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교환교수로 나가 강의를 하고 있던 때다. 같은 과 교수로부터 국제전화가 왔다. 요지는 졸업생 한 명이 대학 홈페이지에 자신이 4년간 들었던 전체 교수들의 강의에 대해 실명까지 거론하며 평을 올렸는데 부정적으로 거론된 교수들이 상처를 많이 입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강의에 대한 평도 있다고 했다. 궁금해서 물었더니 이런 내용이었다. ‘박남기 교수, 그는 무서운 사람이다. 30분만 강의를 들으면 어제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된다.’ 그 말을 전해 들으며 함께 파안대소했다. ‘맹랑한 녀석.’
그러나 그의 평에 대해 나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나는 첫 강의부터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작업을 시작한다. 첫 시간 ‘학문의 세계’에 대한 특강에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비롯한 몇 가지 자료에 근거해 학문이란 것이 무엇이고, 그 중에서 인문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비교해 어떤 특성을 가졌으며,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교수와 학생들의 역할은 무엇이 돼야 할 것인가를 설명한다.
‘어느 한 패러다임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패러다임을 여행하고 탐구하며 그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론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의 역할이다. 한 패러다임에 반하여 더 이상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행하기를 중단한 채 그 패러다임만을 신봉하며 되뇌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그 패러다임의 개라고 한다.’ 유창하게 설명을 마치고 “이해됐습니까?” 물으면 학생 대부분은 큰 목소리로 “예”라고 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인다. 그 반응을 기다렸다가 다시 반문한다. “예라고 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순간 여러분은 뭐가 되는 줄 아나요?” 갑작스런 반문에 대부분 어리둥절해 하다가 한 두 명이 작은 목소리로 답을 한다. “교수님의 개요.”
“내가 주장한 것은 나의 이론일 뿐입니다. 나는 각각의 이론과 패러다임은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다른 이론과 패러다임보다 더 적합한 자기 고유의 강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판적 실용주의자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게 아니라 박남기의 주장은 어떤 한계를 갖고 있을까, 나는 어떻게 그의 주장을 극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번 학기 동안 여러분은 끝없이 overcoming 박남기, 즉 ‘박남기 뛰어넘기’를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껏 필기하며 교수의 설명을 잘 이해했고, 새로운 관점을 얻게 돼 기분이 좋은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나의 개가 되었다고 하니 학생들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나는 학생 전체를 상대로 어떤 주제에 대해 찬반 토론도 즐겨한다. 교․사대 통폐합에 대한 찬반토론에서 만일 학생들이 지면 교대는 없어질 것이라고 하면 학생들은 진지하게 임한다. 학생들이 코너에 몰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 이번에는 학생들과 내가 입장을 바꿔 논쟁을 다시 한다. 이 주제로 밥을 먹고 사는 나와 학생들이 논쟁을 하면 학생들이 이기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이유는 깊고 폭넓은 연구와 고민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세우지 않으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으며,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아도 상대와의 논쟁에서 패하게 되고, 그러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켜낼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렇게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일부 학생들은 수업 내내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때는 강의 후 뭐가 뭔지 더 이상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런 학생들에게 “내 강의의 목적은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 혼란을 극복하면서 답을 찾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이렇게 첫 시간부터 당하며 한 학기를 공부하다 보니 학생들이 나를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나와 만날 때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고,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될 때, 더구나 이러한 것들을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고 깨닫도록 이끌 때 학생들은 배움의 여행길을 나와 함께 하고 싶을 것이다.