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의 자긍심 '아잔타와 엘로라' 불교가 인도 대륙에서 발생한 이래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곳곳에서 그 꽃을 활짝 피워 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 열기가 대단하다. 하지만 정작 그 본고장에서는 오래 전에 이슬람이나 힌두교 등에 밀려서 발생지 일원에서나 겨우 피폐해진 흔적들을 부둥켜안고 명맥만을 유지해 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만큼 인도 대륙에서는 불교가 현지 사람들에게 잊혀진지 오래되었고 찬란했던 많은 문화유산들도 함께 버려지고 잊혀져 왔던 것이다.
그 버려진 불교의 문화유산 중에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석굴 군이 인도 대륙의 남과 북을 갈라놓고 있는 '데칸고원'에서 발견되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이다. 당시 이 두 석굴의 발견은 곧 인도 대륙 내의 불교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 주고도 남을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했다는 면모를 과시하는데 한몫을 한 셈이라고나 할까.
밀림 속에 잠들어 있던 석굴 사원 '아잔타' 아잔타 석굴이 발견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1819년 영국 관리들이 이 데칸고원 일대에서 사냥 중에 호랑이를 쫓다가 밀림에 묻혀 있던 암벽 사이의 동굴을 발견하게 된 것인데, 그 안에는 휘황한 채색벽화, 각종 조상(彫像)들이 있었고, 그 일대가 온통 그와 같은 석굴의 집합소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당시 거의 대부분이 매몰되거나 야생의 넝쿨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하였지만 몇 군데는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영국 정부에 의해 한 차례, 인도 독립 후 두 차례에 걸친 발굴·복원이 있어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불교 유적지의 하나로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말발굽처럼 휘어진 '와고르(Waghore)' 천변(川邊)의 암벽 지대를 따라 펼쳐져 있는 이곳은 대략 500m에 걸쳐서 30개의 석굴 사원이 뚫려 있는데, 모두 자연 암벽을 뚫고 들어가면서 기둥을 만들고 불상이나 불탑을 만드는 수법으로 완성한 석굴이다. 근래에 들어서 입구에서부터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놓고 있는데, 1번부터 26번까지가 완성된 석굴이고 27번부터 30번까지는 미완성이다. 석굴 하나 하나가 입구에서만 바라볼 때는 별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는 순간 그 엄청난 규모, 현란한 조각, 벽화들이 소문을 사실로 증명하고 있다. 당시 별다른 기계도 없었을 텐데 무슨 재주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단 말인가!
이곳의 역사는 기원전 2세기경에 남북을 오가던 불교 승려들이 우기에 비를 피해 수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석굴 승원(비하라)과 탑원(차이타야)을 판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곳을 수행지로 선택한 것은 남북을 연결하는 교역로가 가까이에 있어서 식료품과 물자 구입이 그만큼 손쉬웠고, 교역로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어서 수행과 명상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해 오던 승려들이 기원전 1세기경에 돌연 자취를 감추게 되어 일시적으로 이 석굴들은 버려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초창기에 조성된 석굴이 제8, 9, 10번과 제12, 13번 굴로 이른바 소승불교 시대를 말해 주고 있는데, 이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은 제9번과 10번 굴이다. 이 시대에는 무불상 시대의 특징대로 부처님의 모습을 직접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본당 중앙에 거대한 돔을 연화대 위에 안치하였다. 그것은 그냥 종을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서, 높다란 천정과 장중한 안정미를 주고 있다. 또 좌우에는 회랑의 형식으로 기둥을 깎아 놓고 사람이 걸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벽면에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수도승들의 노력이 이뤄낸 문화 유산 그 후 4세기에 들어오면서 다시 승려들이 이곳 아잔타에서 수행을 시작하며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이 시대는 이른바 대승불교 시대로 부처님이 불상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니까 석굴의 입구에 들어서면 여러 개의 기둥으로 떠 받혀 있는 큰 홀이 있고 그 뒤로 작은 감실(龕室)이 있어 그곳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있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그 중에서 19번 굴의 불상이 특이하고 26번 굴의 거대한 열반상이 인상적이다. 이 아잔타의 석굴들은 대개 자연의 빛을 이용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둡다. 특히 오전에는 거의 볕이 들지 않고 오후에야 한 가닥 석양빛이 문틈을 타고 내려앉는다.
또 이곳 아잔타에 남아있는 유명한 벽화들도 거의가 후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특히 1번 굴의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상은 아잔타의 벽화를 대표하고 있으며, 2번과 4번 굴에 남아 있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는 상당 부분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세밀함은 물론이요, 색감과 질감에 있어서도 완벽 그대로다. 원래 기둥들과 천장 그리고 벽면들마다 모두 벽화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천장이나 기둥들에 있었던 것들은 거의가 없어지고 벽면에만 주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이것들도 훼손의 정도가 심해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던 이 아잔타 석굴이 8세기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버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밀림에 묻혀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낮과 밤에 돌을 깎으면서 불은(佛恩)을 생각하였을 수도승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에게 있어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이 엄청난 문화유산을 남겼고, 지금은 모두 떠나고 이 자리에 없다. 이 몸이 무슨 인연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됐는지는 몰라도 그분들의 사연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덧없는 시공을 뛰어넘어 느껴 보는데는 부담이 없다.
엘로라의 대표적인 사원 '카일라사나트' 아우랑가바드에서 서쪽으로 30㎞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엘로라' 석굴은 아잔타와는 달리 시야가 확 트인 바위 구릉 지대에 조성되어 있는 34개의 석굴사원이다. 이 엘로라 석굴 또한 아잔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6세기 이후 점차 불교가 쇠퇴해감을 틈타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이 옆에 들어서게 되어서 약 200년쯤 후대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불교 석굴, 힌두교 석굴, 자이나 석굴이 정연하게 나열되어 있다. 아잔타의 석굴이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사로잡는다면, 이 엘로라 석굴은 그 엄청난 규모 면에 있어서 우선 사람을 사로잡는다. 그 대표적인 석굴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카일라사나트' 사원이다.
엘로라에 와서 이 카일라사나트 사원을 먼저 봐 버리면 다른 곳이 재미없어진다고 할 정도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곳이 바로 이 힌두교 사원이다. 작은 산처럼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사원은 힌두의 신 '시바'를 상징하고 있는데 본당의 높이가 33m, 넓이가 47m에 이른다. 그리고 그 정문, 법당, 석탑 등이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고, 그 건물들의 외벽은 모두 현란한 부조와 힌두신상 등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이 엄청난 규모와 섬세함이 당시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거대한 암벽을 위에서부터 차츰 아래로 파 내려오면서 이루어 낸 이 사원은 75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100년 이상이 걸렸다고 하니 수 세대에 걸친 대공사였을 것이다. 보는 이들마다 탄성을 연발하는 이 카일라사나트 사원! 인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현장이다.
너무도 상대적이지만, 동시에 위대한… 이 엘로라 석굴을 아잔타 석굴과 비교해 본다면, 아기자기한 여성적인 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잔타이고 엘로라는 우람한 남성미를 지니고 있다. 또 아잔타가 벽화를 들고 나온다면 엘로라는 조각을 말해 줄 것이다. 이처럼 상대적인 멋을 지닌 이 두 곳을 보고 나면 실로 종교의 힘이 위대하고,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는 것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