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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실용미와 문기를 지닌 연적

서예의 중요한 도구로 사랑을 받은 연적.
연적은 단순히 물을 담는 용기가 아니라
자애롭고 순박한 선비의 정신을 표현한다.
조상의 지혜를 갖춘 연적을 만나보자.


컴퓨터를 켜면 하루에도 수많은 스팸메일이나 지인들로부터 편지가 도착해 있다. 그리고 중요한 업무나 전달사항도 전자메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연말연시가 되면 정성들여 쓰던 카드도 이젠 전자메일 편지지를 이용해 내용에 알맞은 갖가지 예쁜 도안들로 채워진다.

옛날처럼 기다림도 설렘도 줄어든 전자메일은 글의 내용 외에는 어느 한 곳이라도 상대방의 향기를 맡기 힘들다. 그것은 아마도 직접 쓴 글씨를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글씨는 사람마다의 개성이나 마음씨를 알 수 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삐뚤삐뚤하지만 그 아이의 마음이나 태도를 읽을 수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글씨만 봐도 그 사람의 품성과 인격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주인의 인간성과 교양 반영해
서양화가 유입되기 전 먹이 주재료였던 우리 선조들은 글씨 혹은 그림 속에 자신의 감정과 능력을 담아냈으며, 그림과 글씨를 나타낼 때는 완벽하게 재료를 준비하고 표현을 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흔히 문방사우라 일컫는 벼루, 먹, 종이, 붓 외에도 글과 그림의 재료로 종이를 누르는 서진과 종이 아래 놓는 깔개가 있고, 먹을 갈 때 사용할 물 담는 연적 등이 있다. 그 중 연적은 글씨와 그림으로 완성된 작품을 보기 전에도 그 주인의 마음씨를 잘 알게 해 준다.

물체는 자그마해도 큰 모습을 지닌다든가 형체로는 안 보여도 지조와 도량 있는 마음씨가 숨어 있다든가 하는 잠재적인 아름다움은 문방 용품들이 지닌 미덕이리라. 특히 벼루나 연적처럼 항상 주인의 좌우에 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고 또 손수 길들이는 알뜰한 물건일 때는 주인의 인간성과 교양이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서울 성북동 옛집에는 박물관과 달리 진열장이 아닌 문갑 위에 놓인 아름답고 귀한 연적을 쉽게 볼 수 있어 좋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유난히 잘 읽는 감식안을 가진 혜곡 최순우 선생은 특히 두꺼비연적을 좋아하여 항상 그의 문갑 위에는 두꺼비연적을 올려놓기도 했다.


연적을 만든 도공의 마음과 그것을 알아챈 주인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을 사용하여 표현되는 글과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감동을 일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기 마련이다. 대개 연적 하나라도 안목이 세련된 문인이나 묵객 스스로 손수 선택하는 경우가 보통이므로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도 쓰는 이들의 높은 안목에 이끌려 호흡을 맞추어가는 것이리라 여겨진다.

또 손 안에서 체온을 느끼도록 자그마하게 만들어졌지만 적당하게 물을 쏟아내는 기술은 매우 과학적인 지혜가 들어 있다. 지금은 연적까지 제대로 갖추어 쓰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과학적 실용미와 기운 생동하는 문기(文氣)를 간직한 연적을 살펴서 참다운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기로 한다.

숭고한 선비정신 그대로 나타내
연적(硯滴)은 벼루에 붓기 위한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수적(水滴) 또는 수주(水注)라고도 한다. 적절한 양의 물을 담아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문자를 쓰거나 물감을 풀어 그림을 그릴 때 벼루에 적당한 양의 물을 떨어뜨려주어야 하는데 그 목적을 위하여 고안된 그릇이다. 두 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물을 담고 따르기에 용이하게 만든 것으로 은, 동, 유기(鍮器), 자기(磁器), 대나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형태는 매우 다양하며 공기구멍과 물을 주입시키는 구멍으로 나뉘어 있고, 수구(水口)쪽으로 기울여 공기를 조절하면서 적당량의 물을 따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즉, 구멍을 둘로 내어 공기를 조절함으로써 연적 안에 물을 넣고 또 원하는 만큼의 물이 나오도록 조절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 무렵부터 청동제의 연적이 나왔으며, 도자기제는 송나라 이후에 많이 만들었다.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걸쳐 번창했던 강소성의 의흥요(宜興窯)에서는 붉은 색, 검정색, 갈색 등의 차주전자형 연적이 활발하게 제조되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벼루를 써왔으므로 벼루에 물을 주기 위한 연적도 함께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것으로 희귀한 고구려의 도제 거북연적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지식인 사이에 문방 취미가 보급되면서 아름다운 청자연적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거북형이나 오리형 등의 청자연적을 많이 사용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백자로 된 것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연적 역시 그 형태에 있어 다양해졌다. 전기에는 분청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지금 전하는 대부분의 연적은 백자연적이다.

조선시대 순백의 연적은 유교를 숭상하던 선비정신을 그대로 잘 나타내주며, 또 산수화가 그려진 연적은 후기에 한강변의 분원에서 구워낸 것으로 작은 연적에 산수를 그려 넣어 호연한 세계를 보려한 조선선비들의 아취(雅趣)와 문기를 엿보게 한다.

청자나 백자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놋쇠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자기로 만든 것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대나무, 은, 동, 주석으로 만든 것도 있다.

표면엔 각종 무늬를 넣어 완상(玩賞)하게 하였다. 그 형태는 거북이, 원숭이, 오리, 산의 모형, 복숭아, 동자상(童子像), 사각, 부채, 육각, 보주, 두꺼비, 해태, 물고기, 화형(花形). 무릎형, 고리형 등에 산수나 꽃, 동물, 곤충을 그려 넣기도 하여 운치를 더했다. 무늬와 그림이 없는 순수 백자도 있으나 청화백자 또는 청화에 동화를 곁들여 아름답게 장식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연적은 문방에서 실용으로 쓰이면서 완상품의 구실도 했다.

18세기 들어서면서 조선백자의 기형과 문양이 더욱 다양해져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의 관요 시대부터는 괄목할 만하게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1752년에 관요가 남종면 분원리로 옮겨진 이후에는 문방구의 종류와 의장이 매우 자유분방하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특히 ‘집 모양 연적(백자청화가형연적(白磁靑畵家形硯滴))’은 여러 형태의 집 모양 연적 중에서도 제대로 격식을 갖춘 뛰어난 예이다. 우진각 지붕에 난간이 있고 공예적으로 변형되긴 했지만 누대(樓臺) 위에 앉혀진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다. 기둥과 문살, 기와 등에 청화를 칠해 장식하였는데 청화의 색깔이 고우며 또 농담을 적절히 구사하여 백자의 고운 피부와 매우 잘 어울리고 있다. 대범한 듯 하면서도 음각과 양각을 잘 조화시켰으며 안정감이 있는 연적이다.

특히 18세기 이후는 청화백자의 유약 발색이 이전보다 짙어지고 도자기의 기형과 문양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면서 연적도 많이 제작되었다. 청화로만 장식된 것도 있지만, 청화에 동화를 곁들여 아름답게 장식한 것도 많다. 이와 같이 도자기로 제작된 연적은 문방에서 실용적으로 쓰이면서도 여러 가지 모양과 형태로 제작되어 장식품의 구실도 했다.


조용한 빛깔의 아취, 청자연적
명상적인 조용한 빛깔과 은은하고도 지체 있는 청자연적은 고려시대 상형청자의 아름다움에 고요와 신비의 생명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대개 공예조각이란 예술의 경지에 미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나친 잔재주와 아첨이 깃들어 속물스럽게 되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청자연적이나 문진과 같은 작은 문방구들은 조형이 자칫 복잡해질 듯 하면서도 도리어 간명하고 물체가 지닌 습성과 아름다움을 잘 살렸다.

지금 전하고 있는 청자연적의 예로는 동자 모양, 도석인물, 원숭이, 원숭이 모자형, 오리모양 연적 등이 남아 있다. 그 중 청자오리연적은 이러한 장점을 가장 잘 살린 12세기 전반기 무렵의 작품이다.

청자거북형연적은 고려시대 비석의 귀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머리가 달린 거북을 형상한 연적이다. 이미 삼국시대 신라 토기 주자 가운데 이러한 양식의 유형적인 선례가 있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 이런 모습으로 세련 발전한 것으로 짐작된다. 거북의 등에 뚫린 물구멍은 둘레가 꽃잎 모양으로 싸여 있고 등 전체에 육각형 귀갑문이 음각되었으며 귀갑문 안에는 왕(王)자 모양의 무늬가 하나씩 있다. 귀갑 가장자리에는 주름 무늬를 띄엄띄엄 반양각했고, 용두의 눈에 철사(鐵砂)를 찍어 눈동자를 표현하였다. 용이나 거북, 물고기 등의 동물과 참외나 죽순 등의 식물, 인물의 모습을 본뜬 상형 청자는 청자 전성기인 12세기 전반에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국보 제74호로 지정된 오리모양 연적은 그 제작수법이 섬세하고 뛰어나서 윤기 나는 색 등은 나무랄 데 없는 걸작품이다. 한 마리의 물오리가 연못에 떠서 연꽃 고갱이를 입에 문 한가로운 모습을 형상한 것으로 등 위에는 연꽃잎을 오그려 붙인 공기구멍이 있고, 물은 오리의 입부리에 물린 연꽃 봉오리로 따르도록 된 기막힌 표현이다. 이 작은 물체가 실물처럼 느긋하게 보이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맛을 느끼게 하지만 잔재주가 아닌 탁 트인 심미안을 표현한 진실성을 느낄 수 있다.

출토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 일본에 살던 존카스비라는 영국인 수집가가 모은 한 무리의 고려청자 속에 들어 있던 것으로 그가 은퇴하고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한국의 청년 수장가 고(故) 전형필 씨가 도쿄의 유력한 수장가들과 맞서서 이 수집품을 서울로 되사들여 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문화재를 높은 학식과 안목으로 수집했던 고(故) 전형필 씨는 수집의 목적도 목적이려니와 애국적인 열의가 더 대단하여 일본인들도 이에 감명을 받아 이해를 초월하여 이양해 준 것이다.

어질고 신선한 멋, 백자연적
우리나라 재래 문방 용품 중에서 조선시대 연적처럼 특색 있는 것은 없다.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의 품격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품격 정도와 생활정서를 잘 엿보게 해 주어 누구나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조선백자 중 백자연적처럼 순정적인 표현을 보인 예는 드물다. 청개구리, 두꺼비, 소, 잉어, 자라, 토끼, 동자에 이르기까지 익살스럽고도 순직한 모습 속에 도공들의 순정을 읽을 수 있다. 그 중 잉어연적은 늠름한 자태를 표현한 것으로 남성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조형의 일종으로 공예 의장에 많이 다루어져 왔던 것이다. 한국 연적은 중국이나 일본 연적들처럼 잔재주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수수한 모습으로 너그럽고 조촐한 선비들의 기개를 드러낸 것이 많다.

백자연적이 조선시대에 다양하고 흔하였지만 많은 명품들이 일본으로 수없이 건너갔다. 사람들이 흔히 무릎연적이라고 부르는 둥근 원형모양의 백자연적은 마치 젊은 여인의 무릎마루처럼 부드럽고 희고 잘 생겼다. 아무런 장식도 없고 다만 둥그런 몸체와 흰 빛깔만으로 이루어진 청백색으로 어질고 신선하여 무릎연적만이 지닌 독특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때로는 청백색 유약만으로 티 없는 멋을 느끼게 해 주지만, 때로는 파초 한 그루를 은은하게 음각해 넣거나, 파초 앞에 앉은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를 쪽빛 청화로 칠해서 흰 백자 바탕이 시원한 맛을 줄 때도 있고 때로는 태극무늬나 매화나무 한 그루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백자무릎연적의 흰 맛과 둥근 맛, 쪽빛과 백색의 환상적인 조화는 한국인의 미의식과 어우러져 친근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다소곳이 한 옆에 앉아 오므린 입으로 물을 따르도록 만든 청개구리의 주둥이는 겉치레가 아니라 연적의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다.

백자연적 중에는 복숭아모양의 연적이 많다. 이것은 문방 용품으로서 실용적인 역할과 방치레의 장식품의 역할도 지니고 있다. 연적은 방주인의 취향이나 교양에 따라서 자기가 선택해서 쓸모와 놓일 자리를 잡는다. 그 중 ‘복숭아모양 연적(선도형연적(仙桃形硯滴))’도 그러한 공간구성에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아름다움은 도공의 예술인 동시에 자기생활 공간에 멋지게 정착시킨 방주인의 안목이기도 하다.

조선 전기의 복숭아 연적은 복숭아 형태를 단순화하면서 봉오리 끝이 봉긋한 것이 특징이다. 물론 봉오리가 좀 더 뾰족하게 솟아나 경쾌한 맛을 주는 것도 있지만, 이 연적은 전체가 풍만하고 편안한 선을 지니면서 봉오리는 의젓한 양감을 지녔다. ‘청화백자진사천도형연적(靑華白磁辰砂天桃形硯滴)’은 탐스럽게 영근 복숭아 모양을 한 연적이다. 줄기와 잎사귀까지 장식하여 마치 나무에 매달린 듯 자연스럽게 꾸몄다. 복숭아의 꼭대기에는 선명한 붉은 자줏빛 동화안료를 채색하여 풋풋한 생명감을 부여하고 줄기에는 갈색의 철화안료, 잎사귀에는 청화안료를 옅게 칠하여 사실감을 높였다.

이 외의 백자연적이나 청화백자연적들도 각기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멋과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 형상만으로도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은 물론 고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연적은 하나하나가 갖는 아름다움이 모두 이유가 있다. 대체로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기형에서 한국적인 특유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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