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리' 석약녘 풍경)
글·사진 | 박하선·사진작가, 여행칼럼니스트
행복이 넘치는 푸리행 열차
캘커타의 '하우라' 역을 빠져나간 열차는 덜거덕거리며 남쪽으로 달린다. 차창 밖으론 서서히 어둠이 깔리면서 혼돈의 세계를 잠재우고, 열어놓은 창틈으로 밀려드는 밤공기가 머리카락을 휘젓는다. 이 열차는 벵골 만의 해안가에 위치한 '푸리(Puri)'행 익스프레스다. 주변에 자리한 인도인들은 휴가를 떠나는지, 아니면 성지 순례를 가는지는 몰라도 서로를 부르면서 한껏 들떠 야단법석을 떤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가슴 부풀게 하는 것일까?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자들은 모두가 행복하다고 하잖는가. 그것이 단체로 왁자지껄하게 몰려다니는 싹쓸이 여행이든, 사장님의 지시를 받고 급히 떠나는 출장여행이든, 또 갈 곳을 모르는 아이의 무심한 여행도, 죄를 짓고 숨을 곳을 찾아다니는 도망 여행까지도. 그래서 몇 번에 걸친 인도여행에서 꼭 빠지고 말았던 '푸리'를 이번에야 찾아가는 이 몸을 포함한 열차안의 모두는 정말 행복한 것이다. 몇 군데의 역을 거치자 이제 하나 둘 잠자리 준비를 한다. 이 밤을 꼬박 새고 나면 푸른 안개에 둘러싸인 '푸리'에서 아침을 맞게 된다.
신전 순례와 백사장의 낭만
푸리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하나는 '자가나트'라는 거대하고 유서 깊은 사원이 있어 여러 힌두 성지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특히 6월에 '라트 야트라'축제가 열리게 되면 거대한 태양신의 마차바퀴에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어 목숨을 바쳐가며 열광한다. 또 근교에 있는 웅대한 ‘태양의 신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순례지다. 푸리의 또 다른 얼굴은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안 휴양지이다. 대도시의 소음을 피해온 사람들이 모처럼의 휴일에 햇볕과 바닷바람으로 세속의 잡념을 씻는다. 특히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이 금빛으로 물들 무렵, 벵골 사람들이 해를 향해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을 거니는 것은 곧 '우주의 메시지'이다.
이렇듯 '신전도 순례하고 해수욕도 즐기고' 라는 외침 아래에 연중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신전은 신전대로 순례자들로 정신이 없고, 해변은 순례를 마친 인도인들로 열기가 끊이지 않는 곳이 이곳 푸리이다. 이렇듯 벵골 사람들의 대표적 휴양지가 되다보니 많은 상사들이나 관공서들도 앞다투어 이곳에 휴가 시설을 확보하면서 푸리에서의 휴가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푸리의 매력은 신전 순례와 하얀 백사장의 낭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문명사회를 뒤로한 여행자들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그것은 순례객들과 휴양 온 사람들을 뒤로하고 바다만을 묵묵히 바라보며 살아 온 어민들의 질박한 삶을 가까이서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의 푸른 안개 속을 걸어 곧장 해변으로 갔다. 시야가 확 트인 바다 벵골해가 일단 시원스럽다. 수많은 조각배들 떠있는 수평선 위의 하늘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가운데 백사장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물을 당기며 아침을 열고 있다. 걷어 올린 그물에서 퍼덕거리는 잘잘한 은빛 물고기들을 따내던 한 사내와 눈인사를 나눈다. 그래 참 좋은 아침이다. 휴양객들은 아직껏 단잠에 빠져있는 듯 어부들만이 이렇게 한가롭다. 길게 뻗어있는 백사장을 걸어 어촌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가다보니 도처에 지뢰밭이다. 어민들이 궁둥이를 까고 앉아 만들어 놓은 그 황금덩이 지뢰들은 들물이 되면 모두 파도에 씻겨 나가겠지만 한동안은 백사장을 거닐 때 경계해야 할 장애물이 되고 있었다.
바다만을 바라보는 질박한 삶
어촌 앞 백사장의 분위기는 이른 아침부터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밤새 고기잡이 나갔던 어선들이 속속 들어와 백사장 여기저기에 고기들을 풀어놓고 즉석 경매에 부치는가 하면, 서로 자기가 사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지를 않나, 원색의 사리차림에 배꼽을 들어내 놓고 고기들을 이어 나르는 여인네들의 바쁜 움직임에 활기가 넘쳐난다. 이곳에서 제일 흔히 잡히는 것은 '전어'처럼 생긴 '루빨리' 라는 것이지만 '킹피쉬', '튀나', '상어' 같은 큰 것들도 많다. 큰 고기들을 놓고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틈새에 끼어들었다. 1m가 훨씬 넘을 것 같은 킹피쉬들을 보니 군침이 돈다.
"야, 이거 초장만 있으면 기가 막히는 건데! 이거 얼마죠?"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다. 비교적 깔끔한 옷차림의 한 사내가 답했다. "600루피(15,000원)! 최상품이여!" 우리 물가로 생각하면 싼 값이지만 이곳 물가로 볼 땐 보통 값이 아니다. 이 사람들이 외국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우나 싶었는데 그 사내가 보여준 거래 장부를 보고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이 비싼 것들을 누가 사먹나 했는데 알고 보니 냉동해서 '델리'나 '마드라스' 등으로 보낼 거란다. '이 사람들 금방 부자가 되겠네!'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담배 있으면 한 개비 달라고 하면서 그 장부를 들고 있던 사내가 말을 이었다. "어부들은 돈이 없어요! 여기 있는 수 백 척의 어선들은 모두 단 두 사람만의 소유거든." 참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까 어부들은 모두 그 소작인이라는 말 아닌가! 그래서 그 큰 고기들을 많이 잡아와도 정작 어부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경비를 제하고 나면 별것이 없고 선주인 그 두 사람만 배불리고 있었다.
여기에 이곳 어부들의 애환이 있다 보니 삶의 형편은 가히 원시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곳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6월에서 11월까지는 낮에 고기를 잡고, 12월에서 3월까지는 밤에 고기잡이를 한다고 한다. 작업을 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그늘 밑에서 낮잠을 자거나 아니면 배나 그물을 손보고, 또 여인네들은 '루빨리'라는 작은 고기들을 소금에 절해서 건조시키고, 아이들은 세상의 근심을 아랑곳하지 않고 발가벗고 마음껏 뛰논다. 아직 원시의 멋이 살아 있는 곳이다.
순수함과 욕심이 공존하는 삶
며칠째 되던 날 정오 무렵이다. 백사장에 인접해 있는 찻집에서 쉬고 있는데 여느 때처럼 몇 몇 사람들이 그물 줄을 백사장으로 걷어 올리고 있었다. 첫날부터 자주 보는 것이고, 그때마다 걷어 올린 그물에는 신통한 것이 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었다. 어선들과는 달리 이 그물은 마을 사람들 것이어서 잡힌 고기들은 모두 그들 것이 된다고 했다. 그물 줄이 꽤 길어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술렁대더니 큰소리로 외치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니고 하면서 백사장에 심상치 않는 기류가 흘렀다.
알아본 즉, 그물에 엄청난 고기떼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물을 당기자 정말 은빛 고기들로 꽉 차다 못해 넘쳐나고 있었다. 새로운 그물을 가져와 주변에 다시 둘러쳤지만 새어나가는 고기들도 부지기수다. 마음이 급해진 사람들이 미처 물 밖으로 올라오지도 않은 어망을 놓고 마누라를 부르고, 자식들을 부르고 하면서 한 마리라도 더 잡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손이 부족해 더 잡지 못하는 것이 '천추의 한이다'는 식이다. 또 잡은 고기를 담을 그릇이 작아 그것도 안타깝다. 그래서 식구 중 어떤 이는 고기를 잡고, 어떤 이는 고기를 나르고, 또 어떤 이는 백사장에 부려 놓은 고기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서로 더 많이 갖기 위해 싸움이 일어나 경찰을 불러오기까지 하는 등 몇 시간 동안의 전쟁을 치렀다. 이 광경은 지구가 망하는 날에나 벌어질 것 같은 그런 아비규환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순박해 보이던 사람들도 욕심은 있고, 다투면서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어민들은 고기를 많이 잡아 신나고, 나 같은 구경꾼들은 난데없는 구경거리를 만나 신났다.
이렇듯 한쪽 백사장에서는 휴양객들이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또 다른 백사장에서는 어부들의 질박한 삶의 현장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푸리의 매력이다. 석양 노을을 바라보면서 오늘 저녁 식사는 어떤 생선 요리가 좋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해본다.
* <새교육> 4월호에는 '푸리'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사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