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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보유와 시장 개입

외환위기로부터 우리가 얻은 교훈은 외환시장 개입은 개입 여부와 개입 시기, 개입의 규모와 방법 등을 항상 주의해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행은 매월 외환보유액 통계를 발표해가며 외환보유액을 높이고, 관리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세계 4위의 외환보유국이다. 몇 년 전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국제 환율을 출렁이게 한 한은총재의 입
최근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외환보유액과 외환시장 개입에 관련해 발언한 것이 외환시장에 큰 영향을 미쳐 화제가 됐다. 경위는 이렇다.박 총재는 최근 영국의 유수 신문인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들이 우리나라의 시장정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잘못된 보도를 일삼는다고 판단, 중앙은행 총재로서 <FT>와의 인터뷰를 자청했다. 5월 18일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인터뷰에서 박 총재에게 달러 약세로 인한 세계 경제의 혼돈과 한국의 대응에 대해 질문했다. 박 총재는 "한국은 국가 신용도를 지키는 데 충분한 외환보유액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외환보유액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FT는 박 총재의 말을 한국은행이 더 이상 달러를 사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 '한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를 한은의 환율 방어 정책 포기로 해석한 세계의 외환 딜러와 환투기 세력은 이내 시장을 휘저어 원화 환율을 급락시켰다. 뉴욕 외환시장에서는 달러 당 995원까지 떨어졌고, 5월 1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도 달러 당 1000원선이 무너졌다.

한국은행은 원-달러 환율 급락을 막기 위해 급거 시장개입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1조 원을 들여 10억 달러어치의 달러를 사들여야 했다. 국내 언론에서는 박 총재의 말 한마디 때문에 한국은행이 단 하루에 1조 원 가까운 돈을 쏟아 부어야 했다고 일제히 비판했다. 우리나라 ‘통화신용정책의 수장이자 세계 4위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관리하는 한은 총재’로서 신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 총재는 이보다 석 달 전인 올해 2월에도 국회에서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환의 수익성 증대를 위해 외환 보유용 통화를 다변화하겠다는 뜻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었다. 그때도 원-달러 환율이 급락해 세계 외환시장이 출렁거렸고, 언론이 일제히 박 총재의 ‘가벼운 처신’을 비판했다.

최근 한은 총재의 발언이 거듭 외환시장에 파문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는 현재 한국은행이 정책적으로 달러 보유를 늘리느냐 줄이느냐 여부에 따라 국제 환율이 요동치기 쉬울 정도로 외환, 특히 달러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외환보유액이 많다는 얘기다. 몇 년 전을 생각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은행의 외환보유 얼마나 필요한가?
한국은행은 평소 달러를 포함해 일정액의 외화를 보유해둔다. 국내 은행에 맡겨두거나 대출해주는 식으로 국내 금융기관에 맡겨두거나 미국, 독일 등 선진국 금융기관의 단기예금에 넣어둔다. 금을 사두기도 하고, 비교적 쉽게 현금화할 수 있는 미국 정부 채권을 사두기도 한다.

평소 외환을 보유하고 있다가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 보유 달러를 내다 팔고 원화를 사들여 원화 가치의 급격한 추락을 막는다. 반대로 환율이 급락하면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여 원화 가치가 단기에 지나치게 오르지 않게 해서 외환시장을 안정시킨다.

한국은행이 보유하는 외환은 우리나라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의 안정성뿐 아니라 나라 경제의 대외신용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국내 기업·금융기관이 혹 외화 부족으로 외국 기업·금융기관에 진 빚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생기면 한국은행이 대신 나서 갚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은행이 국가 신용의 보루 역할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외환을 갖고 있어야 할까? 딱 떨어지는 공식은 없다. 국제금융기구인 IMF(국제통화기금 : International Monetary Fund)는 각국이 최소한 최근 3개월분의 수입대금을 치를 수 있을 정도는 보유하라고 권한다.

지난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하기 직전 8월, 우리나라의 월평균 수입액은 120억 달러였다. IMF 권고를 따른다면 당시엔 외환을 360억 달러쯤은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때 한국은행이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외환 규모는 100억 달러도 되지 못했다. 그러다 연내로 갚아야 할 단기부채 상환 부담에 몰렸다.

중앙은행마저 외환이 부족해 만기가 돌아오는 외채를 갚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잃는다. 해당국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일제히 외국 채권자의 빚 독촉을 받게 된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투자를 중단 내지 기피하고 기존 투자는 빼내간다.
외환위기 직전 한국은행에 외환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해외 투기세력은 적극 환투기에 나서 달러를 사재기했다. 이 바람에 원화 가치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폭락했다. 통화의 가치가 너무 급하게 오르내리면 외환시장과 금융시장, 물가, 기업의 수출입 등을 포함해 경제 전반에 충격과 혼란을 준다. 그래서 정부와 한국은행은 늘 원화 환율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정부에서는 재정경제부(재경부)가 외환정책 담당부처다. 재경부는 국민경제의 성장에 직접 책임을 지는 주무부처이기도 하므로 외환 문제 중 특히 지금처럼 환율이 떨어지는 경우에 신경을 더 많이 쓴다. 나라 경제가 성장하려면 수출이 잘 되어야 하는데 원화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이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달러 환율이 급락할 때면 국고채 같은 채권을 발행해 달러를 사들임으로써 환율 하락을 막는다.

정부와 한은은 왜 외환시장에 개입하나
정부 외환정책 당국과 중앙은행이 통화의 시세를 조정하려는 의도로 외환시장에서 통화나 외화를 매매하는 행동을 두고 ‘외환시장에 개입한다’고 말한다. 외환시장 개입은 어느 나라나 다 한다. 다만 아무 때나 그러는 것은 아니고 주로 환투기가 발생할 때 그렇게 한다.

환투기란 외환시세가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속성을 이용해 시장에서 외환을 투기적으로 매매하는 것이다. 국제 외환시장에서는 늘 환투기가 성행한다. 투기세력은 어떤 통화가 장차 오르거나 내릴 요인이 보인다 싶으면 그런 방향으로의 변화를 증폭시키고 그 흐름을 주도하면서 시세차익을 거둔다.

전형적인 방법은 미리 해당 통화를 사재기 하거나 팔아치워 시세의 오름세 혹은 내림세를 가속시키는 것이다. 자연히 환투기가 끼어들면 통화 가치가 너무 급하게 오르내리게 마련이다. 그 결과 해당 외환의 시세에 경제적 이해가 큰 나라는 금융시장과 수출, 국민경제가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따라서 환투기가 생기면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외환시장 흐름에 잘 대처해야 한다. 즉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외환시장 개입은 환투기를 막아 외환시세를 안정시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시장개입, 안 하느니만 못한 때는 언제?
정부나 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외환시장에서 가수요나 환투기를 막으려 하는 것이지만, 시장개입이 늘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시장개입 자체를 잘 해내는 것도 쉽지 않다. 개입 시기를 잘 못 고르거나 방법을 잘못 택하면 설사 개입하더라도 시장의 방향을 바꾸기 힘들다. 어설프게 개입했다간 투기꾼들의 기세를 한층 키워 차라리 개입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가령 원-달러 환율이 급등세인데 달러에 가수요가 붙고 환투기 조짐이 생겼다고 하자. 이럴 때 정부나 한국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한다면, 보유 달러를 시장에 대거 내다 파는 행동을 보이게 된다.

이 같은 외환당국의 개입이 유효하리라는 관측이 외환시장에 받아들여지면 투기세력의 달러 사재기는 고개를 숙이고 환율 급등세도 멎을 것이다. 원화 가치는 다시 높아지고 시세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한국 외환당국의 달러 보유액이 투기세력의 달러 사재기를 막아낼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사실이 시장에 알려진다면 투기세력은 달러 사재기를 계속할 것이고, 다른 거래자들마저 투기에 가담해 원-달러 환율은 한층 급등할 것이다. 한국의 외환당국이 달러를 팔아치우는 정도로는 시장에서 환율 급등세가 멎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이 경우 노련한 투기꾼들은 우리 외환당국이 시장에 개입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거세게 달러 사재기에 나설 수도 있다. 그래야 달러 가치가 계속 올라, 투기적 달러 사재기의 결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은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셈이다. 이처럼 정부나 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해 투기세력과 맞섰다가 패배하면 심각한 경제적 악영향이 올 수 있다.

우선 해당국 통화 가치가 국제 외환시장에서 시세의 안정성을 잃고 삽시간에 큰 폭으로 급등락할 수 있다. 외환시장은 금융시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금융시장 안정성도 교란되고, 국민경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 쉽다.

바로 지난번 우리가 겪은 외환위기 때가 극적인 예였다. 당시엔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면서 정부와 한국은행이 급거 시장개입에 나섰다. 그러나 시장엔 이미 한국 외환당국에 원화가치 하락을 막을 ‘총알(보유 외환)’이 바닥났다는 사실이 알려진 마당이라서 사태가 오히려 더 나빠졌다. 결국 외환위기가 현실화했고, 우리 정부는 IMF로부터 긴급 자금을 빌려 위기를 넘겨야 했다.당시 외환위기로부터 우리가 얻은 교훈은, 외환시장 개입은 개입 여부와 개입 시기, 개입의 규모와 방법 등을 항상 주의해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행은 매월 외환보유액 통계를 발표해가며 외환보유액을 높이고, 관리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외환위기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와서는 외환 보유액이 2천억 달러를 넘어 우리가 일본, 중국 등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환보유국이 됐다. 이젠 쓸데없이 너무 많은 외환을 보유하고 있어서 나라 재산 관리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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