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사회에서 교원의 권위는 추락할 만큼 추락하여, 더 추락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초중등학교의 경우 얼마 전까지는 ‘촌지 문제’가 교사의 권위를 추락시키던 주범이었는데, 최근에는 ‘성적조작 문제’까지 불거져 교사들의 권위를 또 한번 거꾸러뜨렸다. 대학에서는 ‘성희롱’이나 ‘연구비 유용’ 등이 교수들의 권위에 먹칠을 하는 단골 소재로 등장한 지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교원들의 권위나 사회적 위상은 나날이 추락하는데도, 요즘 교직을 원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증가하여, 교직에 진입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고 한다. 교사의 위상은 추락하고 있는데도 교직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느는 까닭은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간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서 신중하게 답변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 까닭을 “교직은 ‘철밥통’으로 불황기 최고 인기직종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현실적인 답변이겠지만, 또한 매우 위험한 답변이기도 하다. 이들의 생각에 의하면 교육은 서비스산업이요, 교직은 서비스업종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세(市勢)에 따라 부동(浮動)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들에게 우리의 교육을 맡겨둘 수 있는 것인가? 우리의 교육현실을 개선하고자 조금이라도 고심한다면, 우리는 고육책(苦肉策)으로 다른 답변을 찾아내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사후적(事後的)으로라도 ‘교직의 사명’을 새롭게 각성시킴으로써, 이해(利害)에 부동하는 서비스업종과 교직을 차별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근래의 ‘교원평가제’에 대한 논란도 근원적으로 교육 또는 교직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필자가 대략 알기로는, 교원평가제를 찬성하는 논리는 교육의 질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원들을 평가하여 차등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교원의 평가에는 수요자들인 학생이나 학부모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짐작하기에 이러한 논리의 저변에 깔린 전제는 ‘교육은 서비스산업’이라는 것이다. ‘교육의 경쟁력’ 운운하는 것도 그렇고, ‘수요자(고객)의 평가’라는 것도 그렇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생각이 점차 확산되고 있으며, 대학교육은 이미 시장경쟁의 논리에 내맡겨져 있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구태의연하게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다시 던져본다.
우리는 흔히 교육을 ‘지식기능 교육’과 ‘인격덕성 교육’으로 대별한다. ‘지식기능 교육’은 피교육자가 원하는 지식과 기능을 전수하는 것이니, 이 측면에서는 교육은 서비스 산업과 유사하다. 외국어를 가르치고 컴퓨터를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공교육기관은 저자거리의 사교육기관과 다를 바가 없다. 요즘에는 사교육기관에서 더 잘 가르친다는 소문도 공공연하다.
그렇다면 공교육기관을 폐지하고, 사교육기관에 일임하면 좋을 것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인격덕성 교육’이 교육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격덕성 교육’은 피교육자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교육자의 입장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교육해 가는 것이다. 이는 ‘고객’이 원치 않는 것도 강요하는 것인바, 이 측면에서 교육은 서비스 산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사교육기관에 인격교육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또 인격교육에서는 피교육자를 한 사람 한 사람 감화시키는 것이 중요할 뿐, ‘교육의 경쟁력’이란 애초에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이다.
교육을 단순히 서비스산업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데에 교직의 특수성이 있다. 그리고 교직의 이러한 특수성은 결국 교원 개개인을 ‘독자적인 권위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사는 시세(時勢)나 주변의 평가에 영합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숙한 학생들은 교사의 심모원려(深謀遠慮)를 이해하지 못하고 호오(好惡)를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지금 논의되는 방식의 교원평가제란 부적절할 수 있다.
요컨대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교원평가제에 대한 찬반은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교육을 서비스산업이라고 인식한다면 당연히 교원평가제를 시행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을 서비스산업 이상의 것이라고 한다면 교원평가제의 시행은 부적절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교원이 교직을 단순히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여긴다면 그에게는 교직이란 서비스업일 것이다. 서비스업 종사자는 고객의 평가를 달게 받아야 한다. 그런 교원이 교원평가제를 반대하면 그것은 ‘무사안일주의’로 밖에는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