 수출시장은 중국·동남아·중동·중남미 지역으로 이루어진다.
수출시장을 국가별로 보면,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수출을 가장 많이 받아주는 나라는 미국이고 그 다음이 일본이다.
2000년만 해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약 376억 달러, 일본에는 약 204억 달러를 수출했다. 이 해 우리나라가 수출을 많이 한 10개국의 수출액 총계는 1184억 달러. 주요 10개국 상대 수출액 가운데 대미 수출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약 32%, 일본은 약 17%다. 두 나라를 상대로 한 수출액이 두 나라를 포함한 10개국 상대 수출액의 절반쯤 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우리나라의 수출 구조에 특기할 변화가 생겼다. 중국이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상대국이었던 미국과 일본을 제치고 2003년 마침내 제1위 수출시장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젠 우리나라가 무역과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중국(홍콩 포함)이다. 그 다음이 미국, 일본, 대만 순이다. 무역을 해서 흑자를 보는 상대국도 주로 홍콩을 포함한 중국, 미국, 대만, 영국 등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무역흑자는 여러 나라와 골고루 무역을 벌여 얻는 결과라기보다 이들 몇 개 나라에서 얻는 결과다. 즉, 소수 국가에 무역흑자를 의존하는 정도가 심한 것이다.
어떤 나라의 무역흑자가 소수 몇 개국을 상대로 한 무역흑자에 의존하는 정도를 무역흑자 편중도라고 부른다. 무역흑자 편중도는 무역흑자가 편중된 일부 국가로부터 얻은 무역흑자 총계가 전체 무역흑자 전체에서 얼마나 되는지를 비율로 나타낸다.
우리나라는 무역흑자 편중도가 높고,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1998년 54.6%이던 것이 1999년 94.6%, 2000년 244.1%, 2001년 273.1% 등으로 최근 들어 한층 큰 폭으로 높아지고 있다.
2001년 일본의 무역흑자 편중도는 214.5%, 중국은 174.2%다. 10대 무역흑자국에 대한 편중도 역시 2001년 한국 340.9%, 일본 253.1%, 중국 190.6%로 3개국 중 우리나라가 가장 높았다.
수출 품목 편중도 갈수록 높아져 무역흑자를 소수 몇 개 나라에 너무 많이 의존하다 보면 그런 나라를 위주로 해외 경기가 침체하거나 주요 무역 상대국과 관계가 나빠질 때 무역에서 낭패를 보기 쉽다. 이런 문제를 줄이려면 평소 수출·무역흑자 상대국을 널리 다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흑자 편중도의 내용도 문제다. 주요 흑자 상대국으로부터 얻는 흑자 비중이 높아져서라기보다 흑자 상대국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 얻는 흑자폭이 줄어드는 바람에 편중도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이후 5대 흑자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무역흑자는 213억~288억 달러로 200억 달러대에 머물고 있지만 전체 무역흑자는 1998년 390억 달러, 1999년 239억 달러, 2000년 118억 달러, 2001년 93억 달러로 점차 줄어들고 있다.
무역 상대국뿐만 아니라 수출 품목 면에서도 우리나라는 편중도가 높다. 우리 기업들이 수출하는 품목은 갈수록 반도체, 철강, 컴퓨터, 유화, 자동차, 직물, 선박, 의류, 무선통신, 정밀기기 등 10대 품목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 수출 상위 품목 가운데는 반도체, 컴퓨터, 무선통신기기 등 정보기술 관련 제품으로 품목이 집중되어 있다. 컴퓨터, 자동차는 경기 변동이 심하고 반도체나 유화제품도 시장가격 등락이 큰 편이기 때문에 전체 수출의 불안정성이 높다.
수출을 여러 품목에 걸쳐 골고루 하는 나라는 국제 경기 변화에 대응하기가 비교적 쉽다. 국제 경기 변화에 따라 수출이 잘 안 되는 품목이 생기는가 하면 수출이 잘 되는 품목도 생기므로 그만큼 경기 변화를 덜 탄다.
그러나 단 몇 개의 품목에 수출을 집중하는 나라는 해외 경기 변동에 대응하는 힘이 약하다. 수출이 집중된 품목의 국제 수요가 줄면 즉시 수출 전체에 타격을 입고 무역수지가 나빠진다.
경제가 수출과 무역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화할수록 무역의 체질을 튼튼하게 할 필요성이 높아진다. 무역의 편중도를 낮추는 것이 그 한 가지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