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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이 품은 절터를 찾아

조현호ㅣ울산 옥현초 교사


등산 좋아하시는 분들은 삼도봉(三道峰)을 아실 겁니다. 충북 영동, 전북 무주, 경북 김천에 걸쳐 있는 산이라서 삼도봉이라 불리게 되었지요. 우리 답사자들, 특히 절터를 즐겨 찾으시는 분들께는 '3도(道) 3주(州)'가 있습니다. 3도는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를 말하고 3주는 여주, 원주, 충주를 이릅니다. 행정구역이 다른 세 고을이 남한강을 끼고 이웃해 있습니다.

지금이야 그 중요성이 덜해졌지만 이전의 남한강은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를 꿰뚫어 흘러내리는 국토의 대동맥이었습니다. 강을 따라 쌀, 생선, 소금, 목재 등이 교류되었고 조운창과 나루터가 곳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조선의 도읍지로 한양을 선정할 때도 한강이 사방 고을의 중심에 있고 배와 수레가 통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으니 한강의 본류인 남한강은 그 중요성으로 인해 곳곳에 성, 나루터, 절을 많이 남겨 두었습니다.

이 지역 절터 답사의 멋은 잠시만 달리면 3도(道)를 넘다들면서 웅장한 절터를 만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제자리에 있어야 할 유물들이 왜란으로, 근현대기를 거치면서 외지로 옮겨져야 했던 아픔이 있습니다. 오는 10월 28일 문을 여는 용산 국립박물관 야외에서 만나게 될 염거화상탑, 흥법사 진공대사탑 및 석관,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등이 모두 남한강 일대 절터에서 옮겨진 석조물들입니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이 유물들이 고향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이번 호에서는 3도 3주 고을에 걸친 남한강 자락의 절터를 중심으로 답사를 떠나 봅시다.

법천사터, 거돈사터, 흥법사터 - 강원도 원주

원주 땅은 고려시대에는 남경이었던 한양과 가까웠고 물길을 통해 도읍지 개경과의 출입이 용이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중원(충주)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북원이었습니다. 후삼국 시대 양길의 중심무대이기도 했죠. 이런 막중한 역할을 했던 곳이라 그럴까요, 원주 땅에만 법천사터와 거돈사터, 흥법사터 등 큰 절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부론면 법천리 일대에 자리 잡은 법천사(法泉寺)는 남한강 지류인 여강 나루터가 가까이 있어 크게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10년간 장기계획으로 2001년부터 2010년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발굴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유물과 유적이 확인되어 법천사(法泉寺)는 절 이름 그대로 부처의 말씀[法]이 오랫동안 샘솟아[泉] 발전해 왔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도전터에 자리한 지광국사현묘탑비는 비석 양 옆면의 섬세하고 날렵한 용조각과 비신 상단 비천상 및 새 조각이 탄성을 자아냅니다. 화려함의 극치란 이런 건가요? 탑비 앞 석조물 중 답도석으로 추정되는 아치형 석조물은 돌을 주물러 연꽃을 새겼는데, 꽃봉오리가 쑤욱쑤욱 솟아나고 그 향기가 진동할 듯하네요. 원주 출신인 지광국사 해린은 문종의 신망을 받아 그의 왕사(王師)가 되어 국사(國師)에 올랐습니다. 그가 열반에 든 후에는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이곳에 운집하여 신기(神技)를 발휘하여 탑과 탑비를 만들었을 터입니다. 귀갑문에 ‘왕(王)’자를 새기는 것도 잊지 않았네요. 탑비와 함께 있었던 지광국사현묘탑은 1912년 일본인에 의해 약탈되어 오사카의 개인 집에 반출되었다가 1915년에 되돌려 받은 후 6·25로 인해 비신이 산산조각이 난 후 복원한 것입니다. 흡사 3층 석탑과 같은 외형에 갖가지 장식으로 꾸며 화려해 보입니다.

법천사 주변에는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 태재 유방선, 조선중기 손곡 이달, 조선후기에는 해좌 정범조 등이 머물며 많은 제자들을 길렀습니다, 허균과 허난설헌도 손곡 선생에게서 수학하였는데, 허균이 1609년에 이 절을 찾았을 때는 이미 폐사된 채 탑비는 두 동강나 있었다고 합니다.

법천사 너머에 거돈사(居頓寺)가 있었습니다. ‘거돈(居頓)’에서 ‘거대하다, 둔중하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으신가요? 웅장한 축대와 그 축대에 뿌리를 내린 수백 년 생 느티나무만 봐도 예사 절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발굴이 끝나 잘 정비된 절터에는 고려 왕사였던 원공국사 승묘탑비,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 금당터 위 불대좌 등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원공국사탑비가 있으니 원공국사 부도도 있었겠지요? 절터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던 원공국사승묘탑은 일제강점기 서울에 있던 일본인의 집으로 약탈된 후 여태 서울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천사 승탑(부도)과 탑비는 흥법사터나 고달사터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부도와 탑비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묵묵부답인 절터는 모두의 상상을 다 받아줍니다.

보물 제78호인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는 1025년(현종 16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귀부는 용의 머리에 귀갑(龜甲)문에는 만(卍)자와 연꽃무늬를 교대로 넣었고, 법천사터 탑비와 같이 ‘왕(王)’이라는 글자도 보입니다. 원공이 왕사였음을 귀띔해주고 있습니다.

흥법사(興法寺) 터는 원주시 지정면 영봉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절터 앞으로는 남한강 지류인 섬강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인근에 건등산(建登山)이 있듯이 이 일대는 왕건과 견훤의 접전지였습니다. 열세에 몰린 왕건은 진공대사의 도움으로 승리하는데 왕건은 그를 왕사로 대접하고 그가 입적하자 친히 비문을 지어 주었습니다.
절터에는 보물 제46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보물 제463호인 진공대사탑비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는데요, 고달사터 원종대사혜진탑비와 같이 비신(碑身)은 제자리에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습니다. 보물 제365호인 진공대사탑과 석관(石棺)은 탑비의 비문과 함께 1931년 경복궁으로 옮겨간 후 여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흥법사 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인 국보 제104호인 염거화상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1914년경에 탑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경복궁으로 옮겨졌었는데 도굴에 참여하였던 일본인들이 이 부도가 흥법사에 있었다 하여 ‘전(傳)’자를 붙이게 된 것입니다. 부도에서 출토된 탑지(塔誌) 명문을 통해 절대연도가 분명하여 우리나라 부도의 기원이자 정형으로 자리 잡았지만 출처가 분명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네요.

고달사터-경기도 여주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고달사는 혜목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절을 중흥시킨 원종대사 찬유는 혜목산이 항상 고운 노을이 덮여 있어 연좌하기에 좋고 구름 덮인 계곡은 선거(禪居)에 좋은 곳이라 하였습니다. 현재 발굴작업이 한창인데요, 고려 초에 고달원(高達院) 혹은 고달선원(高達禪院)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희양원, 도봉원과 더불어 고려 왕실의 대폭적인 지원을 받는 선원으로 인정받아 사역(寺域)이 사방 30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등 지정 문화재가 즐비합니다. 1916년에 무너졌던 원종대사혜진탑비 비신은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다시 용산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껏 타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비신을 받치던 귀부의 두 눈은 날카로운데 집 나간 두 녀석을 빨리 집으로 보내달라고 소리 없는 주문을 해대고 있는 듯합니다.

고달사터 부도는 장중함과 섬세함이 어울린 생동감이 압권입니다. 부도의 주인이 누구냐에 대해선 논란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일찍이 도굴되어 유물이 남아있지 않은데, 몇 년 전 또 다시 도굴꾼에 의해 지붕돌이 훼손되는 등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아픔을 딛고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라 그나마 다행인데, 각 면에 안상(眼象), 연꽃문양, 거북이나 용, 구름, 문비(門扉), 사천왕상, 비천상 등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원종대사혜진탑은 고달사를 중창시킨 원종대사(元宗大師, 869∼958)의 부도인데, 전체적으로 보아 고달사터 부도와 닮았지만 세세한 조각술은 떨어집니다. 두 부도 모두 지붕돌 아래 비천상이 아름다운데, 일찌감치 몰지각한 이들의 탁본 대상이 되어 두 곳 비천상에는 먹물자국이 배어 있어 안타까움이 더해집니다.

방형 석불대좌 위에는 철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1959년 서울로 옮겨진 쌍사자 석등은 하대석에 사자 두 마리가 웅크리고 있고 중대석에는 구름 무늬로 장식하였으며, 상대석은 방형에 연꽃을 새기고 그 위에 화사석을 둔 매우 특이한 형태입니다. 이에 반해 청룡사터 석등은 간결한 멋이 있고 사자가 한 마리 웅크리고 있어 비교됩니다.

청룡사터-충청도 충주

화창한 어느 날, 한 도승이 충청도 충주 땅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용 두 마리가 하늘에서 여의주를 갖고 놀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 도승이 이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靑龍寺)라 불렀다고 합니다. 고려 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어 다른 절터에 비해서는 그리 역사가 오래되지 않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각국사를 만나러 가는 오솔길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일품입니다. 발굴한답시고 파헤쳐진 모습보다 그냥 그대로 두는 것도 아름다운 까닭입니다.

청룡사 위전비(位田碑)를 지나 몇 발자국 오르면 사리공을 드러낸 부도와 석종형 부도가 안내판 없이 모셔져 있고, 이 부도군을 지나면 국보 제197호인 보각국사정혜원융탑과 탑비(보물 제658호), 사자석등(보물 제656호)이 나타납니다.

고려 말 보각국사 혼수의 부도는 외형적 특징은 몸돌과 기단부 중간돌을 부풀려 놓은 모습이고 지붕돌의 합각마루에는 특이하게 용머리와 봉황이 수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8각의 몸돌에는 사천왕을 새겨져 있습니다. 표면에는 반룡(蟠龍)이 기어오르고 있어 아름다움과 조각의 정교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단조로울 수 있는 탑비는 양 끝 모서리를 살짝 깎아 석등, 부도탑과 잘 어울립니다.

장인들의 장인정신. 혹 오늘날 장인들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두들기며 그 작업에 혼을 담기보다 기계에, 컴퓨터에 더 의지하지는 않는가요. 정으로, 망치로 바위 속에서 사자를 찾아내고 글자를 새기고 사천왕상을 찾아낸 옛 석공들의 집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회암사터-경기도 양주

양주는 남한강과는 무관한 절터이지만 역시 여주와 함께 경기도에서 ‘주’로 끝나는 고을 중 한 곳입니다. 회암사(檜巖寺)터는 천보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 초기 왕실의 호위를 받았던지라 그 규모가 대단할 뿐더러 왕실의 행궁 역할도 맡았던 곳입니다. 인도 승려 지공이 이곳에 들렀다가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 아라난타 절과 같다 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나옹이 절을 짓고 나옹의 제자이자 조선 최초요, 최후의 국사였던 무학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현재 발굴중인 회암사터는 모두 8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목은 이색이 회암사를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전합니다.

보광전이 5칸, 설법전이 5칸, 사리전이 1칸, 정청이 3칸, 정청 동쪽과 서쪽에 방장(方丈)이 두 곳으로 각 3칸. 동쪽 방장 동편 쪽에 나한전이 3칸, 서쪽 방장 서편 대장전 3칸 등이고 지붕이 연달아 뻗쳤고, 골마루가 덩굴처럼 돌아서 높고 낮고 아득한 것이 동서를 모르겠다. 무릇, 집 지은 것이 2백62칸이다. 이로부터 재간 좋은 사람이 대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이런 큰 절은 운영하는 것만 해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터입니다. 그래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앞글에 이어 ‘종루를 보수하면 객실에는 미치지 못하고, 동쪽을 수치(修治)하면 서쪽이 벌써 기울고, 남쪽을 고치느라면 북쪽이 또 상했다고 하니 대개 절이 큰 까닭에 일이 거창했고, 일이 거창한 까닭에 사람이 능히 두루 짓고 다 잇지 못하여 드디어 온 나라에서 큰 절간은 거의 빈 집이 되었다’고 이릅니다. 사세가 다한 절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폐허로 남게 되는 까닭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절터를 벗어나 새로 지은 회암사 쪽으로 올라가면 산등성이에 자리한 지공, 나옹, 무학의 부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공과 나옹의 부도는 별다른 장식 없이 꾸밈이 적은 것이 멋이고, 무학의 것은 화려함이 멋입니다.
왕실불교를 표방하던 고려시대에 이어 척불을 말하면서도 왕실의 비호를 받았기에 회암사 터는 조선 최대의 사찰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궁궐에서만 사용하던 청기와가 발굴되고 왕실에서 사용하던 백자가 출토되고, 잡상, 용봉문양 막새 등이 발굴되는 것에서 회암사 터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느껴봅니다.

모두 제자리로

제 아무리 예쁜 꽃도 시간 앞에서는 지고 맙니다. 그 시간은 남한강 대찰도 폐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부귀영화도 바람 한 줌과 같은 것, 절터를 찾으면 나뒹구는 들풀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욕심 부리지 말라고, 하심(下心)을 가지라고.
미처 다 싣지 못한 절터에 대한 아쉬움을 접어야 하겠네요. 다음 호에는 중국 동북지방의 고구려 유적을 찾아가겠습니다.

이 글을 다 쓸 즈음에 딸 아이가 피아노에 맞추어 동요를 부릅니다.
“모두 제자리, 모두 제자리, 모두 모두 제자리 / 모두 모두 제자리, 모두 모두 제자리….♬”
고향 잃은 폐사지 석조물들이 하루 빨리 제자리를 찾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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