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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교육(미분류)

인간관계 디자이너

신록(新綠)이다.
‘… 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은 이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라도 우렁차게 터져 나와, 산과 들을 흔들 듯 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동무가 있고,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이양하 선생님의 <신록예찬>이 아니더라도, 우정의 빛깔 신록이 가지는 소프트파워(Soft Power)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신록의 매력 때문에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만사를 제치고 다가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지난 4월 마지막 주, 봄은 봄이되 봄 같지 않았지만 철쭉꽃을 만나러 울산 남창에 있는 대운산에 갔다. 입춘 후 폭설까지 내린 이상하고도 긴 겨울 탓에 철쭉꽃과 유록(柳綠)의 갈참나무 가득한 골짜기가 더욱 반가웠다. 들이마시는 공기에는 숲 향기와 밤새 내린 이슬기가 배어 있어 마음이 상쾌했다. 두 시간 정도 산에 오른 후 나와 집사람은 어김없이 평소에 과일을 깎아 먹는 장소에 이른다. 개울가 큰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곳이다. 오늘도 역시 먼저 도착한 등산객 몇 사람이 쉬고 있다. 그들과 어울려 준비해온 과일을 나누어 먹으며 “봄이 봄 같지 않다”고 한바탕 요란을 떨었다. 모두들 그렇다고 맞장구치며 입을 모았지만 이내 나 자신을 반성했다. 3월 폭설에도 꽃을 피운 산의 한결같음에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등산을 하다 보면 쉬기 좋은 곳이나 정상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마찬가지로 편안한 사람이나 능력 있는 사람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편안하며 능력 있는, 그리고 봄의 산길처럼 생명의 소리가 배어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고수(高手)’라 칭하고 싶다. 각자의 분야에 몰두하면서 의미를 찾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분들을 진정한 리더라 부르고 싶다.
아무리 재미없는 일이라도 그분과 함께 하면 재미가 있었던 그 옛날 3학년 주임선생님, 그리고 꾸중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교감 선생님, 또한, 결재를 받고 나오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국장님 같은 분…. 지금까지도 잊혀 지지 않는 그분들의 소프트 파워, 그것은 실력과 인격과 관심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자신만의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더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다시 산을 오른다. 은방울꽃 군락을 지날 무렵, “진짜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 같아”라는 어느 아줌마의 구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몇 년 전부터 보아온 ‘앵초’는 아직 날씨 때문인지 새싹이 보일 듯 말듯 어리다. 올해도 누군가가 뽑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 감사할 뿐이다. 새싹 돋는 산나물을 밟고 지나는 다람쥐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742m의 대운산 정상에 다다른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땀을 식히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몇 권의 책을 읽거나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생각을 얻어 산을 내려 갈 것이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쓰임이 되자
몇 년 전부터 조직원과의 관계 관리를 중시하는 ‘서번트 리더십’, 즉 섬김의 리더십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나 또한 우리 선생님과 학생들을 신명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고민하는 가운데 학교장에게 있어 인간에 대한 학습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학교를 경영한다기보다는 인생을 경영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과 문학, 역사와 철학에 대한 폭넓은 공부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야 함은 물론이다.
이 칼럼을 쓰고부터는 부쩍 우리나라 옛 문헌에 나타난 교육문제라든지 사회생활, 리더십 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를 얻고자 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현대의 작가들에 의해서 해석되고 편집된 책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시중에 나와 있지 않은 고전문헌들을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한문선생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한국고전번역원(韓國古典飜譯院)(www.itkc.or.kr)이라는 곳을 소개해 주었다. 고전문헌을 수집 · 정리 · 번역함으로써 한국학 연구의 기반을 구축하고 전통문화를 계승 ·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하기 위해 설립된 곳이란다. 아무튼 이 사이트를 통해 리더십과 관련해서 최근에 읽은 것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가 쓴 인사행정의 이론서인 <인정(人政)>이다.

전 세계의 산과 들에 두루 가득 찬 사람들은 모두 운화(運化)를 품부 받아서 형체를 이루고 땅에서 나는 산물(産物)로 자양(資養)을 삼는데,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혼자서는 실행하거나 성취할 수 없다. 평범한 일용(日用)의 일도 오히려 여러 사람과 화협(和協)해야 하니, 이런 까닭에 용인(用人)의 도(道)가 생기게 된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상호 쓰임이 잘 되면 인도(人道)가 이루어지나, 서로 쓰임이 되지 않으면 인도는 무너져 버린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쓰임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쓸 수가 없다.
-<인정(人政)> 제20권 <인정용인서(人政用人序)>

글로벌 스탠더드 못지않은 우리식 서번트 리더십의 명쾌한 지침이다. 사람 관리는 상호적이며, 리더와 구성원은 일방적인 것이 아닌 상호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십의 사전적 의미는 ‘집단의 목표 달성을 위해 구성원들을 자발적으로 참여케 해 이를 달성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곳 ‘지배하는 것’과 다르며 ‘관리’라는 개념과도 다르다. 나는 리더십을 ‘불쏘시개와 같은 역할’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교사의 전문성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잘 가르치는 가’라고 한다면, 교장의 전문성은 인간관계 디자이너로서 ‘먼저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느 중년의 남자가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재래시장 안에 있는 국수집에 갔다. 국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가 꼬막을 사라고 한다. 다리도 아프고, 뜨리미 인데 5000원 받을 것을 3000원에 준다고 꼭 좀 사달라고 한다. 이 중년 남자,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가 떠올라 그 꼬막을 샀다. 할머니는 싱글벙글 집으로 돌아가고, 이 중년의 남자는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으니 기분 좋았다. 그런데 그걸 사무실에 가지고 갔다가 집으로 가기도 뭣해서 국수집 아주머니더러 해 먹으라고 주었다. 국수집 아주머니는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하더니 연세가 좀 든 옆집 떡장수 아주머니에게 그 꼬막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그날 저녁 떡장수 아주머니의 저녁상은 즐거운 자리였음은 물론이다. 떡장수 아주머니는 고맙다고 두 중년 남자들의 국수 값을 계산했다. 두 남자는 공짜로 국수를 얻어먹었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국수집은 국수 값 4000원(한 그릇에 2000원) 외에 팁도 1000원 얻었다. 떡집 아주머니가 국수 값 5000원을 주고 잔돈 1000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주고받았지만 모두가 행복했으니 꼬막 3000원어치의 위력이 대단하다. 그 중년 남자의 정(情)이 새삼 흐뭇하다. 감당하지 못할 ‘기분 좋음’을 퍼뜨린 그의 역할이 참으로 멋지다.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몇 년 전에 이루고 싶은 꿈을 적어보았다. 그중에서 ‘죽을 때까지 매년 300통 이상의 편지를 쓰겠다’는 것이 있다. 장학사 시절, 그 당시 우표 150원의 편지 한 통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수업발표대회 심사위원으로 간 어느 고등학교에서 생물과 여선생님의 차근차근한 열정과 정성스러운 수업에 감동을 받고 돌아와 편지 한 통을 썼다. ‘나, 선생님처럼 수업 잘하는 분은 별로 본적이 없다. 더욱 열심히 해서 부산교육의 초석이 되어 달라’는 요지의 편지와 함께 자그마한 책 한 권을 같이 보냈다. 얼마 후에 책 한 권과 함께 답장을 받았다. ‘당신 같은 장학사 처음 봤다. 부산의 과학교육 발전을 위해 더욱 매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괜찮은 기분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그 후 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상가(喪家)에 들렀다가 처음 만난 후배를 소개받았는데 그 후배는 나의 이름을 재차 물으며 악수한 손을 놓을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사연인 즉, 그 후배는 바로 그 생물선생님의 남편이었고, 아내로부터 들은 얘기 때문에 진즉부터 한번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동기가 돼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이나 생각나는 분들에게 이메일이 아닌 육필로 편지를 쓰고 있다. 5월에 새해인사를 하기도 하고 1월에 보고 싶다는 사연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새해인사가 이메일로 바뀌었고 이제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온다. 정에 대한 그리움을 휴대폰으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 할진대 편지를 쓰는 문화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편지는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가 얘기한 ‘느림의 철학’이요,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은 인생을 살찌워 주는데….
좋은 인간관계는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편지는 서로의 삶에 대한 자세와 내면의 풍광을 통해서 정서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예쁜 마음 하나가 다소곳이 다른 마음에게 닿아 가슴을 설레게 할 것을 생각하며 편지를 들고 우체통으로 향하는 걸음 또한 설렘이다. 스승의 날을 맞아 보내온 제자의 편지 답장 말미에 이렇게 썼다.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 유치환의 통영중앙우체국이 아닌 / 수정동 우체국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CEO 금난새
얼마 전 학교에서 지휘자 ‘금난새’ 초청특강이 있었다. 평소에는 수업 때문에 전체 교직원이 여유 있게 모일 수 있는 시간이 잘 나지 않아 학기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기간을 이용해서 만나고 싶었던 분들을 초청해서 한 수 배우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예술감독 금난새, CEO / Artistic Director Nanse Gum.’ 그의 명함이다. 편안함과 깊고 깊은 내공으로 다가오는 마에스트로 금난새! KBS 교향악단 지휘를 마다하고 수원 시향을 맡아, 당시 1년에 10회도 연주를 하지 않아 존재감 없던 수원필을 수원갈비 보다 유명하게 만든 그의 도전, 중요한 것은 청중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청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란다. 그래서 국내 최초로 지휘자가 해설자로 등장해 청중들에게 쉽고 행복감 주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클래식을 선사하기 위해서 노력했단다. 자신의 재능을 청중들이 맞보게 해야겠다는 열정은 그 자신 에너지의 원천이라 얘기한다. “현실을 모르는 문화지상주의가 아니라 청중의 눈높이에 맞춘 음악을 해야 한다”는 말과 “나의 꿈이 상대방에게도 이익이 될 때 그 꿈이 이루어진다”라는 결정적인 일갈 앞에서 가슴이 맑아진다.
나는 오늘도 학교 구성원에게 쉽고 재미있게 다가가면서 행복을 주는 소프트 파워, 그리고 ‘굴리면서 굴러가는’ 나와 자전거처럼 상호 유기적인 리더십이 함께 어우러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인간관계 디자이너로서의 교장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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