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4.11.02 (토)

  • 구름많음동두천 13.4℃
  • 흐림강릉 16.0℃
  • 구름많음서울 14.3℃
  • 대전 14.2℃
  • 대구 14.1℃
  • 울산 15.2℃
  • 광주 14.7℃
  • 부산 16.9℃
  • 흐림고창 13.1℃
  • 제주 19.1℃
  • 구름많음강화 12.8℃
  • 흐림보은 14.1℃
  • 흐림금산 14.4℃
  • 흐림강진군 15.9℃
  • 흐림경주시 15.3℃
  • 흐림거제 16.8℃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독도가 우리 땅인 역사적 당위성

독도가 우리 땅인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며 우리나라의 역사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일본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 주장인가를 문답식으로 풀어 보기로 한다.

이상태 |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1. 독도는 어디에 위치한 섬인가?

경위도상으로는 북위 37도14분18초, 동경 131도52분22초 지점에 있는 대한민국의 가장 동쪽에 있는 영토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에 속했으나 2000년 4월 8일부터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17번지로 바뀌었다.

독도는 울릉도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92km(약49해리: 최근 물이 빠졌을 때를 기준하면 87km임.) 지점에 있고 일본의 가장 가까운 섬인 시마네현 오키도(隱岐島)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60km(약86해리)떨어진 지점에 있다.
본토에서 볼 때는 동해안 울진군 죽변항으로부터 215km 지점에, 일본의 시마네현 사카이고(境港)로부터 220km 지점에 있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라는 두 개의 섬과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36개의 암초로 독도의 총면적은 18만6121㎡(5만 6301평)이고 서도의 산 높이는 174m, 동도가 99.4m이다.


2. 독도는 언제부터 한국의 영토였는가?

신라 지증왕 13년에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병합한 AD 512년부터이며, 1500년전부터 우리의 영토이다.

거기에 비해 일본측 문헌에 독도가 처음 나오는 것은 1667년에 편찬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이다. 이 책은 출운(出雲:시마네현의 옛이름)의 관리[蕃士]인 사이토(齊藤豊仙)가 번주(藩主)의 명을 받고 1667년에 은기도를 순시하면서 보고들은 바를 기록하여 보고서로 작성하여 바친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독도를 ‘송도’로 ‘울릉도’를 ‘죽도’로 호칭하였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은주(隱州:은기도)는 북해(北海)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은기도라고 한다. 술해간(戌亥間: 서북방향)에 2일 1야를 가면 송도(松島)가 있다. 또 1일 거리에 죽도(竹島)가 있다. 속언에는 기죽도(磯竹島: 이소다케시마)라고 하는데 대나무와 물고기와 물개가 많다. 이 두 섬(송도와 죽도)은 무인도인데 고려(高麗)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出雲國]에서 은기(은기도)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 경계지는 이 주(은주: 은기도)로 그 한계를 삼는다”
위의 기록이 독도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책인데 독도와 울릉도를 모두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3.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우산(于山)과 무릉(武陵)의 두 섬이 현(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이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아니해서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라고 불렀다.”
512년에 신라가 점령한 우산국은 울릉도와 우산도이며 우산도는 독도이다.


4. 동국여지승람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강원도 울진현 조에 “우산도·울릉도: 무릉이라고도 하고 우릉이라고도 한다. 두 섬은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우산도(독도)와 울릉도 두 섬이 행정구역상으로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조선왕조의 영토임을 밝혀 놓았다.


5. 조선왕조실록에는 독도에 관한 기사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태종 때에 김인우를 시켜 울릉도를 조사시키고 세종 때에는 그곳의 주민들을 육지로 쇄환시키고 피역자와 범법자가 섬에 들어가 살지 못하도록 공도정책(空島政策)를 썼다. 성종 때에는 삼봉도(독도임)의 존재가 조정에 보고되어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시켰고 삼봉도는 울릉도와 다른 섬인 삼봉도가 독도임을 확인하였다. 숙종 때에는 안용복의 활동으로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막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문서도 받았다. 정조 때에는 독도에 물개가 많이 서식함을 확인하고 ‘가지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6. 그 밖에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고문헌 자료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 군정편(軍政編)≫이 있다. 이 문헌에는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 영토이다.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마쓰시다)다.”라고 기록했다.
첫째 ≪여지지≫는 17세기에 유형원이 쓴 지리지이다.
둘째, “울릉도와 우산도가 모두 우산국 땅”이라고 밝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셋째,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마쓰시다)다”라고 하여 우산도가 독도임을 거듭 밝히고 있다.


7. 일본 정부가 독도를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도쿠가와 막부가 1618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61년에 내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이다.

죽도도해면허는 일본의 백기주(白耆州)의 미자(米子)에 거주하던 오오다니(大谷甚吉)가 태풍을 만나 울릉도에 피신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이후에 공도정책으로 울릉도를 비워둘 때이므로 이 섬이 무인도인 줄 알고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운 무라가와(村川市兵衛)와 함께 1616년에 죽도도해면허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으려고 운동하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백기주 태수직을 맡고 있던 송평신태랑광정(松平新太郞光政)이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를 내주었다. 이들은 1661년에는 ‘죽도근변송도도해건(竹島近邊松島渡海件)’을 청원하여 송도(松島 : 독도) 도해면허도 받았다.

위의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다. 만약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면 자국민이 자국의 영토를 출입하는데 무슨 면허가 필요하겠는가?


8. 안용복이 독도를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은?

숙종19년(1693)에 동래와 울산의 어부 약 40명이 울릉도에 고기잡이 갔다가 일본의 오오다니 가문에서 보낸 일단의 일본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일본 어부들은 조선 어부 대표를 보내면 협상하겠다고 하였으나,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이 대표로 나서자 이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일본 은기도로 가버렸다.

안용복은 은기도 도주에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지적하면서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가는데 왜 납치하여 구속하는가?”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그의 상관인 백기주 태수에게 안용복 등을 이송하였다.

안용복은 백기주 태수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강조하고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조선 사람이 들어간 것은 일본인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며, 앞으로는 울릉도에 일본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자기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사항이었으므로 안용복 등을 에도(동경)의 막부 관백(최고통치자)에게 이송하였다.

안용복은 막부 관백의 심문에도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고 자기를 납치하여 구속하는 것은 부당하며, 도리어 일본 어부들이 조선의 영토인 울릉도에 들어간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관백은 안용복을 심문한 후 백기주 태수를 시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써주고 안용복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석방된 안용복이 귀국길에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이르니 장기주 태수는 대마도주와 결탁하여 안용복을 다시 구속하여 대마도에 이송하였다. 안용복이 대마도에 이르니 대마도 도주는 백기주 태수가 막부 관백의 지시를 받고 써준 문서를 빼앗고 도리어 안용복을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를 침범한 월경 죄인으로 취급하여 안용복을 묶어서 조선 동래부에 인계하고, 앞으로는 조선의 어부들이 일본 영토인 죽도에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안용복을 가둔 채 온건론자들의 주장대로 ‘귀국의 경지인 죽도’에 조선 어부들이 출어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국서를 보냈다.
사관(史官)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왜인들이 말하는 소위 죽도(竹島)는 곧 우리나라의 울릉도로 울릉도와 죽도는 1도2명(1島 2名)이므로 저들의 주장을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숙종20년(1694)에 국서를 보내기를 “우리나라 백성들이 고기잡이한 땅은 본시 울릉도로서 대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혹 ‘죽도’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하나의 섬에 두 가지의 이름이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귀국 해변 사람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여 울릉도에 왕래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 상호간의 우의를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엄중히 항의하였다.
숙종21년(1696) 1월에 대마도주가 바뀌어 막부 장군에게 인사차 들렀을 때 막부 장군은 대마도 신주 종의진(宗義眞)과의 질의 응답을 통하여 사태를 파악하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①죽도(울릉도)는 일본 백기로부터 거리가 약160리이고 조선으로부터는 40리 정도로 조선에 가까워 조선의 영토로 보아야 하며
②앞으로는 그 섬에 일본인의 항해를 금지하며
③이 뜻을 대마도 태수는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측에 통고하도록 하였다.


9. 안용복의 제2차 독도 수호운동

안용복은 숙종 22년(1696)에 울산에 가서 울릉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다고 하면서 순천 송광사의 장사꾼 노헌(雷憲)과 이인성(李仁成) 등 16명을 모아 울릉도로 갔다.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 배들이 건너와 정박하고 있으므로 안용복은 “울릉도는 본래 우리 영토인데 어찌 감히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가? 너희들을 체포함이 마땅하다.”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우리는 본래 송도(松島: 우산도,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를 잡으러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나 마땅히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거짓말하였다.

안용복은 “송도는 곧 우산도인데 이 역시 우리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하고 이들을 꾸짖어 내쫓았다.
안용복이 이튿날 배를 타고 우산도(독도)에 들어가보니 일본인들이 솥을 걸어놓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었다. 안용복이 막대기로 걸어 놓은 솥을 부수며 큰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들이 모두 도망갔다.

안용복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은기도로 들어갔다. 은기도 도주는 찾아 온 이유를 물었다. 안용복은 “몇 년 전에 내가 이곳에 들러 울릉도와 우산도는 조선의 땅으로 정하고 관백의 문서를 받아 가기도 했는데 일본이 격식도 없이 우리 영토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안용복의 항의를 백기주 태수에게 전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백기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안용복은 이에 격분하여 배를 타고 백기주(지금의 시마네현)로 향하였다. 안용복은 이때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백기주 태수가 일본에 들어온 이유를 물으므로 안용복은 “전날 두 섬(울릉도와 독도)의 일로 문서를 받았음이 명백한 데도 대마도 도주가 문서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 번 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침입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대마도주의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

이 때 마침 대마도의 도주 아버지가 백기주 관아에 머물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백기주 태수를 찾아가 “만약 이 상소가 올라가면 내 아들은 반드시 중죄를 얻어 죽을 것이니 이 상소를 올리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이에 안용복에게 그 상소를 올리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우선 안용복에게 쫓겨 온 일본 어부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또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하겠다.”고 약속하고 안용복 등을 귀국하도록 하였다.
숙종22년(1696)에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의 일부이며 일본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금지한다고 재확인하므로 논쟁은 종결되었다.


10. 근대에 들어와서 메이지 정부도 계속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간주했는가?

메이지정부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하였다. 그 증거로 1869~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라는 문서가 일본 외교문서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메이지정부는 신정부 수립 후 1869년 12월에 조선국과의 국교 확대 재개와 ‘정한(征韓)’의 가능성을 내탐하기 위하여 외무성 고위관리인 좌전백모(佐田白茅)·삼산무(森山茂)·재등영(齋藤榮) 등을 부산에 파견하였다. 이때 외무성은 14개의 항목을 정탐하여 오라는 내용인데, 그 중 하나가 ‘죽도(竹島)와 송도(松島)가 조선의 부속(附屬)으로 되어 있는 시말’을 내탐해 오라는 지시사항이다.

이들이 귀국하여 보고한 ‘죽도와 송도가 조선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 보고서에서 송도(독도)는 죽도(울릉도)의 이웃 섬으로 두 섬이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라고 지적하고 많이 생산되는 물건의 이름을 들어 보고하였다.
이는 일본의 공문서에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한 자료이다.


11. 일본 내무성도 독도와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알고 있었다.

일본 내무성은 1876년에 일본 국토의 지적을 조사하고 근대적 지도를 만들려고 할 때 시마네현의 지적 담당자로부터 동해에 있는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시마네현의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가, 뺄 것인가에 대한 질의서를 1876년 10월 16일자 공문으로 접수하였다.

일본 내무성은 5개월간의 조사 끝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고 태정관에게 최종 결정을 미루었다.

일본 내무성이 태정관에게 올린 질문서의 요지는 첫째 죽도(울릉도)와 그 밖의 1도에 대하여 지적(地籍) 편찬을 시미네현이 물어 왔고, 둘째 내무성이 시마네현이 제출한 서류와 또 1693년에 조선인 안용복이 일본에 들어와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검토해본 결과, 셋째 내무성은 죽도(울릉도)와 그 밖의 1도가 일본과 관계 없는 곳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넷째 지적을 조사하여 일본의 판도에 넣을까, 뺄까는 중대한 사건이므로 태정관의 최종 결정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태정관은 이들 서류를 검토하고 내무성의 판단과 같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조선의 영토라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 1877년 3월29일 정식으로 내무성에 지령을 내렸다(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12. 일본이 독도를 송도라 하지 않고 리앙쿠르드암(岩)이라고 부른 이유는?

1876년에 일본인 무등(武藤平學)이 동해에서 울릉도 아닌 새 섬을 발견하였다고 하며 ‘송도개척건’을 청원하였다. 일본 해군성은 천성환(天城丸)이란 군함을 파견하여 1878년과 1880년 두 차례에 걸쳐 송도의 실체를 조사했으나 송도는 곧 울릉도임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울릉도를 송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전까지 독도를 송도라고 불렀으므로 독도의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여 프랑스의 포경선이 붙인 ‘Liancourt Rocks’를 취하여 ‘리앙쿠르드암’이라고 수로지에 표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본 일본 어부들이 ‘리앙코도(島)’라고 약칭하였다.


13. 울릉도 검찰사(檢察使) 이규원의 활동은?

일본 군함의 불법활동에 대응하여 조선 정부는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감찰사로 보내 공도정책의 폐기와 재개척 여부를 조사시켰다.
이규원은 배 세 척에 102명의 대규모 조사단을 편성하여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1882년 4월 29일부터 6일간 울릉도를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①울릉도에는 본국인이 모두 140명인데 전라도가 115명(82%), 강원도가 14명(10%), 경상도가 10명(7%), 경기도가 1명(0.7%) 순이고
②본국인 중 선박을 만드는 자가 129명(92.2%),인삼 등 약초 캐는 자가 9명(6.4%), 대나무 베는 자가 2명(1.4%)이었고
③울릉도에 침입한 일본인은 78명이었으며
④울릉도의 장작지포에 ‘대일본제국 송도 규곡,명치 2년2월13일 기암충조 건립’이라는 푯말을 발견하였으며
⑤나리동을 비롯하여 6~7곳에 주민을 상주시킬 수 있는 거주지를 조사하였다.


14. 울릉도 재개척 사업은?

1883년 3월에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使)’로 임명하여 1883년 4월에 최초의 이주민 16호 54명을 정착시켰다. 일본인들 중 불법 침입한 일본인 254명을 모두 철수시켰다. 그 후 울릉도에 전임 도장(島長)을 두고 관리하다가 1895년에 도장을 도감(島監)으로 바꾸었다.


15. 근대 문서 중에 독도가 우리 땅임을 밝혀 주는 문서는 어떤 것이 있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울도군 설치에 관한 칙령인데, 그 내용은 제1조에 1900년 10월 25일자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며, 제2조에 울도군의 관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할 사’라고 한 점이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竹嶼島)이고, 석도(石島)가 독도(獨島)를 가리킨다.
전라도 방언에 돌을 독이라고 하고 돌섬을 독섬이라고 부르는데 의역하여 석도(石島)라고 했기 때문이다.


16. 독도(獨島)라는 표기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우산도라고 불렀는데, 1904년에 일본 군함 신고호(新高號)가 이 지역을 답사하고 쓴 항해일지에서 “송도(울릉도)에서 리앙쿠르드암을 한국인은 독도(獨島)라고 쓰고 본방[日本]의 어부들은 리앙코도라 한다.”고 기록한 것이 처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서 처음 발견된다. 신고함의 항해일지를 참고하면 1904년 이전부터 울릉도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 러·일 전쟁과 독도의 관계는?

1904년 러·일 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하여서는 독도가 전략적으로 매우 귀중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인식한다. 일본 해군이 설치했던 20개소의 해군 망루 중 두 개는 울릉도, 한 개는 독도에 설치하였다.
일본이 독도에 야심을 드러낸 것은 러·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18. 나카이(中井養三郞)의 독도어업 독점권은 어떤 목적에서 나왔는가?

나카이는 독도에서의 물개잡이가 이익이 많았으므로 독점권을 확보하려고 하였고, 일본 정부는 전략적 요지인 독도를 확보할 목적에서 이 사업이 추진되었다.
1904년 9월 29일에 해군성의 협조로 일본 정부의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의 세 대신에게 ‘리앙코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했다. 내무성은 한국정부와 국제적 여론을 고려하여 이 청원을 각하하려 하였으나 외무성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이를 허가해 주었다.


19. 일본 정부는 ‘독도 영토 편입’ 고시를 어떻게 하였는가?

1905년 2월 15일일의 훈령으로 시마네현의 지사에게 통고하였고,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자에 ‘다케시마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의 고시 제40호’로 “북위 37도9분30초,동경 131도 55분, 은기도에서 서북으로 85해리 거리에 있는 섬을 다케시마(竹島)라고 칭하고 지금 이후부터는 본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는 고시문을 시마네현의 <현보>에 조그맣게 게시하였다. 이 고시 내용은 지방신문인 <산음신문(山陰新聞)>에 1905년 2월 24일자에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20. 대한제국정부는 이 사실을 언제 알았는가?

1906년 3월 28일에 일본 시마네현의 은기도사 일행이 독도를 시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려서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독도 편입 사실을 알렸다.


21. 울도군수 심흥택의 조치 사항은?

심흥택은 깜짝 놀라 그 이튿날인 3월 29일에 강원도관찰사에게 긴급 보고하였다. 그 보고서에는“본군 소속 독도가 본부의 외양 백여리허에 있었는데….” “자운(自云) 독도가 이제 일본의 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시찰차 내도했다.”라고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는 내부대신에게 보고했다.

내부대신은 “독도가 일본 속자라고 칭하여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그 이치가 없는 것이니….” 라고 말하였으며, 참정대신은 “독도가 일본 영지 운운한 설은 전적으로 전혀 근거없는 주장에 속하나….”라고 말했다.

대한매일신문이나 황성신문은 특보로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울릉도의 바다에서 거리가 동쪽으로 100리 거리에 있는 한 섬이 있어 울릉도에 구속(舊屬)했는데 왜인이 그 영지(領地)라고 늑칭(勒稱)하고 심사하여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22. 1951년의 ‘대일본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왜 누락되었는가?

제1차 초안(1947.3.20.)과 제2차 초안(1947.8.5.), 제3차 초안(1948.1.2.), 제4차 초안(1949.10.13.), 제5차 초안(1949.11.2.)까지는 독도가 명기되었다가 제6차 초안(1949.12.29.)에는 일본측의 집요한 로비로 인하여 오히려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표시되었다.

이 초안을 본 다른 연합국들이 강력히 항의했는데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의 항의가 있었다. 이 중 영국은 세 차례의 초안을 작성하여 미국 측에 항의하고 지도까지 작성하여 독도가 한국 땅임을 명시하였다. 사정이 이와 같이 전개되자 미국도 당황하여 제7차 초안부터는 독도의 영유권을 한국이나 일본 어느 쪽에도 명시하지 않은 채 합동초안(1951.5.3.)를 마련하여 독도의 영유권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


23. 신한·일어업협정과 독도의 영유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협정의 제1조에 “이 협정은 대한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과 일본 측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적용한다.”고 규정한 점이 문제이다. 이 어업협정은 고기잡이만이 아니라 EEZ의 기점·기선문제를 통해 영토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제15조에는 “이 협정의 어떠한 규정도 어업에 관한 사항 이외의 국제법상 문제에 관한 각 체약국의 입장을 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